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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로 만나는 약선(藥膳)]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 '매실(梅實)'

    [이야기로 만나는 약선(藥膳)]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 '매실(梅實)'

    열매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꽃을 보고자 함이었다. 아 글쎄, 봇도랑 건너 산그늘 비탈에 매화나무를 심었다지 뭔가. 매화 소식이 들려오면 늘 허기졌다. 응달이라 꽃망울은 입을 앙다물었고, 먼발치에서 희미한 자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가을, 마누라 매운 잔소리에 남편은 결국 괭이를 들었다. 그렇게 매화나무 한 그루를 마당 가로 옮겨왔다. 가지치기한 엉성한 몸피의 나무는 오종종히 꽃망울을 달았다. '매화는 일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 不賣香)'.깊고 향기로운 봄날이었다. 꽃 진 자리에 어느덧 뻐꾸기 탁란 같은 열매가 탱글탱글 여물고, 뻐꾹 뻐꾹 오월은 저물어간다. 예부터 식약동원(食藥同源) 사상에서 귀하게 대접받아 온 매실은 '음식이자 약'이었다. 맛은 시고 성질은 평하며, 수삽(收澁)과 해독 효능, 폐와 대장에 작용한다. 약으로 사용하는 오매(烏梅)는 맛이 시고 떫다. 약성이 따뜻하여 기침을 완화하고 만성 설사와 만성 이질을 멎게 하며, 식욕부진과 소화불량, 갈증에 도움을 준다. 매실은 해독 작용을 하는데, 매운탕이나 생선 요리에 매실주와 일본의 우메보시를 곁들이는 것은 물고기의 독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매실의 신맛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거두어들이는 성질이 있는데 이를 '수렴(收斂)'이라 한다. 예를 들면 과한 땀, 오줌, 피, 정액 등을 조절해준다. 단, 감기 초기와 이질과 설사 초기에는 사용을 금한다. 몸 안의 열이나 독소를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게 우선이다. 무더위에 땀을 배출해야 할 때와 땀이 적은 사람, 위산과다일 때도 섭취에 신중해야 한다. 또한 생매실에는 아미그달린(cyanogenic glycoside)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어 복통이나 구토를 유발할 수 있다. 중국 삼국시대 때 조조의 군사들은 갈증에 지쳐 움직일 수 없었다. 조조는 "저 산 너머에 커다란 매림(梅林)이 있다."고 하였다. 병사들은 신 매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였고, 갈증이 완화되어 행군할 수 있었다. 수양제(隋煬帝)는 향락을 즐기다 몸이 허약해졌다. 막군석(莫君錫)이라는 어의는 '신장의 물기운이 부족하여 양기(불기운)가 상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어의는 약 대신 매실이 익어가는 그림을 주면서 감상하라고 하였다. 양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에 침이 고이고 갈증이 사라졌다. 상상만으로 심리적 효과를 얻은 경우인데, '문매지갈(聞梅止渴)', '망매해갈(望梅解渴)' 고사성어의 어원이다. 조선 선비들은 매화를 귀히 여겼다. 추운 겨울 끝에 가장 먼저 피는 매화를 시와 그림의 소재로 삼아 절개와 치유의 상징으로 여겼고, 매실은 청렴함과 인내의 의미로 보았다.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다. 매화에 눈이 내리면 설중매(雪中梅), 달 밝은 밤의 월매(月梅), 옥같이 고운 옥매(玉梅), 철 이르게 피는 조매(早梅),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매(垂枝梅), 붉은 홍매(紅梅), 유독 검붉은 흑매(黑每), 겹겹 꽃잎이 화려한 만첩매화(萬疊梅花), 매화를 찾아 나서면 심매(尋梅) 또는 탐매(探梅)라 하였다. 장아찌나 매실청 담그는 청매(靑梅), 향기로운 매실주 만드는 황매(黃梅), 껍질을 훈증하여 까맣게 말린 오매(烏梅), 소금물에 절여 햇볕에 말린 백매(白梅)는 매실을 일컫는다. 꽃은 꽃대로, 열매는 열매 대로 귀하다. 얼마 전 꽃을 보았을 때는 매화나무였건만, 바야흐로 열매를 달고 있는 매실나무를 본다.

    2026-05-29 15:30:00

  • [매일신문 전국 어린이  사진공모전 70년]<1975년 21회>동상 장국현 작

    [매일신문 전국 어린이 사진공모전 70년]<1975년 21회>동상 장국현 작 "격동"…폐드럼통 타고 노는 아이들

    1974년 늦은 봄, 철수와 영호는 학교만 끝나면 강가로 달려갔다.그 시절 동네 아이들에게 마을 앞을 흐르던 푸른 강가는 최고의 놀이터였고, 드럼통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매일하는 멱감기도 지루해질 때쯤, 아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공사장 구석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던 커다란 드럼통 두 개였다. "야, 저걸로 배 만들면 우리도 저 넓은 강 너머로 갈 수 있지 않을까?"철수의 눈이 반짝였였으며 둘은 어느새 칡넝쿨과 짚풀을 한 움큼씩 가지고 왔다.칡넝쿨과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놓으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드럼통 호'는 그렇게 탄생했다. 어디선가 구해온 긴 장대는 훌륭한 노가 되었다. 물위에 띄운 드럼통 배가 삐걱거리고 물이 새어 들어와도 누구 하나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물결에 흔들릴수록 더 신나게 웃어댔다. 철수는 긴 장대로 강바닥을 힘껏 밀었다. "영호야, 꽉 잡아라!" 철수가 앞장서서 거친 물살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다. 튀어 오르는 강물은 아이들의 얼굴을 적시고 옷을 흠뻑 적셨지만, 그 누구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가득 번진 것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장난기 어린 미소와 성취감이었다.영호는 뒤에서 중심을 잡으며 철수의 박자에 맞춰 힘을 보탰고, 또 다른 친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강 건너편의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드럼통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로 나가며 마치 탐험가라도 된 듯 들떠 있었다.누군가는 선장이 되었고, 누군가는 해적이 되었다. 때로는 강 건너 모래밭에 상륙해 작은 전쟁놀이를 벌이기도 했다. 배가 뒤집혀 모두 물에 빠지는 날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웃음거리였다. 젖은 옷을 입은 채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또 드럼통 타고 놀았제?" 하며 혀를 찼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번진 웃음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버려진 드럼통에서 바다를 보았고, 좁은 강에서도 세상을 건너는 꿈을 꾸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넓고 자유로웠다.세월은 흘러 강가 풍경도 많이 변했다.드럼통배는 사라졌고, 맨발로 강물 속을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어느새 흰머리가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 햇살 아래 출렁이던 그 강물의 감촉만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아마 철수와 영호에게 1974년의 드럼통배는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었을 것이다.그것은 가난했던 시절을 건너게 해 준 작은 꿈의 배였고, 친구들과 함께 웃던 가장 찬란한 유년의 기억이었다. 사진 속, 튀어 오르는 물방울 너머로 소년들의 거친 숨소리와 활기찬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자갈밭을 치고 나가는 물살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마치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내던 그 시절 우리 사회의 에너지를 닮아있기도 하다.

