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8000시대 개막의 한복판에서 30년간 굳어졌던 한국 증시의 권력 지도가 흔들리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시가총액 1300조원을 돌파하며 삼성전자의 78% 수준까지 따라붙었고, 밸류에이션 지표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를 추월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영원한 1위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에 코스피 시총 왕좌를 내줄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1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4일 종가 기준 삼성전자 주가는 29만 6000원으로 30만원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시가총액은 약 1767조원 규모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SK하이닉스는 197만원으로 마감해 시가총액이 약 1386조원에 이른다. 양사 합산 시가총액만 3150조원을 넘어선다.
◇ 3년 만의 지각변동 ― 시총 격차 비율 31%에서 78%까지
두 회사의 시총 격차 축소 속도는 가히 폭발적이다.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2022년 말 101조 9000억원으로 삼성전자(330조 1000억원)의 30.9% 수준에 불과했다. 2023년 말 22.0%, 2024년 말 39.9%로 등락을 거듭하던 SK하이닉스의 상대 비율은 2025년 말 66.8%로 도약한 데 이어 14일 기준 약 78.4%까지 치솟았다. 3년 전 삼성전자의 '4분의 1'에 불과했던 SK하이닉스가 이제 '5분의 4' 수준까지 추격한 셈이다.
분수령은 5월 4일이었다. SK하이닉스 주가가 장중 143만원까지 오르며 시가총액 1000조 6341억원을 기록했다. 코스피 상장사 중 삼성전자에 이어 두 번째로 1000조 클럽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이날 SK하이닉스는 장중 9% 이상 폭등하며 신고가를 새로 썼다.
상승 모멘텀은 5월 내내 이어졌다. SK하이닉스는 13일 7.68% 폭등하며 197만 60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장중 199만 4000원까지 오르며 '200만원 황제주' 등극을 코앞에 두기도 했다. 최근 1개월 수익률은 78.68%로 삼성전자(35.44%)의 두 배를 넘어섰다. 같은 기간 코스피 황제주(주당 100만원 이상)는 11개로 늘어나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 사상 첫 밸류에이션 역전 ― '국내 1등 프리미엄'이 이동했다
시총보다 더 상징적인 사건은 밸류에이션 지표의 역전이다. 14일 종가 기준 SK하이닉스의 2026년 연간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6.79배로 삼성전자(6.77배)를 0.02포인트 차이로 사상 처음 앞질렀다.
격차 변동 속도가 충격적이다. 3개월 전 삼성전자 8.08배, SK하이닉스 5.28배로 2.80포인트 벌어져 있던 격차가 단 석 달 만에 완전히 역전됐다. 1개월 전만 해도 삼성전자 5.70배, SK하이닉스 4.66배의 격차가 뚜렷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주당순이익(EPS) 컨센서스가 102.15% 상향돼 SK하이닉스(78.76%)보다 실적 개선 폭이 더 컸음에도 주가 상승 속도가 SK하이닉스 쪽으로 쏠린 결과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30년간 누려온 '국내 1등 기업 프리미엄'이 SK하이닉스로 이동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단순한 주가 등락이 아니라 시장이 두 기업에 부여하는 신뢰의 무게중심 자체가 옮겨갔다는 의미다.
◇ 목표주가 전쟁 ― 삼성 50만원·SK 300만원 시대 오나
증권가의 목표주가 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SK증권 한동희 연구원은 이달 7일 보고서에서 삼성전자 목표주가 50만원, SK하이닉스 300만원을 제시했다. SK하이닉스의 12개월 평균 목표주가는 194만 6077원으로 집계됐고, 일부 증권사는 310만원까지 제시했다. 36명의 애널리스트 중 매도 의견을 낸 곳은 단 한 곳도 없는 '만장일치 매수' 상태다.
대신증권은 SK하이닉스 목표주가를 84만원에서 잇따라 상향했고, 노무라·맥쿼리·KB증권 등 외국계와 국내 대형사 모두 양사 목표주가를 분기마다 갱신하는 모양새다. 단일 종목 레버리지·인버스 ETF가 5월 22일부터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한해 첫 상장될 예정으로, 시가총액·거래량·파생시장 기반 요건을 충족하는 종목이 두 회사뿐인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래에셋증권은 신규 ETF로 보수적 시나리오 1조 7000억원, 적극적 시나리오 5조 3000억원의 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추산했다.
◇ 합산 영업이익 250조 잭팟 ― HBM이 가른 운명
운명을 가른 단 하나의 요인은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와 대신증권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5년 HBM 시장 점유율 61%로 1위를 차지했고, 2026년에도 매출 기준 50%로 선두를 유지할 전망이다. 2026년 SK하이닉스 HBM 매출은 41조 2000억원, 출하량은 192억 기가비트(Gb)로 추산된다.
삼성전자는 마이크론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서며 2026년 HBM 매출 24조원, 점유율 29%까지 회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UBS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Rubin' 플랫폼에 탑재될 HBM4 시장에서도 SK하이닉스가 약 70% 점유율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2026년 HBM4 시장 점유율을 SK하이닉스 54~55%, 삼성전자 28~29%, 마이크론 17~18%로 전망했다.
실적 전망은 더 극적이다. 노무라증권은 2026년 삼성전자 영업이익을 133조 4000억원, SK하이닉스를 99조원으로 제시했다. 맥쿼리는 삼성전자 151조 2000억원, KB증권은 삼성전자 145조원·SK하이닉스 115조원을 전망했다. 양사 합산 영업이익은 200조원에서 최대 25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다.
