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일본의 겨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함께

고선윤 백석예술대 교수

고선윤 백석예술대 교수
고선윤 백석예술대 교수

"12월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함께."

이런 말을 하면 클래식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좀 멋지게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일본의 연말은 너나없이 베토벤의 '합창'으로 마무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려한 콘서트홀만이 아니라 동네 초등학교 강당에서도 연주를 하니 말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을 '합창'이라고 하는 것은, 4악장에서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인 합창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고통을 극복하고 환희로, 그리고 모두가 형제가 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유와 희망, 화합과 인류애의 메시지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하나가 되어서 만들어내는 음악은 연말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감동이 있다.

일본은 1940년 12월 31일 오후 10시 30분 '일본 건국 2천600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신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이 이 곡을 연주했다. 라디오에서 생방송되었는데, 그 종료 시각이 정확히 0시였다. "독일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 '합창'을 연주하고 연주를 마침과 동시에 새해를 맞이하는 관습이 있다"는 일본 방송협회 직원의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기획이었지만, 이후 일본에서는 연말에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여하튼 이제는 일본의 연말을 이야기할 때 베토벤의 '합창'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클래식협회 다나카 야스시 이사장은 "새해 떡값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재미있는 말을 했다. 1947년 연말 NHK 교향악단의 '합창' 연주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베토벤의 '합창'만은 표가 매진되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악단 연주자들의 새해 떡값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표가 확실하게 팔리는 곡을 연주해야 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합창단이 있다는 거다. 약 200명의 합창단원이 참가하면 그들을 응원하기 위한 친구와 가족이 찾아오는데, 한 사람당 10명 정도로 봤을 때 약 2천 명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 역시 납득이 되는 이야기다.

시대가 바뀌면서 베토벤의 '합창'도 바뀌었다. 일본에서 연말의 '합창'은 이제 감상하는 작품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토리 그룹 후원으로 매년 연말 오사카성에서 연주되는 '산토리 1만 명의 합창'이다. 일반 공모로 구성된 초등학교 1학년부터 93세까지의 남녀노소 1만 명이 매년 12월 첫째 일요일에 오사카성 홀에서 '함께 노래하는 기쁨'에 빠진다. 세계 최대 규모의 베토벤 '합창'을 360도 영상으로 보고 있으면, 나도 마치 그 자리에서 노래하고 있는 착각에 빠지고 넘치는 박력에 압도된다.

참가자는 일본인만이 아니다. 클래식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일본어는 모르지만 감동은 함께하고 싶다면서 참가하는 이가 있다. 아빠와 아들이 같이 참가해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1년 중 364일은 이 하루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는 이도 있다. 5월에 인터넷으로 접수하고 7월에 추천해서 8월부터 레슨을 시작한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1년에 한번 노래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감동을 나눈다.

1983년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38회를 맞이했다. 코로나19로 외국인 입국을 제한하고 있는 이 시국에도 12월 5일 오후 3시부터 4시 30분까지 진행되는 연주를 유튜브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1천300명이 넘는 합창단의 동영상을 편집해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맞추는 모습은 역시 웅장했다. 올림픽도 할지 안 할지 고민하지 않았던가. 참 많은 공연이 취소되고 연기되는 가운데 굳세게 이어나가는 행사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힘차게 연주되는 것 같다. 2011년 후쿠시마 대지진 때도 '희생자를 기리고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자'면서 보다 성대하게 연주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일본 전국의 유명한 악단만이 아니라 마을의 작은 악단도 '합창'을 연주한다. 악단이 아니라 '합창'을 위한 음악 동아리도 있다. 이렇게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서 겨울 '마쓰리'(축제의 일본말)가 되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이 겨울에도 그들은 '합창'과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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