    2026-05-29 15:00:00

  • [매일청춘웹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매일청춘웹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2026-05-29 14:03:01

  • [임무상의 1957 그림일기]5월 25일 토요일 /5월 29일 수요일

    [임무상의 1957 그림일기]5월 25일 토요일 /5월 29일 수요일

    ◆단기 4290년(1957년)5월 25일 토요일 맑음…(중략)나는 노력 없이 무엇을 한단 말인 고 하며 몇 번이나 머리에서 생각이 나나 그렇게 잘되지 않는다.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세수하러 가려 하니 안 되겠고, 세수하지 않으니 찝찝하고, 어느 것을 택할지 분간할 수 없었다. 교실(敎室)에 와 공부하다가 조회 종이 울려 모두 교실로 들어와 담임(擔任)선생님의 훈화(訓話) 말씀을 잘 듣고 있었다. 오늘은 여전히 공부 열심히 그리고 졸리기는 하나 하루의 학과목(學科⽬)을 열심히 재미있게 마치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또 한 장의 그림을 그린 뒤 태욱(泰煜)이네 집에 가 아령 연습과 그리고 칼싸움 놀이 등으로 재미있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오늘 배운 과목을 복습(復習)한 뒤 저녁을 먹고 오늘 할 것은 완전히 마치고 꿈나라로 갔다. ◆단기 4290년(1957년)5월 29일 수요일 맑음…(중략)아침을 먹은 뒤 곧 학교로 와 공부하다가 어제와 같이 아침 훈련(訓練) 조회를 하게 되었다. 나도 앞에 나가 지휘를 한 뒤 오늘은 사열 분열 그리고 행진(⾏進)까지 하였다. 한 시간쯤 밖에서 체조(體操)한 뒤 곧 교실에 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뒤 공민(公民) 공부를 하였다. 다음 시간에는 모두 농기구를 메고 운동장에 가 열심히 풀을 뽑았다. 오늘의 학과목은 완전히 마치고 뒷 교사(校舍)에 가서 교내 환경정리를 오후 8시까지 한 뒤 집에 왔다. 어두웠기 때문에 매우 곤란 하였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얼마나 피곤한지 그만........ 화백 화백

    2026-05-29 14:00:00

  • [조한규 칼럼]영남 지도자가 '홍범연의'를 읽어야 하는 이유

    [조한규 칼럼]영남 지도자가 '홍범연의'를 읽어야 하는 이유

    6·3지방선거 이후 대구경북의 광역단체장 2명과 기초단체장 31명에게 권한다. 수시로 이언적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휘일-이현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정독하시길. 모두 국역이 되어 있으니 쉽게 읽을 수 있다. 앞선 칼럼에서 '일강십목소'와 '성학십도'에 대해선 논의한 바 있는 만큼, 이번엔 '홍범연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 형제의 '홍범연의'는 조선 최고의 경세서이자 제왕학이다. 나아가 고려와 조선의 제왕학 교과서였던 오긍의 '정관정요(貞觀政要)'나 진덕수의 '대학연의(大學衍義)'보다 훨씬 심오하고 실용적이다. 순조 때 수난을 겪지 않고 국정에 반영됐다면, 조선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을 터. 참으로 아쉽다. 조선왕조 '순조실록' 13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사년의 흉도(凶徒) 이현일의 문집을 간행한 우두머리를 관찰사로 하여금 엄히 형벌한 다음 섬으로 귀양보내고, 흉서(凶書)는 거두어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숙종 때 이조판서였던 이현일의 '갈암집'이 금서 취급을 받았던 것. 일종의 분서(焚書) 사건이었다. 자연 '홍범연의'도 간행되지 못했고, 간행 이후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망국의 징조가 아니면, 과연 그 무엇이겠는가. '洪範'은 동양고전 '서경(書經)'에 수록된 내용으로 모두 65자에 불과하다. 개념 정도만 소개돼 있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실행 내용이 없다. 그래서 존재와 갈암은 이를 보다 자세히 풀이하고 내용을 덧붙여 썼다. '홍범연의'가 44만여 글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 된 배경이다. 즉, 존재와 갈암이 "나라가 큰 병을 앓고 있다"며 '홍범구주'의 의미와 체계를 조선 실정에 맞게 재해석, 완벽하게 주석을 하다 보니 책의 분량이 200자 원고지 2,234장이 된 것이다. 1652년 존재가 '홍범연의' 작성을 시작했고, 1686년 갈암이 초고를 완성했다. 이어 갈암의 둘째 아들이자 존재의 양자인 이의가 교정을 봤다. 후대 밀암 이재와 대산 이상정도 교정을 봤다. 그리고 마침내 1863년 '홍범연의'는 완성본으로 간행됐다. 212년 만이다. '홍범연의'가 오늘에도 주목되는 것은 '팔정(八政:여덟 가지 정사)' 편의 권3의 '식(食)', 권4의 '화(貨)', 권13의 사공(司空上) 조가 주는 교훈이 크기 때문이다. 원래 '서경'에서 '식'은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요, '화'는 재물을 잘 다스리는 것이요, '사공'은 땅과 백성이 사는 곳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식'조에선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은 또한 농사에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며, 백성을 부리는 것을 때에 맞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식량비축과 수리공사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화' 조에선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헤아려서 재화를 유통하게 하여 이로움을 베풀어서 백성들과 더불어 이익을 두고 다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화폐를 통해 물가안정을 이뤄 백성들의 의식을 풍족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홍범연의'의 '팔정'은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는 균분(均分)과 항산(恒産) 제도가 담겨 있는 경제학이요 행정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맞지 않는 면이 많다. 하지만 '팔정'에는 영남 정신의 3대 축을 이루는 '호국·부국·애민(護國·富國·愛民)' 정신이 담겨 있는 만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지자체 단체장들이 '팔정'을 정독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갈암종택의 사랑채 마루 벽면에 걸려 있는 갈암의 '病中書懷(병중서회)'란 시를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草草人間世(초초인간세)居然八十年(거연팔십년)生平何所事(생평하소사)要不愧皇天(요불괴황천):풀잎같은 인간 세상/어느덧 팔십 년이 흘렀네/평생 한 일이 무엇이던가/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네." '여중군자 장계향'의 둘째 아들로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은 도학자 갈암은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혀 사후 200여년간 간적, 역적으로서 취급받았다. 그 후손들과 제자들의 수난도 형용키 어렵다. 그 고난 속에서 갈암과 그 후인들은 오직 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의 자세로 '제왕의 바른길'을 제시하고, '국가재정과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200여년 동안 '홍범연의'를 편찬했다. 영남 지도자들은 이제라도 그 '호국·부국·애민' 정신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학교 철학과 교수

