1995년 4월 중국 타우위타이(釣魚臺).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베이징 주재 한국 특파원을 상대로 던진 폭탄 발언은 유명하다. "한국 정치는 4류이고, 행정과 관료는 3류이며 기업은 2류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이 보인 반응이 걸작이다. "뭐라꼬. 그런 소릴 했다꼬. 글마가 미쳤나."
오랫동안 이 회장이 내린 판단을 지지했다. 세상 흐름에 예민했던 그가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존재 자체가 한국 정치의 중심이었던 YS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이 회장이 평가한 4류는 한국 정치를 오히려 잘 봐줬다. YS 시절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뒤바뀐 것만으로도 4류 축에는 들 만했다. 지금은 4류보다도 훨씬 못하다.
한국 정치는 진영 논리가 국가 이익에 앞선다. 분열적이고 퇴행적이며 반지성적인 것을 넘어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치 탓에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든다.
두 가지 사례만 보자. 전 세계가 반도체 시장 선점을 위해 사생결단식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대만 등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국가 차원에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 육성에 5년간 약 70조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25% 세액공제 혜택도 포함돼 있다.
유럽연합은 반도체에 62조 원을 지원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일본은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12조5천억 원을 투입한다. 중국은 10년간 187조 원을 투자한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TSMC와 3위 업체 UMC를 보유한 대만도 연구개발에 25%, 첨단 설비투자에 5% 세액공제하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양향자 무소속 국회의원이 지난 8월 반도체특별법을 발의했지만 지금껏 표류하고 있다. 야당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 특혜라며 반발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 선점을 위해 벌이는 총성 없는 전쟁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제때에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 경쟁국이 날고뛰는 사이 정쟁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 우리 정치 현실이다.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 기술 개발 예산 문제도 그렇다. 전 세계 70여개 국가가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술 선점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정부는 SMR 기술 개발 예산 31억 원을 배정했지만 야당은 전액 삼감을 예고했다. 미국은 SMR 연구 개발에 2조 원이 넘는 돈을, 프랑스는 1조3천억 원가량을 투자한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미래가 달린 중차대한 문제"라며 야당 협조를 당부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 시절 SMR 관련 공약까지 한 바 있다. 미래 세대 먹거리 산업도 정쟁 앞에서는 무력하다.
변방의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 한반도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는 나당연합국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유는 정치 안정 여부였다. 고구려는 정쟁으로 날을 세웠고, 신라는 똘똘 뭉쳤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에 맏아들 남생이 동생들과 권력 다툼 끝에 당나라에 투항했다. 신라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대동단결했다.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강대국이 정치 분열 탓에 멸망한 역사 사례는 무수히 많다.
경제력에서 워낙 큰 차이가 나는 남북한 간 체제와 국력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주민들이 아사(餓死) 직전임에도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지 않았다. 세계 10대 경제력을 보유한 남한은 분열의 정치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누가 역사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 때때로 섬뜩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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