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천 년을 꿈꾸는 장수목, 느티나무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의 천년 느티나무.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아름다운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랜 건물임이 틀림없다'

1994년에 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 나오는 글이다. 경북 영주시 부석사에 있는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오래된 고려 목조 건축물의 백미다. 유명한 배흘림기둥이 있고 그 재료는 바로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배달민족과 함께 살아온 친숙한 나무다. 시골 마을마다 느티나무가 없는 마을은 거의 없을 정도이니 수백 년간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나무가 적지 않다.

초목이 움트고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에 느티나무는 주변의 예쁜 봄꽃들과 잘 어울리는 새싹을 내밀어 생명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수많은 나무 이파리들이 겹겹으로 햇볕을 막아줘서 그늘 아래 동네 어른과 아이들은 더위를 피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자나무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풍이 드는 가을에는 빨갛거나 노란 색의 향연을 펼치고, 초목이 깊은 휴식에 들어가는 겨울 노거수는 주변에 하얀 눈이라도 쌓이면 한 폭의 멋진 풍경의 주인공이 된다.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는 수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그리움의 고향이다. 수백 년을 혹은 1천 년 이상을 거뜬하게 사는 나무이기에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 혹은 제당의 나무로 여겼다. 잎과 가지 어느 하나도 마음대로 건드리지 못했지만 늘 가까이에서 친하게 지내던 시골의 대표적인 나무다. 몇 아름의 줄기에서 굵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고 작은 가지가 팔방으로 퍼져 멀리서 보면 나무 실루엣이 예전 초가와 닮은 듯하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는 큰 줄기의 속이 비어 있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의 천년 느티나무.

◆소원을 빌던 나무

느릅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으로 높이가 20~30m의 거목으로 자라는 느티나무는 잎이 긴 타원형 또는 달걀모양으로 서로 어긋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바람에 의존해서 수분하는 풍매화인 느티나무 꽃은 암수 한 그루로 4~5월에 꽃이 핀다. 새로 나온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암꽃은 위쪽에 피고 수꽃은 아래쪽에 피지만 사람들 눈길을 확 끌지 못한다. 열매는 10월쯤에 납작하고 둥근 모양으로 익는다.

볼품없는 느티나무 꽃에도 '운명'이라는 거창한 꽃말이 붙어 있다.

느티나무는 주목, 은행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수명이 가장 긴 3대 장수(長壽) 나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외심을 갖고 바라본다. 세월이 흘러 당산목이 되면 '소원을 들어 준다'는 믿음까지 얻게 된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면 온갖 우환을 가진 사람들이 간절함으로 두 손을 모아 느티나무 앞에서 치성을 드린다. 이런 전설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느티나무 노거수다.

경북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의 600년 된 느티나무에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과학의 시대에는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전설의 시대에 살아온 백성들은 그런 행동을 문화나 신앙으로 여겼다.

◆보호수 중에서 가장 많아

2021년 말을 기준으로 전국 보호수는 1만3천850여 그루가 지정돼 있으며, 이중 느티나무가 전체의 52%인 7천270여 그루로 가장 많다. 장수목이고 흔하다는 방증이다.

2020년 기준으로 경상북도 시·군보호수 2천여 그루 중에서 느티나무가 980여 그루로 가장 많다. 보호수 중에서 300여 그루를 골라서 스토리텔링한 나무에도 느티나무가 70여 그루를 차지해 비중이 가장 높다.

그뿐만 아니라 경북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세 그루 있다.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영주시 안정면 단촌리,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에 당산목으로 터를 잡고 있다.

경북 예천군 보호수인 호명면 본리의 600여 년 된 느티나무는 잎이 피는 상태를 보고 주민들이 흉년과 풍년을 점 쳤다고 한다. 최걸(崔傑)이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할 때부터 봄에 꽃이 일제히 피면 풍년, 2~3번에 걸쳐 피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온다. 성주 지방리의 쌍둥이 당산목 느티나무도 매년 봄철에 새잎이 피는 모습을 보고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했다.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느티나무도 마을 당산목으로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나무로 통했다.

수리 시설이 부족한 옛날 봄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풍부하면 고목의 새잎이 한꺼번에 잘 돋고 가물어 물이 부족하면 새잎이 여러 번에 걸쳐서 나오기 마련이다. 나무의 상태를 보고 사람들이 기후를 짐작한 것이지 나무가 신통력을 가진 건 아닐 것이다.

느티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고 친숙하게 여기는 나무다. 소나무가 겨울이 되어도 푸른색이 변치 않는 힘찬 기상과 꼿꼿한 선비정신을 대변한다면, 느티나무는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어머니의 푸근하고 따뜻한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나무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에 있는 느티나무에 단풍이 들어 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의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는 큰 줄기의 속이 비어 있다.

◆느티나무의 다양한 쓰임

느티나무의 쓰임은 소나무와 어금버금하다. 오동나무, 먹감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우량 목재로 손꼽히는데 나뭇결이 곱고 황갈색에 윤이 약간 나며 무늬가 뛰어나다. 건조를 할 때 갈라지거나 뒤틀리는 게 적을 뿐만 아니라 좀처럼 썩지도 않고 마찰이나 충격에도 잘 견딘다. 천년 고찰의 기둥과 같은 건축재, 불상, 사리함, 고급 가구, 조각 공예품, 악기, 농기구 자루, 선박용 재료 등으로 폭넓고 다양하게 쓰였다. 특히 신라 고분인 천마총의 관재로 쓰여 임금의 저승 길을 함께했다.

앞에서 언급한 부석사 무량수전뿐만 아니라 김천 직지사의 일주문 같은 큰 절에 있는 아름드리 기둥이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항간의 소문이 있었지만 조사한 결과 느티나무로 밝혀졌다. 이는 사리함을 만들었던 느티나무를 '사리나무'로 부르다가 보니 엉뚱하게 '싸리나무'로 와전된 게 아닌가 싶다. 또 큰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수백 명이 먹을 밥을 담는 '구시' 역시 자재가 느티나무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에 있는 느티나무에 단풍이 들어 있다.

◆'뿌리 깊은 나무'의 본보기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鳧池里)에 나이가 1천 년으로 알려진 느티나무가 마을 개울가에 있다. 경주 최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5세손인 최제안(崔齊顔)이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년) 때 '씨족의 표목(標木)'으로 심었다고 한다.

2016년에 발생한 규모 5.2의 경주 대지진 진앙인 부지리에서 천재지변을 겪고도 넉넉한 녹음을 자랑하고 있다. 그야말로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 좋고 열매 많으니…'의 본보기다. 부지리의 느티나무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낯가림 없이 자라는 노거수 느티나무는 적어도 수백 년, 길게는 1천 년 이상의 세월과 자연재해를 극복한 '뿌리 깊은 나무'다.

경상북도의 도목(道木) 역시 느티나무다. 장수목이며 번식력이 강해 도민의 번영과 적응력을 상징하고, 어떠한 역경과 난관도 이겨나가는 끈기와 저력이 도민의 기상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2000년을 출발하면서 산림청에서는 21세기 새 천년을 상징하는 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했다. 느티나무의 역사성과 문화, 수명이 고려돼서 '밀레니엄(millennium) 나무'에 뽑히는 영광을 차지했다.

우리가 무심히 바라본 한 그루의 느티나무는 살아서는 천년을 꿈꾸고 죽어서는 도량(道場)의 든든한 배흘림기둥으로 보시하는 또 다른 천년을 그리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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