    2026-05-29 13:30:00

  • [문학을 품은 영화] 영화 '남아있는 나날' …일에 매몰돼  '연인'을 놓친 한 남자

    [문학을 품은 영화] 영화 '남아있는 나날' …일에 매몰돼 '연인'을 놓친 한 남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원작 영화 '남아있는 나날'(1993년)은 나치즘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던 1930년대, 당시 영국의 '달링턴 홀'은 유럽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 분)는 이 거대한 저택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수석 집사로 일하면서, 마치 종교적 소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자신의 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스티븐스는 계급 제도를 굳게 신뢰하며, 자신이 모시는 고용주인 달링턴 경을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철저히 상정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이 완벽한 집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비극적인, 개인적 희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그의 아버지가 저택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임종 직전, 스티븐스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대신 저택에서 열린 거물급 외교관들의 연회에서 발이 아픈 손님을 수발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불과 몇 시간 전, 침대에 누운 아버지는 고용주의 요구에 집중하는 위대한 집사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고 스티븐스는 그 뜻을 따라 부정(父情)이라는 인간적 감정보다 집사의 직무에 더 충실한다. 스티븐스의 완벽한 감정 통제는 새로 부임한 하녀장인 미스 켄튼(엠마 톰슨)과의 관계에서 큰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귀족 사회의 전형적인 포커페이스 문화와 스티븐스의 직업적 결벽증 때문에 결코 그 선을 넘지 못한다. 켄튼은 스티븐스보다 훨씬 대담하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스티븐스의 방에 꽃을 가져다 놓거나, 그가 몰래 읽고 있는 책을 장난스럽게 빼앗으려 하며 그의 단단한 억압을 뚫고 들어가려 시도한다. 스티븐스이 켄튼에게 숨기려고 했던 책은 당황스럽게도 연애소설이었다. 책을 둘러싼 실랑이 장면은 가히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성적 긴장감과 억압된 관능이 폭발하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자신의 감정을 늘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표현한다. 켄튼이 저택을 떠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낼 때조차 그는 "당신은 이 저택에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뿐,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진심을 끝내 꺼내지는 못한다. 그녀는 스티븐스를 좋아했지만,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결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완고함에 지치고 실망하여 그를 떠나고 만다. 스티븐스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은 혼자 있을 때 와인병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장면뿐이다. 그가 깨뜨린 것은 단순한 유리병이 아니라, 평생을 억눌러왔던 내면의 거대한 억압과 슬픔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시대를 초월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체제를 단 한 번도 스스로 검증해보지 못한 인간의 보편적인 어리석음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옥죄는 '자기 억압'과 '뒤늦은 후회'를 고풍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소니 홉킨스는 역할을 준비하면서 실제로 버킹엄 궁전의 집사로부터 "집사가 방 안에 있을 때는, 그 방이 원래 비어있었던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그 조언대로 방을 비우다 못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텅 비워버렸다. 의무와 품위라는 허상에 속아 정작 자신의 삶과 사랑을 돌보지 못했던 한 남자의 잔인하도록 슬픈 황혼,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여운이다.

    2026-05-29 13:30:00

  •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22>이전투구(泥田鬪狗),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22>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

    〈정책대결 앞선 '이전투구 양상'; "지방선거 뒤 난파선의 이전투구 볼만할 것"…〉이전투구는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표적 사자성어다. 거리 유세나 뉴스에서 후보 상호 간에 서로 헐뜯으며 싸우는 모습을 으레 보기 마련이다. 이전투구(泥田鬪狗)는, "진흙 이(니), 밭 전, 싸울 투, 개 구"로,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를 말하며, 권력・이익 등의 승부를 위해 추하게 싸우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하는 사자성어이다. 이 말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쓴다. '이전'(=진흙밭)은 '도'(塗: 진흙탕) 자처럼 '진흙탕'으로 읽기도 한다. '구(狗)'는 작은 개(강아지)인데 '주구'(走狗: 달음질하는 사냥 부리는 개)와 같이 부정적 의미나 '구육'(狗肉: 개고기), '구팽'(狗烹: 개가 삶김)처럼 식용 관련으로 쓰여왔다. 한편 '견(犬)'은 큰 개로 '충견, 애견, 반려견, 군견, 경찰견'처럼 비교적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됐다. 견(犬) 자는 큰 대(大)자와 닮아 제1공화국 때 어느 신문사에서 대통령을 견통령(犬統領)이라 잘못 표기한 예도 있었다. 과거 우리 문화에서 '개' 자가 들어가는 말은, 욕설 혹은 '개떡, 개꿈, 개살구…'라는 말처럼 "야생의, 품질이 낮은, 쓸모없는" 의미의 비속어 접두어로 좋은 뜻이 아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서는 신조어(속어)로 개 자를 붙여 '개이득, 개고생, 개꿀잼, 개좋다…'처럼 "아주, 엄청난"이라는 의미를 강조할 때 자주 쓴다. 이처럼 '개'자의 쓰임에도 등급이 있다. 네이버〈한자사전〉에서는 '이전투구'를 두 가지로 정의한다: ①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이르는 말. ②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비열하게 다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기서 이전투구를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이르는 말"(①)로 규정한 근거는 무엇일까? 인터넷에 떠도는 말로는 한결같이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나눈 '조선 팔도 인물평'이라 하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실제 우리의 고전 자료에서는 "진흙탕에서의 짐승 싸움"이라는 뜻의 "이수지투"(泥獸之鬪)(『숙종실록』 숙종8년(1682) 12월 22일 자)나 "이중지투수"(泥中之鬪獸)"(『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9월 18일 자) 등이 보이나 '이전투구'라는 말은 찾기 어렵다. 그런데, 1921년 8월 1일 자 『개벽』 제14호에 〈고인(古人)이 본 팔도인심(八道人心)〉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내용은 이렇다: "경기도(京畿道) 경중미인(鏡中美人), 충청도(忠淸道) 청풍명월(淸風明月), 전라도(全羅道)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慶尙道) 태산교악(泰山喬嶽), 황해도(黃海道) 청파투석(靑波投石), 평안도(平安道) 청산맹호(靑山猛虎), 강원도(江原道) 암하로불(巖下老佛), 함경도(咸鏡道) 이전투구(泥田鬪狗)". 어느 때부턴가 전해오는 민간 속담을 실어놓은 듯하다. 습관적으로 들어온 '남남북녀'라는 말처럼 특정 지역의 한두 가지 지리・인물의 성향을 거칠게 관찰, 성급하게 단정한 어휘들이다. 이런 종류의 지역 특성 규정은 그냥 재미로 읊조리기는 좋지만, 성급하고 무리하게 일반화해선 안 된다. 어쨌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비열하게 다투는 저 '이전투구'의 근저에는 밑 빠진 독 같은 욕망이 입 벌리고 있다. 어차피 삶이 싸움이라치면, 누구든 개인적인 욕심만을 채우기보다는 사회의 보편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줬으면 한다.