골드만삭스는 더 공격적이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 전망치를 2026년 355조원, 2027년 438조원, 2028년 495조원으로 잇따라 상향 조정했다.
◇ 1분기에 보여준 체급 ― 삼성 영업익 57조 vs SK 37조
다만 절대 규모에서는 여전히 삼성전자가 앞서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1분기 매출 133조 8734억원, 영업이익 57조 2328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69.2%, 영업이익은 무려 756.1% 증가했다.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부문 영업이익만 53조 7000억원으로 전사 영업이익의 94%를 차지했다.
SK하이닉스도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1분기 매출 52조 5763억원, 영업이익 37조 6103억원, 순이익 40조 3459억원을 기록했다. 매출 규모는 삼성전자의 약 40%, 영업이익 규모는 약 66% 수준이지만, 매출 대비 영업이익률은 SK하이닉스가 71.5%로 삼성전자(42.8%)를 크게 앞섰다.
시장이 SK하이닉스에 더 높은 프리미엄을 주는 핵심 이유다. 삼성전자는 메모리·파운드리·디스플레이·가전·모바일을 모두 다루는 '종합 전자기업'인 반면, SK하이닉스는 메모리에 특화된 '순수 AI 메모리 플레이어'로 평가받는다. AI 슈퍼사이클의 직접 수혜가 SK하이닉스 쪽으로 더 집중되는 구조다.
◇ 자사주 소각 14.6조 vs 12.2조 ― 주주환원 대전
주주환원 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3월 18일 7조 2000억원 규모의 자기주식 매입을 결정한 데 이어 3월 31일 5조 3000억원 규모의 소각을 단행했다. 이사회 결의 전날 종가 기준 14조 6000억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다. 보유 자사주 1억 543만주 중 8700만주(약 16조원어치)를 상반기 중 추가 소각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도 자사주 소각 12조 2000억원과 현금배당 1조 3000억원을 동시에 발표하며 단일 기업 사상 최대 주주환원 패키지를 내놓았다. 양사가 1년 사이 단행하는 자사주 소각만 28조원에 육박한다. 1,456만 개인 투자자 중 가장 많은 보유자를 가진 두 회사가 동시에 '주주 친화 기업'으로 변신한 셈이다.
◇ 변수 ― 삼성 노조 파업, SK 단기 과열
격전 구도에는 변수도 적지 않다. 가장 큰 단기 변수는 삼성전자 노조 파업 리스크다. 노조 참가 예상 인원이 DS 부문 인력의 64%에 달해 사실상 공장 가동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업계는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하루 2만 2000장의 웨이퍼가 폐기되고 1조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JP모건은 임금 인상에 따른 삼성전자 영업이익 영향을 최소 -7%에서 최대 -12%로 추산했다.
SK하이닉스에는 단기 과열 부담이 그림자다. 최근 1개월 78%의 폭등으로 단기 차익실현 매물이 누적된 상태다. BNK투자증권은 SK하이닉스에 대해 투자의견을 '보유'로 낮추며 HBM4 매출 비중 확대 과정에서 수익성이 일시적으로 둔화할 수 있다는 점을 지목했다. HBM4 12단 제품의 수율 안정화도 관전 포인트다.
외국인 매도 흐름도 변수다. 5월 들어 외국인은 코스피에서 약 14조 5000억원을 순매도했는데, 이 중 SK하이닉스 약 6조 4000억원, 삼성전자 약 5조 5000억원으로 양사에 매도가 집중됐다. 다만 시장에서는 "탈한국이 아닌 리밸런싱"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 두 거인이 만드는 코스피 1만 시대
격전의 본질은 단순한 시총 1위 다툼이 아니다. KB증권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합산 영업이익이 2025년 91조원에서 2026년 630조원, 2027년 906조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할 것으로 내다봤다. 양사 합산 시총만 3150조원으로 코스피 전체 시총의 30%를 넘어선다. 사실상 두 회사의 실적과 주가가 코스피 8000 다음 이정표인 '코스피 1만 시대'의 향방을 결정짓는 구도다.
모건스탠리는 코스피 강세 시나리오에서 연말 상단을 1만, 기본 시나리오를 9500으로 제시했고, KB증권은 1만 500이라는 사상 최고 전망치를 내놓았다. 이 전망치의 핵심 변수가 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주가 흐름이다.
대형 외국계 증권사의 한 반도체 수석 애널리스트는 "이번 격전은 1990년대 후반 삼성전자와 LG전자, 2000년대 초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간 시총 다툼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며 "AI 메모리라는 새로운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한국 두 기업이 동시에 글로벌 시총 톱20에 진입하는 구조적 도약 국면"이라고 평가했다.
DS부문의 한 고위 임원은 "삼성전자는 메모리·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를 동시에 보유한 통합 솔루션 기업이고,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특화 챔피언"이라며 "두 회사가 서로 다른 강점으로 글로벌 시장을 양분하는 구도가 형성된 만큼, 시총 1위 자리는 단기적으로 엎치락뒤치락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자본시장연구원의 한 거시분석 전문가는 "30년간 굳어졌던 코스피 시총 1위 자리가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산업 구조 고도화의 상징"이라며 "삼성전자 독주 시대에서 삼성·SK 양강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은 1980년대 미국 IBM 독주가 마이크로소프트·인텔 양강 구도로 전환된 사례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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