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그리고 게르니카

전쟁 희생자 기리며…피카소 대작 3주 만에 그리다
1937년 히틀러, 게르니카 무차별 폭격…이틀 내내 불타고 인구 3분의 1이 참변
"나는 인간을 사랑하기에 전쟁을 혐오" 부조리함 전 세계로 알리려 벽화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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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새순처럼 돋아날 때가 있다. 내겐 봉쇄된 국경이 열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이 팬데믹 이후의 시간이 그렇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아침 이슬을 흠뻑 머금고 햇살에 반짝 빛나는 나무 새싹을 만난 듯한 요즘이다. 진부하고 낡은 말을 싫어하지만, TV 홈쇼핑에서 여행상품을 팔고 자주 이용했던 여행사에서 보내온 두툼한 여행상품 광고책자에도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을 이미 가 보았지만 다시 한 번 꼭 더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예술가들의 흔적을 기록하는 '박미영의 예술기행'으로 흐르는 물에 쓰듯 지면의 제목을 바꾼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18세기까지 병원이었던 건물을 1992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2005년 장 누벨에게 설계를 맡겨 기존 사바티니관에 이어 확장한 곳이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18세기까지 병원이었던 건물을 1992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2005년 장 누벨에게 설계를 맡겨 기존 사바티니관에 이어 확장한 곳이다.

◆바스크에서 마드리드까지

바스크에 갔다. 이베리아 반도의 타르테소스문명부터 히스파니아, 황금제국시대, 근현대 빛과 열정의 스페인 예술에 이르기까지 '스페인 지중해의 열정' 강의를 모두 수강한 1월 중순 무렵이었다. 바스크의 주도 구겐하임미술관이 있는 빌바오와 게르니카는 기차로 한 시간 거리다. 나는 꼭 게르니카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일정상 빌바오를 거쳐 마드리드 레이나(왕비라는 의미) 소피아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하루 종일 보는 것으로 최종 결정지었다.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근현대사적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문득 체 게바라가 바스크 이민 후손이라던 강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스페인 내전 이후 생겼다가 2011년 무장 해제한 바스크 분리주의 급진적 단체 ETA, 금발에 눈썹이 짙고 벽안, 녹안 그리고 강한 턱을 가진 미남, 미녀들이 많고 베레모를 쓰는 전통이 있다니 틀림없는 듯하다. 또한 바스크 고유언어가 있어 스페인에서 우리나라를 Corea가 아니라 Korea로 부르는 유일한 곳이다. 아쉽지만 빌바오에서 하루를 묵고 6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정원, 칼더의 작품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정원, 칼더의 작품

이틀간 묵은 마드리드는 역시 아름다웠다. 셰르반테스 기념비와 돈키호테, 산초의 청동상이 있는 스페인 광장으로 가는 길에 지나간 마드리드 대학은 스페인 내전 때 살해당한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와 살바도르 달리, 부뉴엘이 함께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그 앞을 서성이며 기숙사를 물어 들러보고 싶지만 참는다. 다음에 꼭 다시 와서 벨라스께스, 엘 그레코, 고야의 흔적까지 샅샅이 살펴볼 테다, 결심한다.

라스벤타스 투우장은 시즌이 아니어서 레알 마드리드 구장을 지나 시벨레스, 마요르, 숄광장을 지나며 그란비아를 누빈다. 마드리드는 스페인 내전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1939년 프랑코 파시스트군은 3년에 걸친 포위전 끝에 공화국의 마지막 요새 마드리드를 함락, 스페인 내전을 끝내고 죽을 때까지 스페인을 지배했다. 숄광장 야바위꾼은 내기에 이긴 내게 돈은 주지 않고 게임을 계속 하잔다. 프랑코 전술이냐, 빈정대다가 그동안 맛들인 리오하 와인을 마시러 갔다. 마드리드의 밤은 역시 아름답다.

게르니카를 위해 그렸던 피카소의 스케치
게르니카를 위해 그렸던 피카소의 스케치

◆게르니카, 피카소의 항변

'나는 인간을 사랑하기에 전쟁을 혐오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1937년 4월 26일 히틀러는 스페인 제2공화국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코에 부역하듯 바스크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콘도르군단을 보내 무차별 폭격했다. 나치로 발호한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인류사 최초로 게르니카에 전투기 폭격 실험을 한 것이었다.

