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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나다에 비춰 본 한국] 사회는 나에게 3. 핑크 셔츠 한 장

    [캐나다에 비춰 본 한국] 사회는 나에게 3. 핑크 셔츠 한 장

    ◇핑크 셔츠 한 장이 시작된 날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이도, 학교 문을 넘는 순간부터는 어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홀로 선다. 그곳에서 그 아이를 지켜주는 것은 결국 같은 반 친구들의 태도다. 2007년, 캐나다의 한 시골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새로운 학기 첫 날, 9학년 학생 한 명이 분홍색 셔츠를 입고 등교했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했다. 몇몇이 그 아이를 둘러싸고 조롱했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본 12학년 학생 두 명이 그날 밤 결심했다. 다음 날, 학교 근처 상점의 분홍색 티셔츠를 있는 대로 사들여 아침 일찍 학교 정문에서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그날 아침, 학교는 온통 분홍빛이었다. 놀림을 당했던 아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놀린 이들을 향한 비난이나 응징이 아니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누구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의 곁에 조용히 함께 서는 것. 그리고 그 하루가 지금 캐나다 전역이 매년 2월 마지막 수요일에 지키는 '핑크 셔츠 데이'의 시작이었다. ◇ 방관자가 방어자가 되는 순간 캐나다는 '서로 다른 것이 녹아 하나가 되는 사회'보다, '서로 다른 것이 그대로 함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배운다. 미국식 용광로가 아니라 모자이크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나와 다른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핑크 셔츠 데이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진짜 증명한 것은 따로 있다. 괴롭힘이 벌어질 때 주목해야 할 사람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다수'라는 사실이다. 평범한 다수가 침묵하지 않고 피해자 곁에 서는 순간, 가해자는 힘을 잃는다. 가해자가 계속해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주변의 침묵을 동조나 용인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지금 캐나다의 학교들이 왕따 예방 교육에서 가장 공들이는 지점도 여기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이 아니라, 방관자를 방어자로 바꾸는 법을 가르친다. 지금은 정부와 교육청, 대기업과 노동조합까지 이 캠페인에 함께 나서며,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려던 몸짓을 사회 전체가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주고 있다. 이 사회가 안전과 포용을 지키는 방식은 결국 가해자 색출이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우리는 누구를 보고 있는가 한국에서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고정한다. 누가 더 나쁜가, 누가 얼마나 다쳤는가. 처벌 수위는 얼마가 적정한가. 그런데 그 교실에는 언제나 제3의 존재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어쩌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을 아이들이다. 오늘의 피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내일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 역시 다른 어딘가에서는 피해자였을 확률이 높다. 사람을 악인과 선인으로 나누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는 이유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질문은 "누가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일지 모른다. 가해자를 찾아 처벌하는 일은 사후 약방문이지만, 방관자를 방어자로 키워내는 일은 폭력이 애초에 자라지 못하게 하는 면역이다. 침묵을 동조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 침묵 자체다. 2002년, 우리는 거리와 광장에서 함께 응원하며 세계가 놀랄 결속력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러한 결속력이 오직 월드컵 축구 응원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캐나다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면, 통하면 통하는 민족인 우리는 그 시간을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옆 사람의 침묵을 깨는 작은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향한 분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방관자였는지를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누군가 놀림을 당하는 장면을 마주친다면, 우리는 침묵할 것인가, 그 곁에 설 것인가. 김성열 전 대구문화재단 사무처장

    2026-08-14 12:30:00

  •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33>무신불립(無信不立),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33>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언론에 거의 매년 등장하는 단골 문구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불신으로 팽배해 있음을 말해준다. 그 원인은 정치의 저질에 있다. 최근 투표지 부족 사태는 그 진수를 보여준다. 운 좋게 잘 해먹은 저 부정의 카르텔이 제발 백일천하에 다 드러나길 바란다. 온 나라의 믿음을 파탄 내는 원흉이기 때문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은, '없을 무, 믿을 신, 아닐 불, 설 립'으로, "믿음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논어』 「안연」에 나오는 잘 알려진 구절이다. 신(信)의 고자(古字)는 '亻(인)+口(구)'로 된 '㐰(신)'이다. 여기서 '구(口)'는 입의 의미이지만, '언(言)'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속마음을 드러낸 말'을 뜻한다. 같은 글자로는 '언(言)+심(心)'으로 된 '訫(신)'도 있다. 이것은 '신(信)'이나 '신(㐰)'과 마찬가지로, 속마음을 말로 표현한 것이며, 입벌구(입만 벌리면 구라)와는 정반대의 뜻이다. 이같이 '신(信)'은 한 사람의 행위와 말이 '틀림-속임-거짓' 없이 서로 일치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위정자의 말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존경하는 OOO'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는 식의 말 뒤집기는 '언행불일치'를 넘어 '언어적 약속의 파탄'이기에 당연히 금기시된다. 공자에게 제자 자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足食], 군비를 넉넉히 하는 것[足兵],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民信之]이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군대를 버린다[去兵]"라고 하였다, 그러자 자공이 또 물었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를 더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결론을 내린다. "식량을 버린다[去食]. 예로부터 모두에게 죽음이 있다. 하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民無信不立]." 공자의 논지는 국방과 경제를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군대가 강하고 식량이 충분하더라도 지배층이나 정부 관료에 대해 불신이 가득하다면 국정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을뿐더러 끝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백성들은 국정을 맡은 자들의 정신머리를 믿고 따른다. 만일 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백성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 달아나 버리고 만다. 공자가 젊은 날에 만났다는 노자 또한 "통치자에 대해 백성들의 믿음이 부족해지면, 그들이 하는 무슨 일이든 믿지 않게 된다"(信不足, 焉有不信)라고 했다. 아울러 『장자』 「덕충부」에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전한다. "제가 일찍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새끼 돼지들이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금 있다 보니 놀라서 모두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을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기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그 몸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몸을 부리는 것[=정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어미는 '위정자'에, 젖을 빨다가 달아나 버린 새끼 돼지는 '백성'에 대비해볼 수 있다. 어미를 버리고 달아나는 돼지 새끼처럼 정신머리 없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지지 철회는 한 순간이다. 그렇다. 믿음은 만사 만물이 안심하고 관계・소통하는 플랫폼이자 핵심 사회자본이다.

    2026-08-14 12:22:00

  • [소야의 대중가요 문학을 품다]<17> 돌아온 부두의 탄식 '선창'

    [소야의 대중가요 문학을 품다]<17> 돌아온 부두의 탄식 '선창'

