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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백제는 강성한 농해(農海)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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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구조 추정도.
풍납토성 구조 추정도.
송파구 석촌동 백제 전기 고분군.
송파구 석촌동 백제 전기 고분군.
임진강 삼곶리에 있는 백제 전기 적석 계단식 고분. 임진강 강상세력(소국)의 전제를 말해준다.
임진강 삼곶리에 있는 백제 전기 적석 계단식 고분. 임진강 강상세력(소국)의 전제를 말해준다.
백제 시기 한강에서 운행된 목조돛단배 추정 모형( 한성 백제박물관).
백제 시기 한강에서 운행된 목조돛단배 추정 모형( 한성 백제박물관).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어망추(한성 백제박물관).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어망추(한성 백제박물관).
청동으로 만든 초두(한성 백제박물관).
청동으로 만든 초두(한성 백제박물관).
비류가 도읍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천의 문학산성.
비류가 도읍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천의 문학산성.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목제우물 모형(한성 백제박물관).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목제우물 모형(한성 백제박물관).

◆백제는 농업과 해양을 활용한 농해(農海)국가

역사상을 해석할 때 '공간이나 시간, 주체, 특히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관점은 중요하다. 서양의 근대 문명과 그를 수용한 동아시아 세계는 역사를 중심부에서 주변을 정복하고, 모든 사회적인 능력을 중심으로 집중시켜 발전한다고 이해했다. 또한 역사와 문화의 터전을 육지 중심, 농경 중심, 흙 중심으로 해석해 왔었다. 한국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모든 문명과 역사는 육지와 해양, 그것을 이어주는 강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했다. 실제로 중핵에 해당하는 공간은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해륙 접경지역, 특히 큰 강의 하류와 해양이 만나는 '강해'(江海)지역이다.

또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핵들이 모여 상호작용하면서 점차 중핵을 만들고, 중핵은 배급처의 역할을 했다. 즉 여러 거점(도시·항구·분지·산록지 등)들이 단일한 중심도시가 아닌 상호 연결망을 구축하며 문명력을 발휘한다. 단일 중심지에서 주변을 흡수하는 식이 아니라, 여러 노드가 '환류'와 '역환류'를 거치며 동시다발적으로 확장·전환하는 구조이다. 나는 '터(field and multi core)트워크 시스템'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런 지역의 산업은 농업과 어업, 상업 심지어는 임업까지도 참여하여 유기적으로 발전한다.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처럼 농해(農海) 문명 또는 농해(農海) 국가들이 탄생한다.

◆수도는 강해(江海)도시

우리 역사 속에서 대부분 국가들이나 큰 도시들에서 그러한 특성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나라는 백제이고, 약 500년 동안 수도 역할을 했던 서울 지역은 일종의 강해도시였다. 백제는 '삼국사기'에 건국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약 2천여 년 전에 압록강 중류에서는 홀본 부여의 원세력들과 동부여에서 온 유리태자의 동부여 세력과 갈등이 벌어졌다. 결국 추모(주몽)의 비였던 소서노는 왕자인 비류⋅온조와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많은 백성들이 뒤를 따랐다는 기록을 믿는다면 이는 단순한 소수의 정치적인 망명이 아니라 '대규모의 이주'(settlement)와 '신 영토의 개척'이었다.

그들이 정착한 신천지인 경기만은 북으로는 황해도의 장산곶에서부터 해주만·강화만·인천만·안산만·남양만·평택만까지 이르는 넓은 해역과 내륙을 가리킨다. 상황에 따라서 약간의 편차는 생겼지만 선사시대부터 동아지중해 교통망의 3~4개 중핵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산동반도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 항로'의 중간 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 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결절점이다. 때문에 한반도에서 가장 훌륭한 해륙교통의 요지이고,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이고, 무역망이 발달한 물류의 허브였다.

따라서 고대국가들이 패권을 장악할 때 탐내는 우선 순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미 기원전 194년에 원조선이 이주 세력인 위만에 의해 멸망당할 때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은 남북 연근해항로를 이용하여 남하했다. 그리고 서해 중부해안 또는 남부의 해안지대에 정착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멸망했을 때도 대규모의 난민들이 남쪽으로 이주했다. 그렇다면 이미 2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이 무렵에는 비류와 온조 집단이 경기만의 전략적인 가치를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지역 해양세력들의 도움과 협력을 받아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은 이 항로를 이용해 경기만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형인 비류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 서울 주변에 도착하였으나 경기만의 한 가운데인 인천만에 정착하여 미추홀 지역(인천 문학산성 일대)에 나라를 세웠다. 해양 진출과 무역에 적합하며, 소금과 해산물을 얻기에는 유리한 일종의 '해항도시국가'(polis)였다. 하지만 땅이 습해 농사에 부적합하고, 조석 간만의 차이가 심해 양질의 항구는 아니었고, 수군 공격에도 노출되는 취약점이 있었다. 반면에 온조는 곧 하북 위례성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는 한강수계를 통해서 바다와 이어지는 일종의 점에 위치한 '강해(江海)도시'였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정통성과 권력을 놓고 벌어진 두 도시국가 간에 벌어진 경쟁에서 온조는 승리했고, 백제로 발전했다.