결과는 도시 인구 ⅓에 달하는 1,654명의 사망자, 889명의 부상자 발생이었다. 마침 장날이어서 도심에 시민들이 많이 모였던 터라 피레네산맥 중턱 평화로운 도시 게르니카는 폭격기 24대가 쏘아댄 소이탄을 비롯한 24톤의 폭탄으로 궤멸되고 말았다. 도시는 이틀 내내 불타올랐고 독일군은 공화군 침투를 제지하고자 인근 다리와 길마저 모두 파괴해버렸다.

당시 파리에 있던 피카소는 분노하여 3주일 만에 대작 게르니카(높이 3.5미터, 너비 7.8미터)를 그렸다. 그리고 프랑코군과 격전 중인 제2공화국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벽화를 의뢰받자마자 스페인관에 전시했다. 프랑코를 증오한 피카소는 그 해 '프랑코의 꿈과 거짓' 동판화집을 출판했고 1973년 4월 프랑스에서 사망(올해가 피카소 서거 50주년이다.)할 때까지 프랑코 치하의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18세기까지 병원이었던 건물을 1992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2005년 장 누벨에게 설계를 맡겨 기존 사바티니관에 이어 확장한 곳이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18세기까지 병원이었던 건물을 1992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2005년 장 누벨에게 설계를 맡겨 기존 사바티니관에 이어 확장한 곳이다.

레이나 소피아미술관은 18세기까지 병원이었던 건물을 1992년 미술관으로 개조하고, 2005년 장 누벨에게 설계를 맡겨 기존 사바티니관에 이어 확장한 곳이다. 각 층마다 입체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작품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등과 관련된 사진과 잡지, 프로파간다, 라틴아메리카 미술 그리고 많은 실외 조각까지 폭넓은 현대미술을 소장하고 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유언대로 스페인 내전으로 인한 망명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전시들에 걸린 뒤, 제작 당시 연인이었던 사진작가 도라 마르가 찍은 모든 제작 과정 사진들, 예비 드로잉 45장 등과 함께 뉴욕현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프랑코 사후 1981년 스페인 부엔 레티로궁으로 반환되었다가 1992년 이곳 국립 레이나 소피아미술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드디어 피카소의 게르니카 가까이 온 나는 브라크, 달리, 레게, 그리스, 콜더, 마그리트, 에른스크, 리히텐슈타인, 베이컨을 파라랑 나비처럼 훑어보고선 2층 205호 게르니카관으로 날아갔다. 아, 관람객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모두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다. 사진 촬영 금지 표시가 있으니 그 누구도 전화기나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다. 우선 3층과 4층을 먼저 보고 내려와야겠다. 하지만 되돌아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냥 조용히 관람해야겠다.

파블로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상황을 그린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상황을 그린 게르니카

검은색, 흰색, 회색만 사용한 거대한 화면에는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 마치 악마의 눈이나 폭탄처럼 보이는 전등. 죽은 새, 미노타우로스 같은 황소, 창에 찔려 울부짖는 말, 부러진 칼을 쥔 채 쓰러진 사람, 부숴진 신체들, 불타는 건물 아래 절규하는 사람들… 무차별 폭격의 참상이 그대로 느껴진다. 글을 쓰는 지금 우크라이나, 수단 또는 이름도 모를 나라의 전쟁들이 떠올라 욕지기가 치민다.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아비규환을 붉은 피나 타오르는 노란 불꽃이 아니라 무채색만으로 그린 것은 벨라스케스나 고야의 영향도 있지만 당시 이미 세계적 거장이었던 그가 그 부조리한 비극이 전 세계에 더욱 알려지기를 원해서였다고.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된 게르니카는 바로 이튿날부터 전 세계 신문 1면에 실렸고(당시 흑백으로만 발행되던 신문의 지면을 피카소가 고려했다는 것), 그 반향은 실로 엄청나 국제사회와 세계 지성들을 움직이게 했다.

수많은 역사, 이야기, 전설, 비극, 은유 등이 가득한 게르니카를 자세히 보니 정중앙에 누군가 긴 팔을 뻗어 내민 등불이 보인다. 더 자세히 보니 시체들 사이 한 송이 꽃도 있다. 아아, 이것이 어쩌면 '게르니카는 폭격 당한 모든 도시에 대한 그림이다.'란 피카소의 항변일 테고,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쓰게 한 동력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마치 오래 감지 않아야 이기는 눈 싸움이나 매직 아이를 오래 들여다 본 것처럼.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시인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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