    '...,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 오도 못할 우라지오'. 이용악의 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는 일제강점기 이국땅 연해주에 머물러야 했던 실향민의 수난이 그 배경이다. 드나드는 배 한 척 없는 북방의 항구에 서서 어슴푸레 떠오르는 고향으로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라지오(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는 두꺼운 얼음이 쌓여 있어, 가지도 오지도 못한 채 냉혹한 부두를 서성이며 고향을 절절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민중의 비극성이다. 일제강점기 이주민 세대가 겪은 역사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울어본다고 다시 오랴 사나이의 첫순정, 그대와 둘이서 희망에 울던 항구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 1940년대 고운봉의 노래 '선창'은 그리던 항구로 돌아왔건만 쓸쓸한 부두에는 찬비만 내린다고 한다. 정지용 시인이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탄식했던 농촌적 정서를 부두의 노래로 변주한 것처럼 보인다. 돌아온 항구 역시 식민지의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한 노래 속 화자는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비린내 나는 부둣가'는 국권을 빼앗긴 조국의 강산을, '이슬 맺힌 백일홍'은 일제의 신민이 되어버린 조선인을 상징한다. 비내리는 선창가에서 떠나간 연인을 그리는 것은 잃어버린 나라를 떠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시대 정서를 대변한 고운봉의 히트곡 '선창'은 일제강점기 지식인과 학생층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가사의 문학성과 유려한 선율 그리고 짙은 우수를 지닌 가수의 정제된 창법이 인기의 비결이었을 것이다. '선창'은 광복 후의 혼란 속에서도 삶이 고단했던 서민 대중의 애창곡이었다. 고향과 항구를 떠나 머나먼 타관땅을 지향없이 떠돌다가 그리움을 안고 돌아온 선창가에 내리는 찬비는 망국민과 실향민의 눈물이었다.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노래도 수난을 겪었다.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김해송이 월북 또는 납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사가와 작곡가의 이름을 바꿔서 가요의 명맥을 유지하는 질곡을 거쳤다. 역사의 격랑은 노래조차 피해가지 않았다.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에도 '선창가 고동소리'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항구나 부두를 배경으로 한 노랫말이 많은 것은, 만남보다는 이별의 이미지가 강했던 식민지 시절 선창의 숙명적 정서 때문일 것이다. 서사적인 무게감을 내려놓은 서정적 공간으로의 선창(船艙)은 더 그랬다. 부두에서의 사랑이란 애초에 부박(浮薄)한 것이었다. 부평초 같은 사람들의 뜨내기 사랑이 많았다. 사랑 만큼 고귀한 것도 없지만, 사랑 만큼 진부한 것도 없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지만 하루아침에 식어 버리는 게 또한 남녀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대중가요 '선창'의 중후한 생명력은 역사적인 울림과 민족적 정한에서 비롯된다. '그대와 둘이서 희망에 울던 항구'는 단순한 만남과 이별의 공간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나그네적 정서와 유랑민의 탄식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평론가

    2026-08-14 12:20:00

  • [매일신문 전국 어린이  사진공모전 70년]<1984년 30회>노력상 빈일열 작 '술래야 잡아라'

    [매일신문 전국 어린이 사진공모전 70년]<1984년 30회>노력상 빈일열 작 '술래야 잡아라'

    1984년 이른 봄. 경북 달성군 화원읍 낙동강변의 넓게 펼쳐진 하얀 백사장은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다.학교가 쉬는 일요일이면 동네 아이들은 하나둘 강변으로 모여들었다. 태훈이와 영수, 영숙이, 미숙이,명자…. 이름만 불러도 금세 어디선가 "왔나!" 하며 뛰어나오던 친구들이었다. "하나, 둘, 셋! 간다!" 눈을 하얀 수건으로 질끈 동여맨 술래인 영수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친구들은 숨을 죽인 채 발끝으로 모래를 밟다가도, 술래가 엉뚱한 방향으로 손을 뻗는 순간 "여기다!" 하며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영숙아! 뒤로 가! 뒤로!" 태훈이가 소리치자 영숙은 맨발로 모래를 박차며 달아난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보드라운 백사장은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금세 뒤덮인다. 술래는 웃음소리만 믿고 냅다 달려들지만 허공만 붙잡는다. "아이고, 거기 아니야!" 영숙이는 술래의 바로 옆을 살금살금 지나가더니 손바닥으로 등을 '툭' 치고는 재빨리 달아난다. "잡아봐라!" 그 한마디에 술래는 방향을 홱 틀어 전력질주한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고,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이리저리 흩어진다. 미숙이는 웃음이 터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허리를 숙인다. 그 순간 술래가 손을 뻗어 미숙이의 멜빵치마 끝자락을 덥석 움켜잡는다. "잡았다!" "아이고! 놓아라! 반칙이다!" 미숙이는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하지만 술래인 영수는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태훈이와 영숙이는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참지 못한다. "술래 바뀌었다! 이번엔 미숙이다!" 미숙이는 눈을 가리고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숨는다!" 그 사이 아이들은 버드나무 뒤로, 강둑 아래로, 모래 언덕 너머로 재빨리 몸을 숨긴다. 하지만 숨는 것도 잠시, 웃음소리를 참지 못해 금세 들통난다.아이들의 발길이 지나갈 때마다 하얀 모래가 안개처럼 흩날리고, "잡아라!", "도망가!", "여기 있다!" 하는 외침이 강변에 메아리친다.신발 속에도 모래가 가득 들어가고,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렸지만 누구 하나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술래잡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웃음이 봄바람을 타고 낙동강을 건너던 축제였고,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운동장이었으며 강물은 아이들에겐 수영장이었으며, 버드나무 그늘은 쉼터였다. 세월은 흘러 하얀 백사장도 사라졌다. 빈일열 작 '술래야 잡아라' 작품 사진 한 장은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움직인다.1984년 낙동강변의 하얀 모래밭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가장 눈부신 유년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2026-08-14 11:50:00

  • [남정욱 교수의 별별시선] 공시지가는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당신이 종합부동산세를 내는 그날까지!

    [남정욱 교수의 별별시선] 공시지가는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당신이 종합부동산세를 내는 그날까지!

    부동산 정책을 놓고 흔히 정부가 시장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다. 정부는 시장이 아니라 국민과 싸우고 있다. 아니다. 이 표현도 적당치 않다. 싸움은 몰리는 쪽도 어쩌다가 한 방은 날릴 때나 쓰는 말이다. 현재 상황은 일방적 구타로, 이 정부는 국민을 패고 억누르고 말려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실질적인 경제 테러에 더해 공포와 두려움 같은 심리적 불안까지 가하면서 이를 '정책'이라는 말하는데 모쪼록 단어 교체를 권한다. 댁들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군사 작전'이다. 그것도 시시한 침투 작전 같은 게 아니라 적을 섬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국민 고강도 군사 작전이다. 지난 3일 발표된 '2026년 세제 개편안'은 징벌을 넘어 단죄 수준이다. 개편안을 두고 누구는 '세금을 팍 올릴 테니 능력 없으면 집을 파세요'라고 요약했다. 그러나 글에는 뉘앙스와 톤이 빠져있다. 정부의 말투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이다. 너는 죄인이니 벗어나려면 하시라도 빨리 집을 팔고, 혹시 팔기 싫으면 금전으로 죗값을 혹독하게 치루라는 게 이번 개편안의 메시지인 것이다. 2026년 대한민국은 집 가진 게 죄인 나라다. ◇살라미 전술로 저항은 줄이고 대상은 늘리고 빤한, 다들 아는 얘기는 생략한다. 그러니까 강남에 수십 년 거주한 소득 없는 은퇴자의 억울함 같은 건 굳이 말 안 하겠다는 얘기다. 그리고 종합부동산세 하나만 다룬다. 이게 핵심이라서 그렇다. 개편안 보고 예고편에 비하면 별 거 없네,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나쁘게 말해 오늘만 사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종합부동산세 대상이 아니네, 하면서 안도하시지만 정부는 바보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교활하기 짝이 없는 강도, 천한 말로 '삥 뜯기의 달인'이다. 한꺼번에 백만 명을 적으로 돌리는 멍청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해가 바뀔 때마다 야금야금 타격 대상을 넓혀서 저항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뒤 순서대로 차례로 뽀갠다(조진다,로 쓰고 싶지만 참는다). 뭔 말이냐. 애초 생각한 타깃이 백만 명이면 첫해에 십만 명, 2년 차에 삼십만 명, 3년 차에 육십만 명 같은 식으로 조금씩 종합부동산세 대상을 늘려간다는 얘기다. 분노하는 첫해 십만 명을 보면서 구십만 명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2년 차에 삼십만 명분(分)의 분노가 더해지지만 충격이 덜하다. 벌써 십만 명이 내고 있잖아? 하면서 자위한다. 이미 그 세금에 정서적으로 익숙해진 것이다. 3년 차가 되면 기(旣) 납부자 사십만 명은 오히려 좋아한다. 육십만 명이 새로 대열에 합류하게 되니 왠지 쌤통이고 나만 분하고 억울한 게 없어진 것 같아 행복하다. 정부가 국민을 괜히 개돼지로 보는 게 아니다. ◇국민을 세금의 대상으로 사육하는 나라 아직 무서운 게 안 실감나는 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쓴다. 정부가 타깃을 늘이는 수법은 '공시지가' 끌어올리기다. 올해는 20억 원 이상이 종합부동산세 대상이다. 가까스로 면했지만 턱에 차 있다는 숫자가 상당하다. 내년 공시지가는 어떻게 될까. 상향 확률 100%다. 왜냐. 정부 정책이 오로지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올해 재산세만 내고 안도의 한숨 내쉰 분들, 내년에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혹시 시간이 되시면 부동산 공시가격 사이트에 들어가 현재 거주하시는 집의 공시지가가 어떤 곡선으로 올랐는지 확인해 보시라. 뒷목 잡으실 분들 의외로 많을 것이다. 세금에 질려 팔고 싶은 분들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때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살벌하게 개편된 양도세가 칼을 갈고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공부하셔야 한다. 공부 마치면 정부가 선물하는 공포와 두려움 같은 심리적 불안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다. ◇통일만 안 됐을 뿐 적화는 이미 끝났다는 농담이 하나도 안 웃기는 이유 사지도 팔지도 못하게 하면서 세금만 걷는 이 정부를 보면서 북한의 토지개혁을 떠올리는 분들 많으실 거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는데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만 줬다. 잠시는 공짜 땅이 생겨서 좋았지만 알고 보니 매매나 양도가 불가인 토지에서 인민은 정부가 주인인 소작농 노릇을 하는 꼴이 된 셈이다. 가지고 있자니 치솟는 종합부동산세가, 팔자니 거의 몸만 나가라는 식의 거액의 양도세가 기다리고 있는 나라나 북쪽 그 나라나 대체 뭐가 다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2026-08-14 11:30:00