    2026-05-29 13:30:00

  • [과학으로 보는 세상] 개미 군락에서 벌어진 모친 살해, 누가 여왕을 죽였나

    [과학으로 보는 세상] 개미 군락에서 벌어진 모친 살해, 누가 여왕을 죽였나

    흔히 동물들은 암컷과 수컷의 유전자가 결합해 새로운 유전 조합을 만드는 '유성생식'으로 번식한다. 한편, 체세포 일부가 떨어져 나가 부모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가 만들어지는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도 있다. 유성생식 형태로 번식하는 동물 종에서는 모친 살해, 즉 자식이 어미를 살해하는 행위는 매우 드물다. 어미의 보호와 도움없이 생존하기 어려운 자식으로선 어미를 제거해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일부 거미 종은 어미가 자신의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놀라운 모친 살해 행동이 있다. 바로 특정 개미 종의 일개미들이 자신들의 여왕개미를 죽이는 사례다. 표면상 이득이 없는 것 같은 이 행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없이 군락을 빼앗는 방법 일본 규슈대학교 생물학과 다카스카 케이조 교수 연구진은 황개미와 일본풀개미 군락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했다. 각 개미 군락에 동양털개미(Lasius orientalis)와 황털개미(Lasius umbratus), 이른바 '기생 개미'가 숙주 개미를 조종해 '여왕 살해' 행동을 일으키고 군락을 찬탈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숙주 개미와 기생 개미는 모두 같은 속에 속하지만, 둥지 침입이 쉬운 것은 아니다. 기생 개미는 숙주의 둥지에 침입하기 위해 병정개미와 일개미를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기생 개미는 냄새로 위장하는 방식을 택한다. 기생 여왕개미는 밖을 돌아다니는 숙주 개미들이 분비하는 페로몬을 묻혀 아군인 척 위장한다. 불과 하루만에 기생 여왕개미는 숙주의 둥지에 잠입할 수 있게 된다. 둥지에 무사히 잠입한 기생 여왕개미는 숙주 여왕 개미를 찾아낸 후, 복부에서 분비되는 개미산을 숙주 여왕개미에게 뿌린다. 관찰 결과, 동양털개미 여왕은 약 20시간 동안 숙주 여왕 개미에게 15차례에 걸쳐 개미산을 분사했다. 이 과정에서 숙주 일개미들은 점차 흥분 상태에 빠져 자신들의 여왕을 공격했다. 숙주 여왕개미는 결국 나흘만에 살해됐다. 황털개미 여왕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이들은 단 두 차례의 개미산 분사만으로도 숙주 일개미들이 여왕개미를 공격하게 했다. 여왕을 잃은 숙주 개미들은 곧바로 기생 여왕을 받아들였고, 기생 여왕이 낳은 알을 정성껏 양육했다. 숙주 일개미들은 완벽하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연구진은 개미산의 정확한 화학성분까지는 분석하지 않았지만, 이 물질이 숙주 일개미들에게 자신들의 여왕이 군락을 위협하는 침입자로 인식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신호가 공격적인 방어 행동을 촉발했고, 결국 여왕을 살해하는데 이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기생 개미가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통은 기생 여왕개미가 직접 여왕개미를 죽이고, 일개미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이 경우 역공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레는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몸을 넘어 행동을 지배하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확장된 표현형》에서 유전자를 전달하려는 개체의 표현형은 자기 신체와 정신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의 신체와 정신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례 역시 기생 여왕의 유전적 전략 숙주 일개미라는 외부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하는 '원격 조종'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원격 조종 사례는 다른 종에게서도 보인다. 한 기생말벌은 거미가 자신의 유충을 보호하기에 최적화된 형태의 '특수 거미줄'을 짜게 만든다. 일부 흡충은 달팽이를 조종해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장소로 이동하게 만든 후, 새의 먹잇감이 되도록 유도한다. 화학적·신경학적 매개를 통해 타 생물의 의사결정 체계를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복제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확장된 표현형 이론의 설명력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자연의 전략은 때로 잔인할 만큼 정교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다. KISTI의 과학향기 권오현 과학칼럼니스트

    2026-05-29 12:30:00

  • [팔도건축기행] 공주 중동 언덕 위 붉은 벽돌 건축의 재발견 '충남역사박물관'

    [팔도건축기행] 공주 중동 언덕 위 붉은 벽돌 건축의 재발견 '충남역사박물관'

