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St. Ottilien)

수도원 기행의 마지막 탐방지인 독일 뭔헨 근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돼 있던
수도원 기행의 마지막 탐방지인 독일 뭔헨 근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돼 있던 '겸재정선화첩'이 2005년 10월 28일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이송, 보관해 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수도원 순례도 끝날 때가 되었다. 구약성경 전도서의 이야기처럼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시작할 때가 있으면 끝낼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번 순례는 독일 뮌헨(Munich)에서 시작했는데, 끝도 뮌헨이다. 우리가 탐방할 마지막 수도원 뭔헨 근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다.

시작과 끝이 같은 이번 여정은 '사람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오묘하게 가슴 속에 와 닿게 했다. 수도원 순례는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우리 존재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까를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오래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장이던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가 한국을 방문한 후 쓴 기록이 가슴을 울렸다. 그는 우리 민족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사람들은 자연을 가까이 한다. 번뇌를 벗으려 깊은 산 속을 찾아 수행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 수도자들도 속세를 떠나 채소밭을 일구면서 청빈한 생활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가운데 그들은 기도와 명상의 생활을 지속해 나갔다. 세월이 흘러 이러한 은둔생활이 서구인들에게는 이제 '폐쇄'로 인식되었고, 한국의 수행자들에게는 '관습'이 된 것 같다." 베버는 우리 한국인을 종교적이고 영적인 존재로 본 것이다. 우리 민족은 기독교 신앙과 전통은 몰랐지만 그 삶은 순례적이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틸리엔이라는 작고 한적한 마을에 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틸리엔이라는 작고 한적한 마을에 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탄생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오틸리엔이라는 작고 한적한 마을에 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 수도원(Schlierbach Abbey)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이곳을 향해 달렸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지나 한적한 남서부 독일로 들어섰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오틸리엔 마을의 대표 건물처럼 순례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작은 언덕에 놓인 수도원은 무성한 숲과 더불어 마을과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절묘한 조화의 아름다움을 카메라 렌즈에 담고자 이리저리 움직였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1902년에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는데, 그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오틸리엔의 옛 마을 에밍(Emming)에 성이 생겼고, 그 성에 딸린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성과 예배당이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새롭게 되었다. 성과 예배당의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뀐 후, 1886년에 이 부지는 베네딕트회 소속이었던 안드레아 암라인(Andreas Amrhein)의 소유가 되었다.

암라인은 1887년에 이곳에서 베네딕트 수도 생활 방식과 선교를 결합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이곳을 젊은 베네딕트 수도승을 위한 학교와 선교사들의 훈련 장소로 만들었다. 1895년 암라인이 이 공동체를 떠난 후, 이곳은 수도원이 되었다. 다른 3개의 수도원이 생긴 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1914년 베네딕트 선교연합회의 대수도원으로 선택되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내부모습.제단 앞 왼쪽에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내부모습.제단 앞 왼쪽에는 '덕원 수도원'이라는 이름이 양각된 종이 놓여 있으며 제단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베네딕트 규칙에 따라 수도생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회로 오틸리엔 연합회의 어머니 수도원으로 이곳의 수도승들은 베네딕트 규칙에 따라 수도생활을 한다. 이들은 베네딕트 규칙 중 특히 공동 생활, 공동 기도, 그리고 선교와 개인의 영적 성장에 천착해 왔다.

무엇보다 오틸리엔 연합회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지역교회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전 세계에 선교적 책임을 다하는 데 헌신해 왔다. 수도원은 1930년까지 성장을 거듭해 남아프리카, 한국,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400여명으로 늘어난 연합회 회원을 위해서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장해왔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신고딕 양식의 수도원 교회는 1903년에 축성되었지만 원래의 교회는1897년에서 1899년 사이에 지어졌다. 높이 75m의 뽀쪽한 팔각형 첨탑은 멀리까지 수도원의 위용을 드러낸다. 그리고 수도원 종탑에는 8개의 종이 달려 있고, 그곳에서 나오는 종소리는 남부 독일에서 가장 깊은 음색을 낸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동행한 천병석 교수와 필자는 수도원 뒤편에 있는 숙소 앞에 주차를 한 후, 예약한 방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이곳 숙소는 지금까지 방문한 수도원 숙소와는 달랐다. 현대식 건물은 물론이고 숙소 이용도 일반 대중 숙소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수도원 탐방 마지막 장소에서 익숙함이라는 편리함을 느꼈다.