  • [김석모의 모두를 위한 미술사] 백남준, 데이터 고속도로를 예언한 예술가

    [김석모의 모두를 위한 미술사] 백남준, 데이터 고속도로를 예언한 예술가

    예술가는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위대한 예술가는 그 누구보다 먼저 다가올 시대를 직관한다. 백남준(1932-2006)은 바로 그런 예술가였다. 그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한 데에만 있지 않다. 그는 오늘날의 초고속 정보통신망과 네트워크 사회를 누구보다 먼저 예견하고, 이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제시한 인물이었다. 1974년 백남준은 록펠러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전자초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개인용 컴퓨터는 대중화되지 않았고, 월드와이드웹(WWW)은 등장하기 한참 전이었다. 인터넷의 전신인 아르파넷(ARPANET) 등은 군사와 연구기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기술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자적으로 연결된 사회'는 현실보다 공상과학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백남준은 전혀 다른 미래를 바라보았다. 당대 물리학자 및 연구원들과 폭넓게 교류하던 그는 기술이 가져올 문명과 문화의 패러다임 전환을 직관적으로 간파했다. 광섬유와 위성 통신, 레이저 기반의 정보 전송 기술이 결합되어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전자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이러한 전자초고속도로의 건설은 20세기의 고속도로 건설이나 달 착륙 계획에 버금가는 거대한 사회적, 국가적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통찰은 1990년대 미국 정부가 추진한 '정보 초고속도로' 구상보다 약 20년 앞선 것이었다. 오늘날 초고속 인터넷과 글로벌 데이터 네트워크가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통찰은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오늘날 우리는 광섬유 인터넷을 통해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주고받고,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영상을 시청하며, 화상회의를 통해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협업한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영상과 음악을 즉시 전달하고, SNS는 수십억 명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한다. 정보와 영상, 문화가 국경을 넘어 실시간으로 이동하는 오늘의 모습은 백남준이 반세기 전에 그려낸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 역시 이러한 네트워크 위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미디어로 자리 잡으며 그의 비전을 한층 확장하고 있다. 백남준은 이러한 미래를 글로만 남기지 않고 자신의 예술 작품으로 구현했다. 1995년 제작한 《전자초고속도로》는 미국 지도를 형형색색의 네온과 수백 대의 텔레비전 모니터로 구성한 대형 설치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미국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더 이상 철도나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전자 신호와 영상, 그리고 정보의 흐름이다. 국토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데이터와 이미지가 순환하는 네트워크 공간으로 재해석된다. 백남준은 산업사회의 공간 개념이 정보사회의 네트워크 개념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입증해 보였다. 백남준에게 텔레비전과 미디어는 단순한 영상 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언어였으며,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새로운 소통의 매체였다. 산업혁명 시대의 철도와 고속도로가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켰다면, 정보화 시대의 전자초고속도로는 이미지와 데이터, 지식과 문화를 이동시키는 새로운 문명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2026-08-14 11:30:00

  • [임무출의 낱말 맞히기]<제33회>

    [임무출의 낱말 맞히기]<제33회>

    〈strong〉◆가로 풀이〈/strong〉 1. 갓 쓰고 ○○○ 타기: 전혀 격에 어울리지 아니하게 차려입은 것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3. ○○○○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5. ○○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6. 넘어지기 전에 ○○○ 짚다: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화를 입기 전에 대비함. 8. 궁둥이에서 ○○ 소리가 난다: 아주 바쁘게 싸대어 조금도 앉아 있을 겨를이 없음. 10. 나이 많은 말이 콩 ○○○○: 어떤 것을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함. 12. 고양이 ○ ○○○ 맡은 격: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매우 힘에 겨운 일을 맡음. 14. 공에도 ○가 있다: 공적인 일에도 개인의 사정을 보아줄 때가 있다. 15. ○ ○○이 남의 염병보다 더하다. 17. ○ 막고 방울 도둑질한다: 얕은 수로 남을 속이려 하나 거기에 속을 사람이 없음. 19. 과부 ○○ 세 번, 처녀 ○○ 세 번 하면 죽어 좋은 곳으로 간다. 21. ○○ ○○ 등 맞춘 것 같다.서로 잘 맞지 않고 대립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 24. ○ ○○○ 귀신 없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글을 배워서 자신의 앞길을 닦아야 한다. 〈strong〉◆세로 풀이〈/strong〉 1. 도둑의 때는 벗어도 ○○의 때는 못 벗는다. 자식의 잘못을 부모가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 2. 길 닦아 놓으니까 ○○가 먼저 지나간다. 3. 단단하기만 하면 벽에 물이 ○○○. 4. ○○○ 땅 마련하듯: 무엇을 하기는 하나 아무 실속 없이 헛된 일만 하는 모양. 5. 계집의 ○○ ○○ 오뉴월에 서리 친다. 7. 말로는 ○○ ○이 없다: 책임이 뒤따르지 아니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다 할 수 있다. 9. 검은 머리 ○○○ 되도록: 오래 살아 아주 늙을 때까지를 이르는 말. 11. ○○는 ○○끼리 노루는 노루끼리. 12. 단김에 ○○ 빼듯. 13. ○○ ○의 시주 바가지 같다: 무엇이 가득 담긴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6. 내 마신 ○○○ 상: 잔뜩 찌푸려서 추하게 생긴 얼굴. 18. 고슴도치도 살 ○○가 있다. 20. 꿩 잃고 ○ ○○ 셈: 하려던 일은 못 하고 오히려 제 것만 손해 보았다는 말. 21. 기 들고 ○○ 불고 북 친다: 혼자서 다 해내지도 못할 것을 이것저것 건드림. 22. ○○ 바라서 이마가 벗어졌다: 이마가 벗어진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 23. 남의 ○○ 공경이 제 ○○ 공경이다: 남의 부모도 잘 위하고 존경하라는 말. 〈strong〉◆31회 정답〈/strong〉 〈응모요령〉 ▶낱말맞히기 정답 공모(이름·휴대폰 번호·주소를 반드시 기재) ①우편엽서 ②이메일: mincho@imaeil.com ▶당첨자는 지면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 ▶보내실 곳: 대구시 중구 서성로 20 매일신문 주간본부(우편번호 41933) ▶당첨자는 본지 지면 발표