    충남 공주시 중동 구도심의 가파른 언덕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거대한 건축물 하나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계절마다 벚꽃과 단풍이 번갈아 물드는 언덕 위에 자리한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이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붉은 벽돌 외벽과 육중한 기둥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반세기 넘는 시간을 견뎌온 이 건물은 최근 충남도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되며 지역 근대건축의 상징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우수건축자산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지정되지 않는다. 건축물의 역사성과 예술성, 지역 경관과의 조화, 사회·문화적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정한다. 반세기 넘게 공주 원도심을 지켜온 시간이 건축문화적 가치로 공식 인정받은 셈이다. ◆무령왕릉 발굴과 박물관의 탄생 충남역사박물관의 시작은 백제사 연구의 흐름을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에서 출발한다. 1971년 공주 송산리고분군 6호분의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한국 고고학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안긴 사건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은 백제사 연구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문헌 중심으로 이뤄졌던 백제 연구가 실물 유물을 바탕으로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발굴 현장에서는 금제관식과 지석, 청동거울 등 수많은 국보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는 갑작스럽게 출토된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할 공간이 필요해 새로운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렇게 1973년 공주시 중동 언덕에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이 문을 열었고,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됐다. 당시 박물관 건립에는 백제 문화 복원과 국가 정체성 재정립이라는 시대적 흐름도 함께 반영돼 있었다.충남역사박물관의 뿌리 역시 이러한 역사문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후 2004년 국립공주박물관이 웅진동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옛 건물은 역할을 마치는 듯했지만, 개보수를 거쳐 2006년 충남역사박물관으로 다시 문을 열며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됐다. ◆1970년대의 미학, 건축물 자체의 가치 충남역사박물관을 설계한 이는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로 평가받는 고(故) 이희태 선생이다. 그는 혜화동성당과 절두산 순교성당, 남산 국립극장, 국립경주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 등을 설계하며 한국 현대 공공건축의 흐름을 이끈 인물로 꼽힌다. 이희태는 당대 건축계 주류와는 다소 다른 길을 걸었다. 화려한 해외 유학 경력보다 스스로 현대건축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건축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한국 전통건축을 현대 건축 언어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이어갔다. 그가 주목했던 건축물은 경복궁 경회루였다. 공주박물관 하부를 떠받치는 육중한 콘크리트 기둥 역시 경회루 석주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형태다. 건물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 구조는 당시 공공건축 특유의 웅장함을 드러낸다. 건축물 곳곳에는 무령왕릉의 흔적도 녹아 있다. 건물 외벽을 감싸는 붉은 벽돌은 왕릉의 내부 구조에서 착안한 디자인 요소다.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아치형 창틀 역시 왕릉 입구 형상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관의 비례감도 인상적이다. 화려한 장식을 내세우기보다 절제된 선과 균형감을 강조한 건물은 1970년대 공공건축이 지녔던 시대적 미학을 보여준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벽돌 외벽과 화강석 기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은 색감과 무게감을 만들어낸다. 박물관 내부에는 1970년대 공공건축 특유의 구조와 분위기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이 어우러진 내부 공간에서는 당시 건축 양식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 건축물이 지닌 가장 큰 가치 가운데 하나는 '원형의 보존'이다. 여러 차례 보수와 리모델링을 거쳤음에도 건축물의 핵심적인 특징과 역사적 분위기를 비교적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건축물 자체도 충남 근대건축의 흐름과 지역의 시간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공주 원도심 한가운데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벽돌 외관의 건물은 도시의 풍경과 함께 세월의 흔적을 쌓아왔다. ◆충남 선비정신의 뿌리 박물관 내부로 발길을 옮기면 충남을 지탱해온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충남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충청도를 대표했던 유교 문화 유물들의 보고이기도 하다. 전시실에는 충남 지역 명문가들이 대대로 간직해온 고서와 서화, 생활유물 등이 다수 전시돼 있다. 화려한 연출보다 기록과 삶 자체에 집중한 전시가 특징이다. 묵향 짙은 선비들의 삶을 정갈하게 보여주는 공간에 가깝다. 충절과 예학을 중시했던 충남 선비문화의 특징은 유물 곳곳에 남아 있다. 선비들이 사용했던 붓과 벼루,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 등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고민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읽힌다. 오래된 문집과 생활유물에는 당시 지역 사회의 문화와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역 명문가들이 남긴 기록물은 충남 지역 유교문화의 흐름과 선비정신의 전통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나눔과 정직을 중시했던 충남 선비들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의미를 남긴다. 외부의 붉은 벽돌 건물이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왔듯, 내부의 유물들도 시간을 건너 현재까지 지역의 정신문화와 삶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지붕 없는 박물관,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 충남역사박물관의 매력은 건물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박물관을 둘러싼 야외 공간과 산책로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이 공간의 풍경이 완성된다. 박물관 주변 산책길은 인근 중동성당과 3·1중앙공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오래된 성당과 붉은 벽돌 박물관, 공원의 나무들이 어우러지며 공주 원도심만의 독특한 역사문화 경관을 만들어낸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단풍이 언덕길을 물들인다. 시민들은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며 역사를 일상 속 풍경처럼 마주한다. 아이들은 야외 마당에서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관광객들은 오래된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도시의 시간을 느낀다. 최근에는 야외 공연과 문화행사, 교육 프로그램도 꾸준히 열리고 있다. 오래된 건축물은 과거를 보존하는 공간을 넘어 시민들의 삶과 호흡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충남도는 이번 우수건축자산 지정을 계기로 보존과 활용을 함께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우수건축자산으로 지정된 건축물은 원형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일부 규제 완화 적용을 받을 수 있어 보다 유연한 유지·관리가 가능해진다. ◆시간을 품은 붉은 벽돌 건축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50여 년 전 공주 중동 언덕 위에 세워진 붉은 벽돌 건물은 이제 충남 전체의 건축적·문화적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무령왕릉 발굴의 기억과 백제 문화의 흔적,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시간이 그 공간 안에 켜켜이 쌓여 있다. 공주 원도심의 풍경 속에 자리한 충남역사박물관은 오늘도 자리를 지키며 지역의 역사와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지방신문협회 대전일보 윤신영 기자

    2026-05-29 12:18:58

  • [하대성의 헬기 이야기] 함께 날지 않으면, 동맹이 아니다

    [하대성의 헬기 이야기] 함께 날지 않으면, 동맹이 아니다

    미국은 헬기 생산 및 운용 능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넘버 원'이다. 대한민국 육군이 운용하는 헬기의 대부분은 여전히 미제다. 한때 영화에서 자주 보이던 코브라(AH-1S)는 이미 퇴역했고, 아파치(AH-64D/E), 블랙호크(UH-60), 치누크(CH-47D) 등이 주력이다. 국산 기동헬기 수리온도 점차 늘고 있지만, 미국제 헬기는 설계, 부품, 수리규격, 소프트웨어 전부 미국 규격에 묶여 있다. 수리부속의 대부분을 미국 공급원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 한미 군사동맹의 또 다른 실체다. 2000년대 초, 일본은 미국의 공격헬기 AH-64D '아파치 롱보우'를 면허 생산하며 기체 조립과 핵심 체계 통합에 참여했다. 미국이 설계와 기술을 내준 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전략적 신뢰 위에 세운 동맹의 선택이었다. 설계 도면을 함께 보고 부품을 함께 만드는 관계야말로 동맹의 진짜 모습이다. 그러나 생산 단가가 치솟고 도입 계획이 축소되면서, 이 사업은 냉정한 현실 앞에 조기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동맹이 아무리 가까워도 전략적 우선순위와 경제적 효율이 어긋나면 관계의 온도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교훈이다. 한국은 수리온으로 국산 헬기 시대를 열었지만, 아직 완전한 자주국방이라 보기는 어렵다. 기체와 동력전달계통은 국산화했으나, 헬기의 심장인 엔진은 여전히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품을 사용한다. 만약 부품 공급망에 차질이 생기거나 미국의 수출 허가(E/L)가 지연된다면, 수리온의 가동률은 곤두박질칠 것이다. 자주국방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공급망의 뿌리는 여전히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무기체계의 독립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헬기는 동맹의 내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무기다. 함께 훈련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장이 났을 때 어디서, 얼마나 신속하게 수리해 전장에 재투입할 수 있느냐다. 진짜 동맹은 조약문이 아니라 평소의 정비 능력, 기술 교류, 인력의 결합 속에서 드러난다. 정권은 바뀌어도 함께 축적한 비행 시간과 상호운용성은 동맹이 쌓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우리의 외교·안보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조가 흔들리며 이 자산을 너무 자주 무력화해 왔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이전 정부의 합의가 부정되고, 대외 메시지의 진폭이 커지면서 파트너에게 혼란을 준다. 헬기 조종사는 바람의 방향이 조금 바뀐다고 해서 비행 원칙을 통째로 바꾸지 않는다. 비행 시간이 쌓일수록 판단은 정교해지고, 함께 훈련한 편대일수록 유사시 신뢰는 두터워진다. 동맹 역시 그렇게 증명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고 있다. 미국은 함정 건조·정비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며 한국 같은 파트너를 찾고 있다. 이 흐름은 헬기를 포함한 항공기 정비와 MRO(유지·보수·정비)에서도 같다. 전장에서 빠르게 수리해 다시 투입할 수 있는 능력, 안정적인 부품 공급망, 공동 훈련 네트워크가 갖춰질수록 한국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미국은 우정보다 필요를 계산한다. 우리는 그 계산법을 익혀야 한다. 이러한 '필요의 계산법'은 우리 지역에도 분명한 시사점을 준다. 대구·경북의 기계·부품·정비 산업은 평시에는 경제를 지탱하지만, 위기 시에는 동맹 전력을 복구하는 안보 자산이 된다. 실제로 이 지역의 항공 MRO 클러스터가 경쟁력을 갖출수록, 유사시 한미 양국이 함께 의존할 수 있는 후방 지원 거점이 형성된다. '고쳐서 다시 띄우는 능력'이 쌓일 때 우리는 동맹 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동맹은 선언이나 구호로 유지되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준비와 실력이 있을 때만 신뢰가 형성된다. 헬기 한 대가 뜨기 위해서도 부품 공급을 믿어야 하고, 함께 훈련한 조종사를 신뢰해야 하며, 유사시 같은 편대로 날아오를 동료를 확신해야 한다. 그 믿음은 함께 하늘을 나는 시간에서 축적된다. 미국이 한국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파트너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냉정한 생존 전략이다. 지금 우리는 충분히 함께 날고 있는가. 함께 날지 않으면, 동맹이 아니다. 하대성 전 육군 헬기부대 대장, 정치학 박사

