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수희가 극단명처럼 오키나와 58번 국도를 일본 희곡으로 <접수> (2025, 작 베츠야쿠 미노루 別役実) 하더니 내리 5편의 일본 희곡을 무대화하는 속도감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 희곡을 전문으로 발굴해 번역 후 공연한다는 창단 취지도 그렇지만, 무대에서 설계되는 연출의 안정감이 달라지는 것도 그렇다. 무대에서 화려한 테크닉과 감각적인 미장센, 연출 구도보다는 배우로서 타인의 연기와 극 중 인물을 바라보는 연출적 시선이 '배우 우선주의'다. 그만큼 희곡을 온전하게 무대에 올려놓으려는 연출의 신호도 무대에 쌓이고, 무대 세트도, 배우들의 연기도 이러한 시선으로 극화된다. 다양한 극단들이 존재하지만, 창작극, 번역극, 공동창작 형식에서 다양한 혼종(混種)의 작품들이 무대화되고 있는 요즘, 연극계도 장르의 특성화 시대가 된 것 같다.

◇ 연극도 특성화 시대
제43회 서울연극제에서 연출상을 연극 <장소>로 수상한 변영진 연출은 자이니치(在日) 연극으로 특화했다. 평면적 무대를 장면 전환의 템포와 리듬, 배우들의 에너지로 변영진만의 자이니치 삶의 한국형'장소'를 보여주면서 23명 전원이 연기상을 수상했다. 국립극단에서 동승 시즌2인 <삼매경>을 준비하고 있는 이철희 연극은 특성화 연극의 원조격으로, <조치원 해문이> 부터 시작된 '충청도 연극 시리즈'로 이철희 연극만의 형식을 무대로 보여주고 있다. 줄기차게 B급 정서의 변방으로 흐르는가 싶더니, 특성화 연극으로 연극계의 주류가 되었다. 충청도 연극 시리즈의 특성화가 작가·연출적인 성공 요인이 된 셈이다.
요즘은 오픈런을 하는 코미디 연극들이 상업극으로 밀려나 있는데, <라이어>도 90년대 초반 한양레퍼토리의 <심바 세매>가 원작이다. 어설픈 소동극으로 웃음만 유발한다고 코미디 연극이 될 수는 없다. 탄탄한 짜임새를 갖춘 플롯과 극 중 인물의 캐릭터, 좌충우돌하면서도 정교한 설정, 웃음을 유발하는 반전과 흐름을 깨지 않는 즉흥의 기술, 그리고 마지막 핵심은 배우의 테크닉적인 코미디 감각과 치고빠지는 연기의 타이밍과 속도 조절이다. 몇 가지 특수한 재능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힘들다. 연기는 고도화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와 대사 몇 마디, 망가지는 캐릭터로는 '개인기로 폭삭 삭았수다'가 된다. 오픈런들은 구성대로 연기의 합을 맞추고 템포감만 조절하면 되지만, 정통희극은 범접할 수 없는 배우의 감각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희극연기의 고도화다.
전통 코미디(희극) 연극 하면 고인이 되신 최정우, 이도경, 그리고 전통 코미디 연극의 정점인 '맹구'로 알려진 배우 이창훈이다. 이들은 희극연기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데, 1980년대 故 김상열 연출로 세실극장에서 올려졌던 번역극 중 전통 코미디 연극이 많았고, 이 세 명의 배우가 그 원조인 셈이다. 특히 그 시절 <열쇠와 자물쇠>에서 보여준 이창훈 배우의 희극연기는 포복절도 수준이었다. 무겁고 진지하면서도 변화무쌍한 표정과 말투, 완벽한 캐릭터, 툭툭 치고빠지면서도 근엄한 대사는 코미디화되고, 배우의 천부적인 희극연기까지 더해져 10초에 웃음의 미소를 짓게 하고, 20초에 도달할 때쯤 키득 소리가 나며, 30초에는 배를 잡게 만든다. 좌우로 막이 닫히는 커튼콜 때까지, 그 사이로 대머리 가발로 얼굴을 밀어 넣고 발가락을 흔들며 퇴장하는 순간까지도 웃음을 유발한다. 자연스러운 웃음이 한 방 터지면 통제가 되지 않아 아랫배가 탁탁해지는데, 연극 무대에서 이런 웃음은 이때 처음으로 경험했고, 이후에는 배꼽을 흔들어 놓는 전통 코미디(희극) 연극이 부재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 가족도, 연인도 아닌 수상한 공동체의 함수관계 <타인>
코미디 연극 이야기로 말이 길어졌다. 코미디 연극을 우왕좌왕 말하게 된 것은 극단 58번 국도의 고수희(나옥희) 연출 <타인>(他人)(작: 다케다 모모코 竹田モモコ, 나온씨어터) 때문이다. 웃음의 타이밍이 진지하면서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로 희극적인 요소를 잘 살려낸 작품이다. 코미디적 웃음은 크지만, 연극 <타인>은 젠더와 퀴어 정체성, 가족과 비혼 문화, 인간관계와 소통, 세대 간 갈등, 지역 불균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웃다 보면 남는 것은 기승전 "어, 재밌네"로 결론된다. 세 인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하는 비밀들이 밝혀지면서 '가족도, 친구도 아닌 타인과의 공존 생활기'를 코미디 감각으로 살려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타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작품의 핵심하다. 가족도, 연인도 아닌 수상한 공동체의 함수관계에서는 퀴어 감수성도 흐른다.