    2026-08-14 10:30:00

  • [금주의 공연,전시]

    [금주의 공연,전시]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 조수미 세계 무대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 'Continuum' 8월 22일 오후 5시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입장료 5만원~10만원 ​대한민국 대표 소프라노 조수미의 세계 무대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다. 지난 5월 발매된 40주년 기념 앨범 '컨티넘(Continuum)'과 연계한 세계 투어의 하나로, 오페라 아리아와 클래식 레퍼토리, 크로스오버 곡을 아우르며 조수미의 지난 음악 여정과 현재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무대다. 조수미의 전속 지휘자로 활동 중인 최영선의 지휘로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며, 테너 서영택과 트럼페터 알렉스 볼코프가 함께한다. ◆봉산문화회관 기획 봉산공연창작소 -극단 구리거울 주크박스 뮤지컬 〈못된 껄, 못된 뽀이, 못된 슈즈〉 ​8월 21일 오후 7시30분, 8월 22일 오후 3시 봉산문화회관 스페이스라온 입장료 무료 ​봉산문화회관 창작 공연 공모 사업 '봉산공연창작소'에 선정된 공연이다. 극단 구리거울이 제작한 주크박스 뮤지컬로 쇼케이스 형태로 선보인다. 극단 대표 김미정이 극작 및 연출했다. 전국에 남은 유일한 수제화 거리인 중구 향촌동을 배경으로 수제화의 역사와 장인정신을 들여다보는 타임슬립 추리극이다. 박예진이 안무를 맡고 배우 이경자, 이광희, 김명일, 이혜정, 박나연, 류규랑이 출연한다. ◆대구현대미술가협회 기획展 'CICADA: 여름의소리' ​8월 17일~8월 22일 SPACE129 새로운 예술교육의 모델로서 대구현대미술가협회가 청년 작가에게 전시 기획을 맡겨 선보이는 기획전이다. 2025년 대구현대미술가협회 예예프로젝트(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 청년 작가 1기 출신인 류채은 작가가 이번 전시의 기획을 맡았다. 류채은· 박성은·박지혜·배지나·하수민 작가가 참여한다. '시카다(CICADA)'는 저마다의 회화적 언어가 처음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을 매미의 울음에 빗대 표현한 것으로, 신진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과 가능성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대구구상작가회 정기展 및 우수작가 선정 초대 개인展 ​8월 25일~8월 30일 아양아트센터 아양갤러리 42년 역사를 이어온 대구구상작가회의 정기전이다. 1985년 창립전 이후 54번째를 맞는 이번 전시에서는 우수작가 선정 초대전(이준절·이종갑)과 함께 '무조건 소품 80만 원 이하' 특별전을 마련해 지역 구상미술의 다양한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만나볼 수 있다.

    2026-08-14 10:30:00

  • [쉽고 재미있는 사투리]<3>여름밤 수놓던 '개똥불', 정말 개똥에서 나온 이름일까

    [쉽고 재미있는 사투리]<3>여름밤 수놓던 '개똥불', 정말 개똥에서 나온 이름일까

    여름밤 시골 들판을 수놓던 반딧불이는 이제 쉽게 만날 수 없는 곤충이 됐다. 과거에는 해가 지면 논두렁과 개울가를 떠다니는 반딧불이의 불빛이 여름밤의 정취를 더했지만, 농약 사용과 서식지 감소로 청정지역이 아니면 좀처럼 모습을 보기 어렵다.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에게 반딧불이는 특별한 추억이다. 그렇다면 시골에서 흔히 부르던 '개똥불' 또는 '개똥벌레'의 허리에서 반짝이는 반딧불(螢火)은 개똥과 관련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반딧불의 어원은 명사 반(光)과 명사 되(虫,벌레),명사 블(火불·빛)'이 결합해 '빛을 내는 벌레'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반되블은 1465년 원각경언해에 나타난다.반되블 〉 반ᄃᆡ블 〉반듸불 〉 반딧불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표준어 '반딧불'이 됐다. 여기서 '불'은 전깃불의 '불'처럼 불꽃이 아니라 '빛'을 의미한다. 반면 표준어 반딧불에 해당하는 전국 방언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인 말은 '개똥불'이다. 제주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사용된 이 말은 '개똥'과 '불'이 결합한 형태여서 얼핏 개똥과 관계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반딧불이'는 반딧불이과의 딱정벌레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비슷한 말로 개똥벌레라고 한다. 하지만 생태학적으로도, 어원적으로도 개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면 왜 반딧불을 시골 사람들은 '개똥불'이라고 했을까? 대표적인 설은 여름철이면 두엄 주변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낮 동안 풀숲에 숨어 있던 반딧불이가 밤이 되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두엄 주변의 풀에서 일제히 꽁무니에 빛을 내뿜고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때, 개똥을 모아 놓은 두엄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고 개똥벌레,개똥불이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반딧불이가 여름밤에 사방천지에서 많이 날아오르니, 사방에 흔한 것이 개똥이어서 개똥벌레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설이다. '반딧불이'는 개똥벌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나, 개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반딧불이 애벌레는 청정지역에서 다슬기나 달팽이를 먹고 성장한다. 반딧불을 허리에 달고 나는 성충이 된 뒤에도 개똥을 먹지 않는다. 결국 '개똥벌레'라는 이름은 생활환경에서 비롯된 민간의 명명일 뿐, 생태적 특성과는 무관하다. 반딧불이의 빛은 사랑을 위한 신호이기도 하다. 수컷은 허리 부분에 두 개의 빛을 허리에 달고, 암컷은 한 개의 빛을 허리에 단다. 여름밤 수컷이 황홀한 빛을 깜빡이며 암컷에게 구애하는 모습은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짝짓기 의식이다. 동물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수컷 매미는 요란한 울음소리로 암컷을 부르고, 반딧불이는 황홀한 불빛으로 사랑을 전한다. 식물은 향기와 화려한 꽃, 풍부한 꿀로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결국 소리와 빛, 향기와 색깔은 모두 종족 번식을 위한 자연의 언어인 셈이다. '개똥불'은 지역마다 다양한 방언으로 변화했다. 개똥불에서 더 변화한 개띠불은 함북, 평북, 평남 지역에 보이는데, '개똥불〉깨또불〉개뚜불〉개뜨불〉개띠불'로 변화였다. 개띠불에서 더 변화하면 '개찌불(함남, 강원)〉개치불(함남)〉깨치불〉까치불(함북, 함남, 평북)'로 변화한다. 또 한편으론 개띠불에서 다른 방향으로 더 변화하면 '깨디불(평북, 평남)〉깨리불〉까리불(황해, 강원)〉꽈리불(황해)'로 변한다. 개똥불 계 어휘는 여름밤에 활동하는 개똥벌레처럼 많다. 강원·경기·충청·영남·호남 지역에서는 반디뿔이 널리 쓰였으며, 반지뿔, ​반득불 등으로 변화한 지역도 확인된다.제주도에서는 전혀 다른 계통의 방언인 불란디 어휘가 보인다. 이는 '불이 많은 벌레'라는 뜻으로, 블한되 〉 불한데〉불한디〉 불안디〉 불란디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가 됐다. 반딧불이는 이제 여름밤의 낭만을 상징하는 곤충이 됐다. 하지만 '개똥불'이라는 소박한 이름 속에는 선조들의 생활환경과 언어 변화의 흔적,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민중의 시선이 함께 담겨 있다. 한국방언연구소장 신승원 sinswon5@hanmail.net