    2026-05-29 12:00:00

  • [임무출의 낱말 맞히기]<제22회>

    [임무출의 낱말 맞히기]<제22회>

    〈strong〉◆가로 풀이〈/strong〉 1. 갈피를 잡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모양. 산속에서 길을 잃고 ○○○○하다. 3. '엽록소'의 순 우리말. 7. 옷감이나 헝겊 따위에 여러 가지 색실로 수를 놓음. 또는 그 수. 8. 봄철과 가을철에 입는 옷. 9.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음. =속사. 직사. 12. 나병균에 의하여 감염되는 만성 전염병. '문둥병'의 다른 이름. 13. 사물이나 현상이 처해 있는 현재의 모양 또는 형편.넌 정신 ○○가 영 글러 먹었어. 17. 어렵게 힘들여. =가까스로.시험에 ○○ 합격했다. 18. 법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나라에 지배되고 있는 나라. 19. 타작 마당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데 쓰는 돗자리. =풍석. 22. 다섯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 무궁화․ 벚꽃․ 배꽃 따위. 23. 이가 빠져서 입과 볼이 안으로 우므러진 할미. =팥죽할멈. 〈strong〉◆세로 풀이〈/strong〉 1. 소금에 절인 갈치를 토막 내어 찌거나 굽거나 한 반찬. 값싼 ○○○○ 맛만 좋다.(속담) 2. 모르는 것이나 알고 싶은 것 따위를 물음. =질의. 4. 어떤 일이나 임무를 맡겨, 어느 곳에 보냄. 외교 사절을 ○○하다. 5.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 이젠 나도 ○○○○이니 마음대로 해라. 6. 고려와 조선 시대,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관청). 10. 갑자기 세차게 내리다가 곧 그치는 비. =소낙비. =취우. 갑자기 ○○○가 쏟아지다. 11. 셈을 보태는 일. =더하기. ↔ 빼기. 14. 글씨를 아무렇게나 마구 쓰다. *그는 다른 사람이 읽기 어려울 정도로 편지를 ○○○○. 15. 영원히 계속되는 성질이나 능력. =영원성. 항구성. 16. '귀뚤귀뚤'은 이것의 우는 소리이지요. 20. 깨의 잎사귀. 21. 물체의 겉 부분. =껍데기. 그 물건은 ○○은 낡았지만 속은 멀쩡했다. ◆20회 정답 〈응모요령〉 ▶낱말맞히기 정답 공모(이름·휴대폰 번호·주소를 반드시 기재) ①우편엽서 ②이메일: mincho@imaeil.com ▶당첨자는 지면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 ▶보내실 곳: 대구시 중구 서성로 20 매일신문 주간본부(우편번호 41933) ▶당첨자는 본지 지면 발표

    2026-05-29 11:30:00

  • 이대현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 박정희 대통령 리더십 특강

    이대현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 박정희 대통령 리더십 특강

    이대현 전 매일신문 편집국장은 27일 대구시 수성구 호텔라온제나에서 대구가톨릭대 미래지식포럼 회원들을 대상으로 '박정희 대통령 리더십 특강-우리가 몰랐던 박정희'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2026-05-28 17:45:18

  • [금주의 공연,전시]

    [금주의 공연,전시]

    ◆대구트롬본앙상블 제29회 정기 연주회 ​5월 30일 오후 5시 대구콘서트하우스 챔버홀 입장료 1만원~2만원 문의 053-623-0684 ​대구·경북에서 활동하는 전문 연주자와 트롬본 전공자들이 모여 1997년 창단한 대구트롬본앙상블의 정기 연주회다.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을 주제로 다양한 편성의 트롬본 앙상블을 들려준다. 앤서니 오툴의 '블로우페스트(Blowfest)', 블랭크 라 바지의 '슈퍼 스매시 스위트(Super Smash Suite)', 앨런 테이즌의 '크레센트 시티 포스트카드(Crescent City Postcards)' 등을 연주한다. ◆가족 뮤지컬 〈우리 아빠가 최고야〉 ​5월 30일~5월 31일 오전 11시, 오후 2시·4시 대백프라자 10층 프라임홀 입장료 1만3천원~3만원 문의 053-420-8088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그림책 『우리 아빠』에 등장하는 아빠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아빠와 함께 사라진 엄마를 찾아 떠난 주인공이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흥겨운 음악과 율동으로 담아낸다. 바쁜 일상 속 자녀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아빠들의 마음을 대신 전한다. ◆박진주 초대 개인전 'Hide and Seek' ​5월 27일~6월 17일 갤러리 제이원 문의 053-252-0614 박진주의 작업은 타자라는 거대한 숲에서 어느 곳에도 온전히 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던 연약한 자아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채택한 가장 애틋하고도 당당한 생존의 방법론이다. 작가는 외부로부터 내면을 숨기고 드러내는 경계로서의 신체를 제시해왔다. 그 외피에 맺히는 상처와 흔적들을 반투명한 비단 위에 물 붓질로 섬세히 그려내며, 숨겨진 내면을 조심스레 더듬어보는 과정을 보여준다. ◆윤혜진 개인展 ​4월 24일~6월 6일 갤러리 CNK 문의 053-424-0606 ​회화와 조형물 30여 점을 선보이는 윤혜진 작가의 개인전이다. 윤혜진의 작업에는 고대의 원형적 문화와 현대 대중문화의 파편들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또, 고대 벽화의 원초적인 에너지 위로 어린 시절 탐닉했던 만화적 상상력과 공상과학영화(SF)의 파편들이 중첩된다. 뉴욕 미술씬에서 주목받는 윤 작가는 『뉴욕 타임즈』의 로베르트 스미스(평론가)가 추상성과 구상성 예측할 수 없는 형상들을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탁월하게 형상화해내는 작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작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복합적인 문화의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

    2026-05-28 17:30:00

  • 제45회 장한청소년 3대부문표창 및 모범청소년장학금전달

    제45회 장한청소년 3대부문표창 및 모범청소년장학금전달

    한국BBS대구연맹(회장 장세철.(주)고려건설회장)은 27일 그랜드호텔 5층 프라자홀에서 수상자 및 학부모,내빈,임원,지회장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45회 장한청소년 3대부문12명(면학4명.효도4명.봉사4명)을 선발 표창과 모범청소년 중·고등학생 29명에게 장학금 등 1천640만원을 전달했다.