잠깐의 휴식을 뒤로 하고, 한여름 이른 오후 우리는 수도원을 향했다. 숙소에서 수도원은 지척이었다. 그러나 길게 뻗은 가로수 길은 사뭇 멀게 느껴졌다. 그 짧은 거리에서 우리는 낯익은 사람들을 만났다. 모든 게 생경했다.

수도원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몇 년 전 프랑스 솔렘 수도원 탐방길에서 만난 가톨릭 신학대학교 학생들과의 만남 이후 처음이다. 우리는 중년의 부인, 젊은 청년들과 마주쳤다. 이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 반가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수도원을 향한 숲길을 조용해 걷고 있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제단 앞 왼쪽에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제단 앞 왼쪽에는 '덕원 수도원'이라는 이름이 양각된 종이 놓여 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은혜

우리는 수도원 교회에 들어갔다. 우리는 교회를 돌아보기도 전에 습관처럼 긴 장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순례자의 기도가 이어졌다. 남부 독일에서 스위스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돌아온 긴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모든 길이 감사였다. 한국에서 계획한 일정이 그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 행복했다.

짧지 않은 순례의 기간, 천 교수는 나의 스승이었다. 60년의 세월, 그 다름의 길이 큰 배움이었다. 애트몬트 수도원과 슐리어바흐 수도원에서 만났던 수도승과의 대화, 라브리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는 일생의 과제로 다가왔지만 숙제처럼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모든 것이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는 친근했다. 한국의 여느 가톨릭 교회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수도원 교회는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수도원 제단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새겨져 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한여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의 가느다란 빛 아래 놓인 흑백 사진, 서른여덟 분의 순교자의 얼굴은 한국 선교 역사의 아픔을 한눈에 보는 듯했다.

제단 앞 왼쪽에는 '덕원 수도원'이라는 이름이 양각된 종이 놓여 있었다. 상트 오틸리엔에서 한국으로 파견한 수도사들이 함경남도 원산에 세운 수도원이다. 해방 후 북쪽이 공산화되며 덕원 수도원은 심한 고난을 겪었다. 이후 남쪽으로 피신한 수도사들이 세운 수도원이 현재의 왜관 수도원이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종탑에는 덕원 수도원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종이 달려 있다. 신앙 때문에 박해받은 이들의 생명의 소리가 한국이 아니라 독일 오틸리엔의 작은 마을에서 울리고 있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제단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교회 제단 아래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과의 인연

2005년 10월 28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돼 있던 '겸재정선화첩'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보내 기탁 보관 중에 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유명 경매회사인 뉴욕 크리스티가 거액의 거래를 언급하며 경매를 제안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측은 기꺼이 한국인의 작품을 한국 땅으로 돌려보냈다. '겸재정선화첩'을 한국으로 돌려주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장이던 슈뢰더는 이런 말을 했다. "뭔가를 주려면 기꺼이 줘야 합니다. 화첩이 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한국에 많은 것을 주었다. 일제 강점기, 6.25의 고난 가운데 우리 민족과 함께 시련을 겪었다. 원산 덕원 수도원에서 생명까지 내놓았다. 수도원은 '천국의 예루살렘을 지상에 구현해 놓은 공간'이다. 천국의 삶이 이처럼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자신을 주는 삶이리라.

우리에게 천국의 삶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상트 오틸리엔도 그 발자취를 따랐다. 수도승의 수행은 상트 오틸리엔의 수도승들이 아낌없이 주었던 그 삶이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이들의 천국에서 이번 수도원 순례를 끝내게 된 것이 은혜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일이 은혜로 시작해 은혜로 끝이 났다. 뮌헨에서 뮌헨으로, 천국에서 천국으로, 은혜에서 은혜로.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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