    2026-08-07 12:22:00

  • [임무상의 1957 그림일기]8월 1일 목요일/

    [임무상의 1957 그림일기]8월 1일 목요일/

    ◆8월 1일 목요일 비/장마오늘부터 이달의 목표(⽬標)를 깨트리지 않기 위하여 오늘부터 진행(進⾏)하였다. 더구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늘은 집안에서 공부하게 될 처지가 되었다. 어저께 온 비에 앞 냇가에 물이 대단히 많이 불었다. 이번 비에 많은 인명과 손해와 재산의 파괴 등이 많은 모양이다. 어떤 곳에서 사람이 네 사람 죽었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논을 많이 묻히는 등 일이 생긴 모양이다. 왠 장마는 이렇게 계속(繼續)되는지, 아마도 사람들을 못 살게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는데 처음에는 힘 나게 그렸으나 나중에는 매우 지루하며 고달팠다. 오늘은 3장 그렸는데 그까짓 것 그리는 데 지루하게 느꼈던 나는 아마도 이제는 그리지 못 할 것 같았다. ◆8월 8일 목요일 맑음/김매기오늘도 날씨가 좋으니 들에 가 일하게 되었다. 어제같이 오후(午後)에 비가 올까 봐 아침 일찍 나가 김매기 시작 하였다. 오늘은 조(서숙) 밭은 완전히 마쳤다. 벌써 해는 넘어가고 찬 이슬이 내리는 으슥한 어둠 살이 끼었다. 나는 조금만치 나무를 하고서 집으로 왔다. 오늘은 계속하여 햇빛 비추었기 때문에 넓은 밭을 완전(完全)히 깨끗하게 마쳤다. 이러한 조 밭을 매지 않은 때를 겪어 온 것을 생각하면 아픈 것을 해 보면 꾸준한 힘을 기르는 장소(場所)라는 것 알았다. 어떤 땐가 하면 햇빛이 내려 쬐여 땀은 비 오는 듯한데 꾸준히 해나가는 것, 또 허리가 아플때 혹은 고단할 때 꾹 참고 나가는 것 등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이 장소에서 그러한 마음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2026-08-07 12:18:00

  • [이야기로 만나는 약선(藥膳)]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이야기로 만나는 약선(藥膳)]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토마토에 설탕을 듬뿍 뿌려서 먹었다. 토마토 맛이 아니라 설탕 맛이었다. 사과처럼 새콤달콤하거나 바나나처럼 달큼한 것도 아닌, 도대체 왜 이런 열매를 먹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토마토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식처럼 매번 식탁에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로 이사 온 후부터 해마다 토마토 모종 대여섯 포기를 심었다. 열매가 익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나눔을 하고도 철철 넘쳐났다. 식탁에는 샐러드, 볶음, 주스, 페스토 등 토마토 음식이 빠지지 않는다. 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1893년 미국에서 토마토를 두고 법정 소송이 벌어졌다. 수입업자들은 과일에 관세가 붙지 않으므로 토마토를 과일이라고 하였고, 미국 법원은 토마토는 주로 요리의 재료로 사용되니 채소라는 판결을 내렸다. 토마토를 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수박이나 참외와 딸기 같은 열매(과일) 부류이며, 반면 당분이 적고 요리의 부재료나 식사와 함께 섭취되므로 채소(과채류)로 분류된다는 거였다. 그 정체성이 참으로 모호하다. 토마토 이름의 유래는 아메리카 아스텍 원주민의 '토마틀(Tomatl)'에서 시작되었다. '부풀어 오른 과일', '통통하게 살진 과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토마토를 들여오면서 원주민 발음인 '토마틀'을 스페인어 발음인 '토마테(Tomate)'로 부르기 시작했고, 영어권으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의 '토마토(Tomato)'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토마토가 들어온 시기는 꽤 오래되었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토마토를 '남쪽 오랑캐의 땅에서 건너온 감'이라고 해서 '남만시南蠻柹'라고 불렀으며, 이후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감'이라는 '당시唐柿'로도 기록되어 있다. 토마토는 문헌에 이름이 오를 정도로 유입 자체는 빨랐으나, 감을 닮은 생김새의 관상용 화초로 여겨졌을 뿐 요리 재료로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토마토를 식문화의 중심에 둔 국가들은 토마토를 단순한 채소 그 이상으로 본다. 토마토는 감칠맛의 원천으로 파스타 소스, 피자, 각종 스튜와 수프의 기본 베이스가 되는 '지중해식 삶의 방식(Lifestyle)'이며 '문화적 정체성'인 것이다. 18세기 이탈리아 하층민들은 저렴한 채소인 토마토를 빵 위에 얹어 먹기 시작했다. 국왕과 왕비는 나폴리를 방문하면서 서민들의 음식을 맛보고 싶어 했다. 나폴리의 피자 장인이었던 라파엘레 에스포지토(Raffaele Esposito)는 이탈리아 국기의 색깔을 상징하는 재료인 붉은색 토마토, 하얀색 모차렐라 치즈, 초록색 바질을 얹은 피자를 대접했다. 왕비는 이 맛에 매료되었고, 이 피자는 왕비의 이름을 딴 '마르게리타 피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토마토 요리는 단숨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식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토마토의 본초명은 '번가(番茄)'이다. 약선 관점으로 성질은 평(平)하고, 맛은 약간 달며 신맛을 가지고 있어 오장육부의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을 준다.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다스리고, 열을 내리며 혈압을 안정시킨다. 토마토의 지용성 항산화 성분인 리코펜(Lycopene)은 기름과 함께 섭취 시 흡수율을 높여준다. 오늘도 토마토는 식탁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어린 날의 설탕 뿌린 토마토가 아니라 화분에서 키운 바질을 넣고 올리브 기름을 듬뿍 뿌린다. 꿀과 약간의 소금을 넣어서 만든 토마토 주스를 마신다. 노정희 대구한의대 푸드케어약선학과 외래교수