    2026-05-27 16:39:51

  •  지구환경측정㈜, 경북사랑의열매에 6천6백만 원 성금 전달

    지구환경측정㈜, 경북사랑의열매에 6천6백만 원 성금 전달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회장 전우헌, 이하 경북사랑의열매)는 지난 22일 경북도청에서 지구환경측정㈜의 성금 전달식을 갖고, 경북가정위탁지원센터 아동 지원을 위한 성금 6천6백만 원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이날 전달식에는 지구환경측정㈜ 김명량·이현철 대표를 비롯해 황명석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손병일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 등이 참석해 지역 아동 복지 향상을 위한 뜻깊은 나눔을 함께 축하했다.

    2026-05-26 16:49:34

  • 매화축산(주), 달서구에 이웃사랑 후원금 200만원 기탁

    매화축산(주), 달서구에 이웃사랑 후원금 200만원 기탁

    대구 달서구(구청장 이태훈)는 매화축산(주)(대표 김형식)으로부터 지역 내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이웃사랑 후원금 200만원을 기탁받았다고 26일 밝혔다. 매화축산(주)은 달서구 소재의 육류 가공·도매업체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나눔 실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김형식 대표는 "지역사회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후원을 결정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수익의 일부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나누며 따뜻한 나눔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2026-05-26 16:49:13

  • [법도 문학도 아닌] 두 바나나 이야기

    [법도 문학도 아닌] 두 바나나 이야기

    오래전부터 실업 상태인 한 부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일 좌판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아들은 다양한 과일 가운데 값이 비교적 싼 바나나를 발견하고는 부모에게 바나나 한 개만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딱 한 개면 된다고 했다. 가난한 부모는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어봤지만, 그것으로는 바나나 한 개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제로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과일 좌판 앞을 지나쳐야 했다. 아이는 목을 놓아 울었다. 아이는 아주 오랫동안 바나나 맛을 보지 못했다. 바나나가 어떤 맛이었는지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크게 상심한 아이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이가 계속 울음을 그치지 않자 짜증이 난 아버지가 아이를 한 대 때렸다. 아이가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울어대자 엄마가 달려와 아이 아빠를 나무랐고, 부부 사이에는 말다툼이 벌어졌다. 말다툼은 격렬해졌고 '바나나'를 외치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아이 아빠는 문득 사는 것이 슬퍼졌다. 슬픔은 곧 원망으로 변했고 그는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능을 원망하고 직업도 없고 수입도 없어 바나나 하나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의 작은 소원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이 원망은 결국 그를 아파트 난간으로 몰고 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던지게 했다. 어린 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바나나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 엄마는 그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내 목을 매고 말았다.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나오는 '바나나' 이야기다. 30대 홍콩 암호화폐 사업가 저스틴 선이 은색의 덕트 테이프로 벽에 붙여진 바나나를 떼어내 먹는다. 202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87억 원으로 판매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이다. 낙찰자는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롤 각각 한 개, 바나나가 썩을 때마다 이를 교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치 안내서, 진품 인증서를 받게 된다고 한다. 저스틴 선은 "이것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 밈, 가상화폐 커뮤니티의 세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라며 "이 작품은 미래에 더 많은 생각과 토론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 또한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 믿는다."라고 했다. 영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가격은 알지만, 어떤 것의 가치도 모른다."라고 했다. 그가 말한 '요즘'은 19세기 말이었지만, 요즘 사람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풍을 가거나 입원했을 때나 겨우 맛볼 수 있었던 그의 바나나 한 개와 언제고 한 송이에서 뚝 떼어먹던 그녀의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은 같지만, 그 가치는 같을 수 없다. 그는 현재 대기업 임원으로 남부러울 것 없지만 그 바나나 한 개의 가치 체계는 여전히 그의 내부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버리는 양이 더 많아 보이는 음식들도 불편하고, 그게 그거 같은 쌓이는 옷이며 가방도 불편하다. 그가 뭐라도 이에 대한 불평을 얘기할라치면 그녀는 대뜸 '당신은 취향이 너무 후져', '인제 그만 컨츄리스타일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지 않아'라고 핀잔을 준다. 불편함은 먼지처럼 소리 없이 쌓이지만, 평소에는 그 정도에서 그렇게 넘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노모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여동생에게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동생은 그녀가 알아차리기 전에 금방 갚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노모와 여동생을 외면할 수 없다. 그는 몰래 돈을 융통해준다. 결국, 그가 우려하던 사태는 벌어지고야 만다. 돈의 액수가 적지는 않다. 그도 모르지 않는다. 그녀는 신뢰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는 생각한다. 그녀가 사들인 쓸데없는(?) 물건들의 가격에 비하면 많지 않은 액수이다. 그의 불편함은 폭발하고, 그녀의 사치와 낭비에 대한 맹폭이 시작된다. 바나나 한 개는 이렇게 그와 그녀의 이혼 법정에 있다.당신의 바나나 한 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2026-05-22 14:30:00

  •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21>내우외환(內憂外患),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21>내우외환(內憂外患), "내부의 근심과 외부의 걱정"

