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선인장이야기(42)

주희 엄마는 아파트의 동, 호수를 가르쳐 주며 꼭 한번 놀러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내 등를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주희네 집을 찾아갈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우리 집 창문에 밝은 햇살이 비쳐들면나는 꼭 주희네 집을 방문해 그때 참 고마웠다고 뒤늦은 인사를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무심히 흘러가는 달에게 가만히 빌었다. 앞집 소영이가 또랑또랑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까만 눈을 들어 점점이 뿌려진악보를 보면서 청승맞게 쳐대는 외손녀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지켜보는 노부부의 마음이 어떨까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딸을 잃은 슬픔은 어떤 빛깔일까. 나는 앞집 할머니의 주름지고 수심어린 얼굴을 대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불현듯 솟구치곤 했다.[승혜야, 너 신라의 달밤 한번 쳐 봐라]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시면 아버지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경주가 아버지의 고향이어서 그럴까. 그 노래를 제대로 부르시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는 막연히 그 노래를 좋아하셨다.

[그런 노래를 치면 피아노가 욕해요]

내가 짐짓 무람없이 굴면 아버지는 내 목을 가볍게 껴안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너?]하며 내 코를 잡고 짤짤 흔들대시던 아버지. 술을 드시면 씀씀이도 좋아 어머니 몰래 살짝 불러내어 만원짜리 지폐를 슬쩍 쥐어주시던 그런 아버지가 왜 저 모양으로 허물어져 버렸을까. 피아노를 안 쳐 본 지도 오래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벌써 두달이 넘었다. 그때 얹어둔 {굿모닝 팝스}2월호는 아직도 피아노 위에 방기되어있었다. 나는 무릎깍지 낀 손등 위로 살포시 얼굴을 묻으며 도이 달라스의{응크리고 앉은 아폴로디테}도 이런 모습의 조각이 아닐까, 하고 곱새겼다.차츰 계단의 야기가 내 엉덩이를 타고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밖이 차지 않니?]

이윽고 아버지가 죽을 다 드신 모양이었다. 등 뒤로 작은오빠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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