    2026-08-07 12:00:00

  • [문학을 품은 영화] 트로이… 신화를 넘어 인간을 묻다

    [문학을 품은 영화] 트로이… 신화를 넘어 인간을 묻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인간 욕망과 비극을 담아낸 거대한 문학적 원형이다. 영화감독 볼프강 페터젠의 2004년작 〈트로이〉는 이 위대한 고전을 현대적 영상 언어로 재해석한 대작이다. 영화로 재탄생한 〈트로이〉는 신화적 요소를 대폭 축소하고 인간들의 갈등과 정념만을 가득 채워서 세속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서사시가 지닌 3막 구조의 골격과 비극성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원작 〈일리아스〉는 올림포스 신들의 개입이 서사의 핵심 동력이다. 아폴론이 아카이아 진영에 역병을 내리고, 아프로디테가 결투 중 패배 위기에 처한 파리스를 안개로 감싸 구해내며, 아테나와 제우스는 인간의 운명을 조율한다. 반면 영화 〈트로이〉는 신들의 존재와 초자연적 마법을 전면 배제하고 철저히 현실적인 인간 간의 전쟁과 정치적 갈등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아킬레우스 역시 스틱스 강에 담가져 불사신이 된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압도적인 무예를 가진 인간 전사로 묘사된다. 이러한 동기의 변화는 아킬레우스의 캐릭터 구축에서 미묘한 균열을 낳기도 한다. 원작에서 아킬레우스가 출전을 거부한 이유는 아가멤논에게 공적으로 명예를 실추당한 것에 대한 깊은 분노와 오만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는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갈등 때문에 막사에서 투정을 부리듯 출전을 거부하는 모습은, 인물의 개연성을 다소 약화시키고 어린애 같은 불평으로 보이게 만드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신들을 배제하고 현실적 영웅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원작이 가진 비극적 깊이가 일부 휘발된 점은 분명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킬레우스의 내면적 변화를 이끄는 브리세이스와의 로맨스는 영화적 재미를 제공하지만,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인간 존재의 한계를 자각하는 고전적 비극의 깊이를 온전히 담아내기엔 다소 통속적인 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원작의 정수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대목은 3막의 클라이맥스인 프리아모스 왕과 아킬레우스의 면담 장면이다. 아들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적진의 막사로 홀로 찾아와 아킬레우스의 손에 입을 맞추는 프리아모스 왕의 겸손함과 비통함은, 오직 불멸의 이름과 영광만을 추구하던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 순간 아킬레우스는 승리의 도취나 개인적 영광을 넘어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전쟁이 가져오는 비극적 실상을 깨닫는다. 원작과 영화 모두에서 이 장면은 단순한 영웅주의의 차원을 넘어선다.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적들이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상호 공감과 자각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숭고한 인간성 회복의 순간을 선사한다. 위대한 서사는 단순한 유흥을 넘어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이정표를 제공한다. 고대 청동기 시대의 그리스인들이 〈일리아스〉를 통해 사적 이기심을 넘어선 공동체적 명예와 겸손을 배웠다면, 영화 〈트로이〉는 "당신은 인생에서 어떤 가치를 섬기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권력, 맹목적 사랑, 사적 영광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파멸과 비극을 부른다. 반면 헥토르가 보여준 책임감, 프리아모스가 보여준 용기와 겸손,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평화와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더 높은 가치임을 영화와 원작은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2026-08-07 11:53:00

  • [이정식의 시대의 창]폭염 속 이동노동, 이제 '사회적 위험 관리'로 전환할 때

    [이정식의 시대의 창]폭염 속 이동노동, 이제 '사회적 위험 관리'로 전환할 때

    지난 7월 30일,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쿨한나눔사업' 전달식에는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와 (사)옳음, 고용노동부 등이 함께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폭염 속에서도 많은 배달 라이더들이 현장을 찾았다. 그 모습은 기후위기 시대 이동노동이 마주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폭염이 시작되면 대부분은 실내를 찾지만, 누군가는 가장 뜨거운 시간에도 거리로 나가야만 오늘의 수입을 얻는다. 배달 라이더, 대리운전 기사, 퀵서비스 기사, 택배기사, 화물차주 등 고정된 사업장없이 도시를 오가는 '이동노동자'들이 이 위험의 한복판에 서 있다. 플랫폼 경제와 비대면 소비가 일상이 되면서 이들은 도시의 '라스트 마일'을 책임지는 필수 노동자가 됐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만큼의 보호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동노동자의 가혹한 노동조건은 이미 여러 조사에서 경고음을 울린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전업 대리운전 노동자는 하루 평균 10시간을 일하며 6.6km를 걸어서 이동하고, 10명 중 7명이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한다. 배달노동자의 96.4%는 "쉼터가 필요하다"고 답한다. 콜 단위로 소득이 결정되는 구조에서는 쉬는 시간 자체가 곧 소득 손실이기 때문이다. 노무제공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대한 산재보험 적용은 확대되고 있지만, 최저임금이나 유급휴가 같은 기초 안전망에서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이 사각지대를 가장 가혹하게 드러내는 것이 폭염이다. 최근 5년 사이 온열질환 산재 승인 건수는 2020년 13건에서 2025년 77건으로 6배 가까이 급증했다. 특히 온열질환자의 80% 이상이 실외에서 발생한다는 점은, 실외 이동노동자가 기후 재난의 가장 취약한 최전선에 노출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정부가 폭염특보 대응 수위를 끌어올리고, 서울시가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를 여름까지 확대 운영하는 것도 폭염이 더 이상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편이 아니라 사회가 관리해야 할 구조적 위험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새벽부터 심야까지 이어지는 이들의 노동 동선을 고려하면, 쉼터의 운영시간과 접근성은 더 촘촘히 보완돼야 한다. 문제는 실효성이다.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폭염 시 휴식 제공 가이드라인이 명시돼 있지만, 가장 위험한 최고 단계에서도 작업중지는 여전히 '권고'에 머문다. 건당 수수료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현실에서 "쉬라"는 권고는 "소득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작업중지권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산재·고용보험 기금의 유연한 활용이나 플랫폼 기업의 안전분담금 등을 통한 '기후위기형 최소 소득 보전 장치'가 반드시 결합돼야 하는 것이다. 폭염 속 작업중지와 소득 보전이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다"거나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준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위험과 비용을 줄이는 투자다. 산재와 응급 이송, 그로 인한 인력 손실은 결국 건강보험 재정과 플랫폼 생태계 전체의 비용 증가로 돌아온다. 사고 후 사후 처리에 막대한 비용을 치르는 것보다, 적정한 휴식과 안전조치로 사전에 예방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 다만 비용 부담의 사회적 분담방식과 소비자 가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균형있는 논의 역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는 이미 폭염을 노동권과 사회안전망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스페인은 2023년 법을 개정해 폭염 주황색·적색경보 발령 시, 사업주가 작업시간을 조정하는 등 필요한 보호조치를 취하도록 의무화했다. 권고가 아닌 법적 의무다. 나아가 '라이더법'을 제정해 플랫폼 노동자의 고용관계 추정과 알고리즘 투명성까지 법제화하며 기후위기 대응과 노동권 보장을 함께 설계하고 있다. 이탈리아 역시 일부 지방정부가 한낮 배달을 제한하자 일부 배달노동자 단체는 작업중지에 따른 소득 보전과 사회안전망 강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과 노동법 체계 개편이 결합되는 국제적 흐름을 보여준다. 그간 쉼터 확충과 산재보험 사각지대 해소에 공을 들여왔으나, 급변하는 기후위기 앞에서는 현행 권고 중심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제는 산재 적용과 쉼터 중심의 '1세대 보호'를 넘어, 기후 적응과 소득 보전을 결합한 '2세대 사회안전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다. 따라서 당사자들의 자조적 노력이나 쉼터 확충을 넘어, 실효성 있는 종합적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작업중지의 실질화, 소득 보전, 적정 수수료와 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이 모든 쟁점을 노동자·소비자·기업·정부가 함께하는 '사회적 대화'의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 여기서 기후위기 대응 기준과 비용분담 원칙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과거 사회적 대화의 공과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 내실있는 사회적 대화야말로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 가능한 도시 생태계와 물류 인프라를 유지하는 가장 스마트한 위험 관리 전략이다. 폭염은 자연이 만들지만, 그 피해의 크기는 결국 사회가 결정한다.