    "환율 1500원대…전자업계 내우외환; 중동사태·노조리스크 '내우외환'; 미국 경제 '내우외환'…" 여기저기서 '내우외환'이란 말이 들린다. 중동사태 및 글로벌 지정학적 불안으로 고유가, 환율 문제 등등 나라 안팎으로 모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은, "안 내, 근심 우, 바깥 외, 걱정 환"으로, '내우: 내부의 근심'과 '외환:외부의 걱정'을 합한 말이다. '우(憂)'는, 큰 머리(頁)가 무겁게 위에서 심장(心)을 짓누르는 모습으로, 자기 내부의 마음이 재난에 앞서서 겪는 심리적 우려(憂慮)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내란(內亂)'처럼 내부 반란을 포함하기도 한다. 반면 '환(患)'은, 꼬챙이(串)가 심장(心)까지 관통하는 모습으로, 외부의 현실적 재난으로 인해 고생을 겪는 구체적인 환난(患難)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우와 환을 합친 '우환'이란 말이 있다. 예컨대 『주역』 「계사전・하」에 "주역을 지은 사람은 아마도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作易者, 其有憂患乎)"처럼, 우환은 중국 고대 사회의 내적 외적 곤경 상태를 말한다. 타이완의 학자 머우쭝싼(牟宗三, 1909~1995)은 유교의 우환 의식을 기독교의 '원죄 의식', 불교의 '고(苦) 의식'에다 대비하여 설명한 바 있다. 유교 사회에서는 신을 대신해서 우환이라는 무의식이 전전긍긍 자기 자신을 다잡게 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내도록 만들었다. 한편, '우-환'을 '내-외'와 짝지어 비로소 '내-우, 외-환'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먼저, 춘추시대 각 나라에서 발생한 일을 나라 별로 정리한 역사서 『국어(國語)』의 「진어(晉語)」에서다. 즉 "성인(聖人)의 경우에는 '외부의 걱정(外患)'도 없고 또한 '내부의 근심(內憂)'도 없다. 그러나 일반인의 경우엔 '외부의 걱정'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내부의 근심'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이어서 전국시대부터 전한 때까지 걸쳐 편찬한 『관자(管子)』의 「계(戒)」에도 보인다. 즉 "군주가 조정 밖(外舍)에 머물면서 연회 접대받지 않는 것은 '외부의 걱정(外事/外患)'이 있거나 '내부의 근심(內憂)'이 있다"라는 맥락에서다. 하지만 이 두 책에서는 아직 '내우외환'이라는 사자성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중국에서 '내우외환'이라는 네 글자가 등장하는 것은 어디인가? 먼저 청대 팡바오(方苞, 1668~1749)의 「형자도희묘지명(兄子道希墓誌銘)」에서다. 즉 "그때 아우와 누이는 모두 어렸고, '내부의 근심과 외부의 재난 속(內憂外患)'에서…"처럼, 개인의 불운한 처지를 묘사할 때 쓰였다. 이후 청대의 문학가 쩡푸(曾樸, 1872∼1935)의 소설 『얼해화(孽海花)』제25회에서도 보인다. 즉 "이때 '내부의 근심과 외부의 걱정(內憂外患)'이 줄이어 닥쳐오자…"처럼, 청대 말기의 위태로운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다.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시달렸던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내우외환이란 말이 등장했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집에, 아울러 구한말과 근대기의 신문, 잡지 등에 빈출한다. 한마디로 삼천리 방방곡곡이 내우외환의 땅이었던 탓. '진도아리랑'에서 노래했듯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수심(愁心)도 많다"였다. 저 하늘의 잔별마저도 모두 '수심'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가슴 속의 수심은 늘 저 하늘의 반짝이는 잔별과 가만히 조응하고 있음을 본다. 이 풍진 고개를 잘 넘어서면,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 희망도 많다"라는 노래로 다시 이어지는 법. 내우외환, 바로 그 자리가 '희망'의 터가 되리라.

    2026-05-22 14:30:00

  • [소야의 대중가요 문학을 품다]<11>기생 홍도와 '화류춘몽'

    [소야의 대중가요 문학을 품다]<11>기생 홍도와 '화류춘몽'

    기생이 되어 돈을 벌기는커녕 심신이 망가지고 빚만 늘어나기 십상이었다. 화류계 여성의 순정과 희생조차 비극적인 결말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유부남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가 미혼 남성일지라도 부모의 결연한 반대가 예정된 시절이었다. 그 어떤 명분과 맹세도 화류계 출신이라는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버림 받은 기생들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서구적인 자유연애 사상은 식민지 조선의 신세대들에게도 낭만이었다. 하지만 기생과 순애보적인 사랑에 빠졌다가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사(情死)라는 막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비련(悲戀)의 실제 사례가 1920,30년대에 발생한 평양 기생 출신 강명화와 카페 여급 출신 김봉자 사건이었다. 강명화의 상대는 갑부 집안의 외아들이었고, 김봉자의 상대는 유부남 의사였다. 신소설의 선구자인 이해조가 쓴 '강명화실기'는 새로운 사조(思潮)와 전통적인 가족 질서의 격렬한 충돌이 빚은 파국을 다룬 작품이다. 강명화의 이야기는 최찬식과 현진건 등의 작가도 소설로 다뤘다. 비극적인 사연은 문학과 연극, 영화와 노래의 소재로 인기를 끌며 적잖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기생의 애환을 다른 대중가요로는 '홍도야 울지마라'와 '화류춘몽'이 대표적이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울지마라'(1939)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신파극의 주제가였다. 당시 스무살의 김영춘이 불렀다. 이 노래는 강명화의 사연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화류계에 몸담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시집에서 쫓겨나고 남편에게 배신을 당한 기생 홍도의 이야기이다. 노랫말 속의 화자 또한 당사자인 홍도가 아니라 오빠이다. 악극에서도 홍도는 북받치는 회한으로 오열하고 오빠는 탄식의 노래를 목메어 부른다. 일제강점기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남매의 기구한 사연이다.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화류춘몽'(1940)은 기생이 스스로의 애환을 토로하며 설움에 겨워 부르는 비가(悲歌)이다. 노랫말의 말미를 장식하는 독백체의 탄식은 기생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어쩌면 우리네 사연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작사가 조명암의 탁월한 언어조탁 능력이 일제강점기 화류계 여인들의 서러운 삶을 그렇게 실감나게 그려낸 것이다. '화류춘몽'은 발표와 동시에 장안을 출렁거리게 했다. 노래를 듣고 기생들이 비관한 나머지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파장까지 몰고왔다.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가련한 영혼들을 위한 조사(弔辭)가 된 것이다. 그것은 화류계 여성의 탄식이자 서민 대중의 항변이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무력에서 벗어날 수 없던 현실과 공명(共鳴)하는 신파적 비극미로 승화되며 식민지 지식인의 가슴을 저미기도 했다. 홍도는 '사랑을 팔고 사는' 삼류 기생은 아니었다. 지탄을 받아야 할 대상은 오히려 '명예와 지조를 팔고 살던' 지식인과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노랫말 2절의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이란 문구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2026-05-22 14:25:00

  • [임무상의 1957 그림일기]5월 13일 월요일/5월 18일 토요일

    [임무상의 1957 그림일기]5월 13일 월요일/5월 18일 토요일

    ◆단기 4290년(1957년)5월 13일 월요일 맑음…(중략)점촌(店村) 극장(劇場)을 향하여 영화 구경 갔다. 모두 자리에 앉으니 영화는 곧 시작하였다. 벌써 점촌중학교 학생(學⽣)들은 와 있었다. 영화는 우주 모험으로 재미있게 영화를 감상한 뒤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점촌 장(場)이어서 "런닝셔츠"를 샀다. 그리고 집에 와 점심을 먹고 처음으로 물을 져 봤다. 보기에는 어려워 보였으나 져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을 지고 나서 방에 들어와 그림을 그리다가 태욱(泰煜)이네 집에 가 머리를 깎고 집에 와 저녁을 먹었다. ◆단기 4290년(1957년)5월 18일 토요일 비온 뒤 갬 …(중략)조회(朝會)를 마치고 공부시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밖에는 아침부터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아직도 개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모두 내일 날이 좋기를 축원하는 것 같아보였다. 오늘은 이번 주일(週⽇)내에서 제일 열심히 하였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학과목 생활 열심히 끝마친 뒤 비가 조금씩 내려 내일(來⽇) 할 운동연습을 하러 운동장에 나갔고 나와 정호(定鎬)는 뒷 교사에 가서 아이들 청소와 떠드는 것 등을 지켰다. 아직도 비는 계속적(繼續的)으로 내리고 있었다. 오늘 학교생활을 완전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 점심을 먹고 공부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나서 밖에 나가보니 반갑게도 햇님이 구름을 쫓아내고 푸른 하늘에서 온 세상 비추고 있었다.

    2026-05-22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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