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은퇴 없는 정치

앨 고어는 7선 하원의원과 3선 상원의원을 지낸 아버지, 여성 법률가인 어머니를 둔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자신은 하원 4번, 상원 2번의 의정 경력을 쌓고 클린턴 정부에서 두 번이나 실세 부통령을 지냈다. 준비된 대통령감이었다. 2000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거의 백악관에 들어선 듯 했다. 강한 추진력과 높은 도덕성은 상대 후보 부시를 압도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고어 편이 아니었다. 전국 유권자 득표에서 54만 표를 더 얻고도 선거인단 확보에서 진 것이다. 각 주(州)에서 1위 후보가 선거인단을 싹쓸이하는 게임인 미국 간접선거의 특성 때문이었다.

고어가 돋보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 와중에 플로리다주에서는 선거 부정이 드러나 재검표가 진행 중이었다. 투표 용지가 문제투성이였다.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중대사태였다. 그런데 연방 대법원은 재검표 중단을 명령했다. 위헌이라는 이유였다. 판결의 논리가 얼마나 모호했으면 언론마다 보도가 달랐다. 고어로서도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깨끗이 승복했다. 그는 "미국의 법치는 위대하다"며 "부시 당선자에게 신의 축복을 빈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헌정 중단의 혼란을 막은 것이다. 그런 고어에게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라는 동정 여론이 쏟아졌다.

고어는 패배 선언 후 정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환경전도사로 변신해 지구촌을 누볐다. 올해는 지구온난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 제작자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노벨평화상까지 안았다. 다시 인기가 치솟고 출마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언론이 최고의 민주당 후보라 부추기고, 할리우드 스타들이 집단지지를 하고, 카터 전 대통령이 출마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고어는 2004년처럼 이번에도 꿈쩍 않았다.

17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큰 뜻을 이루려는 내 꿈은 쉼 없이 커질 것"이라 했다. 세 번째 실패한 이회창 후보는 다시 신발끈을 조이고 있다. 5년 전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이번에는 보수신당을 만든다며 세력을 모으는 중이다. 대권 삼수생인 민주당 이인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역시 "백의종군"을 외칠 뿐이다. 아무도 은퇴를 꺼내지 않고 있다.

시인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시인의 통찰보다 못한 정치 판이다.

김성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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