    2026-08-07 11:50:00

  •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32>상전벽해(桑田碧海),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32>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

    "中 자동차・로봇 '상전벽해', 서울 금천·구로·영등포, '상전벽해'…". 격동의 시대다. 인공지능(AI) 분야, 그리고 발 빠른 도시의 변모와 관련해 요즘 '상전벽해'가 자주 거론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뽕나무 상, 밭 전, 푸를 벽, 바다 해"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을 비유하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 잘 쓰는 사자성어이다. 이 말을 흔히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갈홍(葛洪)이 썼다는 『신선전(神仙傳)』권3 「왕원(王遠)」편의 마고(麻姑)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하나, 틀리다. 어쨌든 『신선전』에는 90명 이상의 신선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마고는 그중의 하나다. 즉,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 신선 왕원(王遠)이 도교에 심취해 있던 채경(蔡經)의 집에 강림해 선녀 마고를 불렀다. 그녀는 18, 19세 정도로 보였고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으며, 손톱이 새의 발톱처럼 길었다. 마고는 부름에 응해 왕원에게 절을 하고 자리에 앉은 뒤, 그에게 "제가 신선님을 모신 이래 이미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接待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지난번 봉래(蓬萊)에 갔더니 바다가 이전의 반 정도였습니다. 다시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왕원은 "성인들이 모두 동해는 다시 흙먼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였네(聖人皆言, 海中行復揚塵也)"라고 답했다. '마고'는 '삼(삼베) 마, 시어머니(여인) 고'로 '삼베 여인'이다. 옛날 옛적에 사람들에 옷을 지어 입히고자 삼베를 잘 다루려면 손톱이 길면 좋다. 그리고 그 긴 손톱이 있으면 등 뒤의 가려운 곳도 잘 긁을 수 있다. 여기서 마고소양(麻姑搔癢) 즉 "마고가 긴 손톱으로 '가려운 데(癢)'를 '긁는다(搔)'"라는 말도 생겨났다. 마고 이야기가 우리나라 땅으로 넘어와 '마고 할미'로 바뀌게 되었다고도 한다. 더구나 신선의 '선(仙)'을, "산이 씨자 무당의 씨자"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산이'[=산(山) 사람(亻)] 즉 '무당, 샤먼'의 전통에서 유래하여 거꾸로 중국 쪽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수도 있다(범부 김정설). 위의 『신선전』에서는 실제로 '상전벽해'라는 말이나 내용이 보이질 않는다. 마고는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하는…"이라 했고, 왕원은 "동해는 다시 흙먼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동해라는 푸른 바다 즉 벽해(碧海)가 뽕나무밭이 되었다는 '벽해상전'이라 해야 옳다. 그럼 '상전벽해'라는 사자성어는 어디에 처음 나오는가. 당나라 노조린(盧照鄰)의 장편 칠언고시 「장안고의(長安古意)」의 다음 구절에서다. "절물풍광부상대(節物風光不相待: 철 따른 산물과 풍경은 서로 기다려주지 않고), 상전벽해수유개(桑田碧海須臾改: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 되듯 잠깐새 바뀌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세상 변화의 무쌍함, 홍수 등으로 엉망진창이 된 산하를 바라보며 상전벽해라는 말로 위로 하거나 한탄했다. "맥령(麥嶺: 보릿고개)에도 거둘 것 없어, 금년 농형(農形: 농사 형편)도 무망(無望), 상전벽해(桑田碧海)된 대저(大渚) 가락(駕洛) 등지에 복구자금도 화중지병(畫中之餠)"(〈동아일보〉 1935년 6월 4일자) 등등. 상전벽해가 입에 오르내릴 때는 민심이 불안한 시기다. 이런 즈음일수록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 다짐이 필요하다. 제행무상이란 말처럼 모든 것은 "잠깐새 바뀐다!"

    2026-08-07 11:40:00

  • [매일신문 전국 어린이  사진공모전 70년]<1983년 29회>장려상 김광희 작 '바닷가 아이들'…웃음이 파도보다 먼저 밀려오던 봄

    [매일신문 전국 어린이 사진공모전 70년]<1983년 29회>장려상 김광희 작 '바닷가 아이들'…웃음이 파도보다 먼저 밀려오던 봄

    1983년 이른 봄이었다. 겨우내 움츠렸던 바다가 따스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하던 어느 날, 경북 포항 구룡포항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도보다 먼저 밀려왔다. 현수와 진환, 승현, 동현, 그리고 철수.다섯 친구는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항구로 달려갔다. 어른들에게 항구는 삶의 터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놀이터였다. 커다란 방파제는 운동장이었고, 부표는 장난감이었으며, 항구에 정박한 나뭇배는 거대한 해적선이었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나뭇배. 바닷바람과 소금기를 수십 년 견뎌낸 난간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좁은 틈 사이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누군가는 까르르 웃었고, 누군가는 친구를 밀치며 장난을 쳤다. 앞니가 빠진 아이의 웃음도,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웃는 얼굴도 모두 봄 햇살만큼 따뜻했다. 그날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내일 시험이 있는지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지도,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웃음은 이유가 있어서 터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기 때문에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은 그들에게 특별한 향기가 아니었다. 아침에도 맡고, 점심에도 맡고, 저녁에도 맡던 일상의 냄새였다. 서울 아이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바다였겠지만, 구룡포 아이들에게 바다는 늘 곁에 있는 친구였다. 파도가 부두를 두드리는 소리도 자장가였고, 갈매기 울음도 놀이터의 배경음악이었다. 아이들은 오래된 나뭇배 하나만 있어도 몇 시간을 웃으며 놀 수 있었다. 난간은 감옥이 되었다가 망루가 되었고, 갑판은 해적선이 되었다가 고래를 잡는 포경선으로 변했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고, 친구들은 그 상상에 언제나 기꺼이 동참했다. 멀리서는 어른들이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물에서는 은빛 고기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선창가에는 고무장화를 신은 어부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삶은 고단했지만, 아이들의 웃음만큼은 누구도 빼앗지 못했다. 어른들의 땀방울과 아이들의 웃음이 함께 어우러져 구룡포의 봄은 더욱 따뜻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40여 년이 지났다.현수도, 진환도, 승현도, 동현도, 철수도 이제는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고향을 떠났고, 누군가는 여전히 바다를 지키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주름이 생겼겠지만, 사진 속 그날만큼은 모두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있다. 김광희 작 '바닷가 아이들' 사진은 단순히 다섯 아이의 미소를 기록한 작품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어린 시절, 가장 순수했던 시간을 붙잡아 둔 한 편의 시다.그래서 우리는 이 사진 앞에서 미소를 짓다가도 문득 가슴이 먹먹해진다.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봄볕 아래 친구들과 함께 웃던 그 하루,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봄이었다.