수도 또는 왕성의 위치·성격·역할 등은 국가의 성격과 발전방향, 문화를 이해하고, 국가 발전의 한 원동력을 모색할 때 필요한 요소이다. 동아지중해에서 자연환경, 역사적인 계승성,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백제는 해륙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바람직하며, 수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 한성 시대 백제 왕성의 위치를 놓고 '몽촌토성설'·'풍납토성설', 그리고 하남시의 교산동 및 춘궁동 일대설 등이 있다. 그런데 필자는 궁궐 또는 궁성을 넘어서는 도성 개념을 적용하면서 풍납토성, 몽촌토성, 하남시 일대, 한강 북쪽의 광장구 일대 등을 포함하여 '도성'이라고 본다. 이 한성 지역은 한강을 통해서 한반도의 중부 전체와 이어지며, 경기만을 매개로 동아지중해 서쪽의 모든 항로와 연결된다.

또한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길을 통해 한반도 중부의 모든 지역과 교통망, 물류망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강가에 분포된 군소 세력들을 하나의 정치권, 시장권, 생활권으로 재편하여 중앙의 정치력을 강화시키는데 유리하다. 지경학적으로도 환경이 매우 좋다. 한강의 상류에서 목재를 비롯하여 임산물의 공급이 편리하고, 하구에는 들판이 많아서 일산, 김포, 강화 등에서는 벼농사가 이미 5천년 전부터 발달했다. 또한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적들에서 확인되듯 조개, 생선류 등 어업 자원이 풍부했다. 육로교통과 함께 내륙수로교통 및 해양교통에도 적합해서 한반도 모든 해안은 물론 반대편의 중국 산동지역이나 요동지역과도 항로로 연결된다. 관미성(강화도설, 임진강 하구의 오두산성설), 인천 지역의 한진(大津) 등은 외항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풍납토성에는 항구는 물론이고, 양질의 부두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흔적으로 여겨지는 유적들이 있다. 1997년부터 재발굴되면서 성벽은 둘레 3.7㎞, 너비 40m 이상, 높이 11m에 이르고, 삼중겹의 환호가 둘러싼 거대한 규모로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큰 집터들과 포장된 도로 외에도 진나라의 초두(청동제 주전자)를 비롯해 토기, 어망추 같은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 기원 전에 쌓은 왕성으로 밝혀졌다. 근처의 몽촌토성(올림픽공원)에서는 서진의 도기 파편들이, 거대한 규모의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동진 계통의 자기가 발견됐다.

이렇게 백제는 출발부터 내륙의 강 하류와 해양에서 농업과 어업, 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한 '농해(農海)국가'로 출발했다. '삼국지' 한전에 따르면 이 무렵 한반도 중부 이남에는 78개의 소국이 있었다. 이 삼한 소국들은 수 천명에서 수만 명의 인구를 가졌으며, 대부분은 강과 해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일종의 나루국가들이었다. 경기만에는 김포, 강화, 남양 등지에는 소국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백제'(伯濟)였다. 온조는 백제라고 국호를 바꾸었는데,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에는 백제가 '백가제해'(百家濟海)라는 말의 줄임말로서, 100가가 바다를 건너온 탓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출발과 정통성이 해양과 연관있음을 알려준다.

◆백제의 번성

백제의 임금들은 이후 소국들을 병합해 갔다. 고이왕은 236년 서해의 큰 섬(영종도나 강화도로 추정)에서 군사를 이끌고 사슴사냥을 했는데, 이는 한강 하구와 경기만 지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선언한 행위였다. 4세기 초에 들어와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생존을 건 전쟁을 벌였는데, 여기에는 해양 질서적인 배경이 있었다. 백제의 정복군주인 13대 근초고왕은 한강이 수계망과 경기만이 가진 경제·외교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더구나 예성강 하구 및 황해도 지역에는 전 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섭을 주도했던 세력들과 그 문화의 토대가 남아있었다. 때문에 평양 지역을 중시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한 고구려와 충돌했다. 이는 육지의 영토를 확대하는 목적 외에도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대중교통로의 확대 및 교역상의 잇점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한 백제는 중국의 북부지역과 바다를 통하여 교섭을 활발히 하였고, 또 직접 진출한 흔적이 있다. 그런데 중국 측의 몇몇 사료들을 보면 이 무렵에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 물론이고, '통전'(801년)은 '유성(현재 랴오닝성 차오양)과 북평(베이징 근처) 사이'라고 위치까지 밝혔다. 이 때문에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또한 일본 열도의 정치세력과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망을 확충할 필요성이 커졌다. 따라서 전라도 지역의 마한을 세력권으로 편입시킨 후에 그 지역의 해양능력과 항해환경을 이용하여 일본열도로도 진출을 시작했다.

'삼국사기'에는 이후에 근구수왕, 침류왕 때까지 양자강 하류로 도망간 동진에 사신을 다섯 번이나 파견했고, 동진은 백제에 두 번 사신을 파견했다. 이 무렵인 아신왕 때에 광개토태왕이 파견한 수군에 의해 경기만이 초토화되고, 수도가 포위당해 항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구이신왕 대에는 송나라와 교섭을 시작했고, 비유왕 시대에는 교섭을 6번이나 했다. 서해를 횡단하여 아주 빈번하게 교류를 했다. 개로왕은 북위와 교섭을 벌였으나 결국 고구려의 방해를 받아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양자강 하류에 수도를 둔 남조와는 4번이나 교류했다. 그는 결국 475년에 장수왕에게 한성을 점령당하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강해도시인 서울지역에서 발전을 거듭했던 백제는 남천을 했고, 그 곳도 역시 하항도시(웅진성, 공주일대), 그리고 강해도시(사비성, 부여 일대)였다.

백제는 농업국가로서 천천히 발전한 내륙형 국가가 아니라 경기만과 한강하구를 토대로 이주와 정착과정부터 내륙의 강가와 해양에서 주변의 소국들의 토대를 수용하여 농업과 어업, 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한 '농해(農海)국가'였으며, 이후에도 그러한 국가 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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