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고소득층을 위한 감세(減稅)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에 따라 2023~2024년 세수(稅收)는 16조원 이상 줄었다. 자녀 증여 시 공제 한도를 10배로 확대하고,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에서 40%로 낮췄다. 법인세 최고세율도 25%에서 24%로 인하했다. 금융투자소득세는 도입 직전 유예됐고, 종합부동산세와 증권거래세는 완화 내지 인하됐다. 방향이 분명했다. 부자의 부담을 덜어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믿음이었다.
이재명 정부는 빚 탕감을 대표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7년 넘게 갚지 못한 5천만원 이하 무담보 채무가 그 대상이다. 수혜자가 113만명, 규모는 16조원이다. 중위소득 60% 이하이고 재산이 없으면 원금이 모두 탕감(蕩減)된다. 그 외 채무자는 최대 80%까지 감면, 나머지 20%는 나눠서 갚을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중위소득 이하,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이 연체한 빚은 별도 기금을 통해 지원한다. 이재명 정부도 방향이 명확하다. 서민의 숨통을 틔워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생각이다.
두 정부는 재정정책의 철학과 방향에서 뚜렷하게 갈린다.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는 '공급 측면 경제학'에 바탕을 뒀다. 이재명 정부의 빚 탕감은 '케인스 경제학'의 연장선 위에 있다. 전자는 '엘리티즘', 후자는 '포퓰리즘'을 지향한다. '엘리티즘'이 성장과 효율성을 앞세운다면, '포퓰리즘'은 분배와 형평성을 우선시한다.
부자 감세는 '낙수 효과'를 기대하는 정책이다. 고소득층 세금을 줄이면 투자와 고용이 늘고, 그 혜택이 서민에게 간다는 논리다. 그러나 '낙수 효과'는 실증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2012년 미국 캔자스주가 대규모 감세를 시행했으나, 세수가 급감했고 성장률은 미국 평균에 못 미쳤다. 결국 주의회가 초당적(超黨的)으로 감세 정책을 폐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분석 결과도 이와 유사하다. 상위 10% 또는 1%에 대한 감세는 저소득층 소득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공공서비스 축소로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빚 탕감은 '마중물 효과'를 염두(念頭)에 둔 정책이다. 저소득층 빚을 덜어주면 소비가 회복돼서 기업 매출과 투자, 고용이 증가한다는 이론이다. 소비 여력을 되살려서 수요를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이를 '유효수요'라고 했다. '마중물 효과'가 현실에서 입증된 사례는 많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코로나19' 시기에 현금 지원과 실업급여가 국내총생산을 4%포인트 이상 끌어올렸다고 분석했다. 또한 불황에는 재정지출의 '승수 효과'가 1.5 이상이라는 연구 결과도 제시했다. OECD도 '코로나19' 대응에서 감세보다 직접 지출이 낫다고 봤다.
우리 사회는 부자 감세에 관대하면서도 빚 탕감에는 인색하다. 빚진 사람은 무능하거나 게으르고, 갚지 않는 건 무책임하다는 인식이 있다. 빚 탕감은 무책임을 용인(容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빚을 갚은 사람에 대한 역차별이며, 상대적인 박탈감을 준다는 주장도 나온다. 반면 부자 감세는 쉽게 받아들여진다. 부자가 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논리가 작용하고, 언젠가는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서민도 부자 감세를 지지하게 된다.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는 가시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의 빚 탕감은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현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를 전제로 비판하면 안 된다. 부자 감세는 '투자 유인', '경쟁력 강화' 정책으로 포장됐다. 빚 탕감에는 '세금 퍼주기', '도덕적 해이' 낙인(烙印)이 찍혔다. '성장 우선주의' 프레임이 여론을 지배한 결과다.
누가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 다른 사람은 50데나리온을 빚졌는데, 둘 다 갚을 길이 없어 모두 탕감해 주었다." 이 구절은 단순한 종교적 교훈을 넘어선다. 핵심은 얼마를 빚졌는가가 아니라 갚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저소득층 빚도 대부분 생계형(生計型)이다. 그들이 빚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소비가 움츠러들고 경제는 바닥부터 식는다.
빚 탕감은 관용(寬容)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의 문제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설 기회가 필요하다. 부자 감세에 관대했다면, 빚 탕감에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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