    2026-08-07 11:17:00

  • [임무출의 낱말 맞히기]<제32회>

    [임무출의 낱말 맞히기]<제32회>

    〈strong〉◆가로 풀이〈/strong〉 1. ○○○권: 맨손과 맨주먹이라는 뜻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 =척수공권. 3. ○○○상: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하는 사상. =배금주의. 5. ○○무한: 산에서 느끼는 정취가 한이 없음. 7. ○○귀정: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감. =사불범정. 8. ○○지추: 존속과 멸망, 또는 생존과 사망이 결정되는 아주 절박한 경우나 시기. 10. ○○○처: 한 남편에게 한 아내가 있음. =일부일부. 12. 불립○○: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음. 13. ○○도주: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몸을 숨겨 멀리 도망함. 14. ○○거자: 과거 시험에 떨어진 선비. 15. 남부○○: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인다. 16. ○○○족: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하거나 흡족하게 여김. 18. ○○오달: 도로나 교통망, 통신망 따위가 이리저리 사방으로 통함. =사달오통. 사통팔달. 20. 단사○○: 대그릇 하나에 담은 밥과 한 그릇의 국이라는 뜻으로, 변변치 못한 음식. 21. ○○곡곡: 한 군데도 빠짐이 없는 모든 곳. =면면촌촌. 23. ○○○식: 오래도록 편지나 소식이 없음. 24. 불○○○: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가 있음. =불문가지. 불언가상. 〈strong〉◆세로 풀이〈/strong〉 1. ○○○○: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함. 2. ○○명월: 사람 없는 빈산에 외로이 비치는 밝은 달. 3. 천생○○: 나무랄 데 없이 신통히 꼭 알맞은 한 쌍의 부부. =천상배필. 천정배필. 4. ○○○○: 사주의 간지가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타고난 운수. 6. ○○○침: 정수리에 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따끔한 충고나 교훈. =정상일침. 7. 무○○○: 큰 탈이 없이 편안하고 한가로움. =무사태평. 9. ○○○해: 한없이 크고 넓은 바다. =만경창파. 망망대양. 무변대해. 11. ○○○수: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음. 또는 그렇게 많은 수효. =기수부지. 12. ○○○우: 종이, 붓, 먹, 벼루의 네 가지 문방구. =문방사보. 15. ○○○○: 한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러 사람의 말이 같음. =이구동성. 이구동음. 16. ○○○생: 자신의 힘만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감. 17. ○○○창: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 19. ○○○○: 일정한 장소를 지나다니지 못하게 함. 이것의 준말이 통금이지요.. 20. ○○지재: 변변하지 못한 작은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 22. ○○고론: 생각하는 대로 거리낌 없이 드러내놓고 큰 소리로 논의함. 또는 그 말. ◆30회 정답 〈응모요령〉 ▶낱말맞히기 정답 공모(이름·휴대폰 번호·주소를 반드시 기재) ①우편엽서 ②이메일: mincho@imaeil.com ▶당첨자는 지면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 ▶보내실 곳: 대구시 중구 서성로 20 매일신문 주간본부(우편번호 41933) ▶당첨자는 본지 지면 발표

    2026-08-07 10:30:00

  • [도레미가족]<5>

    [도레미가족]<5>

    2026-08-07 10:30:00

  • [금주의 공연,전시]

    [금주의 공연,전시]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주최 제20회 최계란명창전국대구아리랑경창대회 & 제24회 대구아리랑축제 국악극〈아리랑 1926〉 8월 8일 오전 10시, 오후 7시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가 대구아리랑의 전승과 확산을 위해 마련한 경연과 국악극 공연이다. 오전 10시에는 명창부와 일반부, 단체부, 학생부로 나눠 최계란명창전국대구아리랑경창대회를 진행한다. 오후 7시에는 한국 최초의 무성영화인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100주년을 기념한 국악극 〈아리랑 1926〉을 선보인다. 전국의 아리랑 전승 단체가 참여하는 만큼 각 지역의 아리랑을 국악극으로 만날 수 있다. ◆수무브무용단 '온 가족이 함께하는K -우먼 마당놀이-카시나 칭칭' ​8월 16일 오후 5시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수무브무용단(대표 박수열)이 우리 민요의 흥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선보이는 무용 공연이다.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를 바탕으로 무용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도 부담 없이 즐기도록 만들었다. 여성 무용수들의 몸짓, 유쾌한 에너지가 가득한 K-우먼 마당놀이를 표방한 무대다. 박수열이 안무를 맡았고, 김재덕이 작곡했다. 소리꾼 최은해가 라이브로 민요를 부르고 무용수 서정빈, 백찬양, 백선화, 남희경, 이예림, 장민주, 양채원, 이예지, 하현봉이 무대에 오른다. ◆무산 석성악 산상수훈 묵상서예展 ​8월 4일~8월 9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10전시실 ​사랑과 용서, 자비를 전하는 예수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묵상하며 완성한 무산 석성악 작가의 서예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대구미술협회 기획전시 2. '무더위를 잠재우는 바람'展 ​8월 15일~8월 28일 대구미술협회 CL갤러리 ​대구미술협회의 여름맞이 기획전이다. 부채 위에 담긴 서예와 문인화를 통해 여름의 시원한 바람과 마음의 여유를 전한다. (이종숙 作)

    2026-08-06 15:30:00

  • [도레미가족]<4회>

    [도레미가족]<4회>

    2026-07-31 14:05:46

  • [김석모의 모두를 위한 미술사]195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와 선(禪)

    [김석모의 모두를 위한 미술사]195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와 선(禪)

    20세기 중반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가 동아시아의 선불교에 관심을 가진 배경에는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원자폭탄이 초래한 파국은 이성과 과학, 진보에 대한 낙관을 흔들었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믿음이 무너지면서 일부 지식인은 기존의 서구 철학과 종교 밖에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당시 예술 내부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미술가와 음악가는 작품을 개인의 감정이나 천재성을 표현하는 결과물로 보는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의문을 품었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보다 작가의 의도와 통제를 줄였을 때 무엇이 드러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개념적 판단에 앞선 직접적인 경험, 자아에 대한 집착의 해체,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을 강조한 선불교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일본의 불교학자이자 선(禪)사상가인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는 이러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선을 엄격한 사찰 수행이나 난해한 불교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고, 현실을 분별과 개념 이전의 상태에서 직접 경험하는 사유로 설명했다. 영어로 저술하고 강연한 그는 선불교를 서양철학과 심리학, 기독교 신비주의와 연결함으로써 미국과 유럽의 독자가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재구성했다. 스즈키는 1952년부터 1957년까지 방문교수로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선불교와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심리학과 서양철학, 기독교 신비주의를 폭넓게 아울렀다. 학생과 일반인, 학자뿐 아니라 뉴욕 문화예술계의 여러 인물도 그의 강의와 사상적 영향권에 있었다. 다만 이는 동아시아의 선이 그대로 서구에 이식된 과정이 아니었다. 스즈키가 근대적으로 재구성한 선사상을 서구 예술가들이 각자의 문제의식과 매체에 따라 선택적으로 해석한 과정이었다. 스즈키의 사상을 가장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받아들인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은 작곡가 존 케이지였다. 케이지는 음악을 작곡가가 음을 조직해 만들어 내는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소리를 발견하고 경험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는 작곡가의 취향과 의도를 줄이면 이전에는 음악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소리까지 새롭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1952년 뉴욕주 우드스톡의 매버릭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의 연주로 초연된 〈4분 33초〉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났다. 세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에서 연주자는 정해진 시간 동안 의도적인 악음을 연주하지 않는다. 초연 당시 연주자는 피아노 건반 덮개를 여닫아 각 악장의 시작과 끝을 표시했다. 그러나 공연장은 완전한 침묵에 잠기지 않았다. 공연장 안팎에서는 바람과 빗소리, 관객의 기침과 움직임, 의자의 마찰음과 웅성거림 등이 발생했다. 일반적인 공연에서는 작품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취급되던 이러한 소리가 작품의 청취 대상이 된 것이다. 악보에는 세 악장과 연주의 시간적 틀이 제시되어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실제 소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공연의 장소와 시간, 날씨와 관객에 따라 매번 다른 소리가 발생하므로 〈4분 33초〉는 연주될 때마다 새롭게 구성된다. 작품은 작곡가가 모든 음을 통제하는 결과물에서 우연과 환경,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드는 사건으로 전환된다.

    2026-07-31 12: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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