극 중 인물은 여성 세 사람이 등장하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이름만 소환되는 인물은 유우코다. 시골에서 도쿄에 사는 딸을 만나기 위해 올라온 하츠에(장연익 분), 그리고 아파트에서 하츠에와 동거 중인 나츠(정예지 분)는 레즈비언이고, 등장하지 않는 유우코도 동일한 젠더 성향을 지녔다. 유우미(박지원 분)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사랑을 느끼는 바이섹슈얼(Bisexual) 성향을 가졌다. 분위기 아시죠? 여기서부터 타인 간의 관계와 공감에 관한 이야기가 진지하면서도 웃음으로 빵빵 터진다. 무대는 일본 도쿄의 허름한 아파트가 배경이다. 통로와 현관은 무대 바깥 공간이지만 극중인물의 출입과 효과음(현관 벨, 열쇠 소리)으로 암시된다. 유우코가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한 뒤 세 사람이 가족도, 연인도 아닌 채로 어색한 동거를 일주일 동안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우코가 입원한 틈을 타 전 연인 나츠를 만나기 위해 유우미가 아파트에 오고, 나츠와 유우미 사이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될 즈음 하츠에가 등장한다.
관계가 밝혀질지 봐 당황한 유우미는 도쿄 외곽 시골에서 올라온 하츠에 앞에서 일본 도심 지역명을 아느냐고 묻고, 두 손으로 내비게이션을 보여주듯 삼각형, 세모, 원을 척척 그리며 건널목과 동네 가게 위치까지 맞추는'타인 디스'부터 웃음이 터진다. 당황한 유우미가 원샷으로 맥주 두 캔을 연달아 마시는 장면에서는"어머, 괜찮아, 괜찮은 거야"라는 관객반응이 터지고, 생수 500cc를 원샷으로 들이키는 장면에서는 웃음소리가 강렬하다. 태연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하는 캐릭터, 관계와 젠더 성향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소동들로 인해 웃음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절정의 장면은 유우코의 퇴원을 앞둔 시점이다. 두 사람(타인)의 젠더적 성향을 하츠에가 점차 공감해 갈 무렵, 유우미는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당황하는 레즈비언 나츠와의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흐른다. 여성 세 명의 삼각관계와 하츠에 사이의 장면들은 마치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웃음으로 엮어놓은 설명서 같다. 그리고 그 설명서의 핵심 테스트는 나츠와 하츠에의 딸 유우코의 관계가 밝혀지면서부터 시작된다.

◇ 타인을 이해하는'웃음 설명서'
유우미와 나츠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젠더적 정체성을 이해하게 된 하츠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쿨하게 받아들이고, 결혼까지도 괜찮다며 '타인 설명서'를 제대로 익힌 반응을 보여준다. 이 사이 유우코의 퇴원으로 삼각관계가 탄로 날까 작은 소동들이 이어지면서 웃음의 2탄이 이어지고, 나츠는 여전히 보수적인 집안에서는 동성 결혼을 할 수 없다며 갑자기 비혼주의자로 돌아선다. 유우미 역시 절대적 사랑이 아닌 관계 중심의 사랑에만 집착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우코의 성향을 받아들이고도 당황하는 하츠에 사이에, 유우코가 퇴원해 아파트로 오고 있다는 전화 한 통이 걸려 오고, 아파트는 좌충우돌 소동의 2라운드를 보여준다. 비밀스러운 삼각관계가 들통날까 봐 번지점프 예행연습처럼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마지막 장면에서 유우코의 등장이 조명으로 처리되며,'가족도, 연인도 아닌 수상한 공동체의 함수관계'는 타인을 웃음으로 이해하는 법으로 조용히 마무리된다.
나츠 역의 정예지는 영락없는 남성화된 레즈비언 캐릭터를 보여주고, 바이섹슈얼로 분한 박지원은 연극 <타인>에서 웃음의 속도를 높여준다. 고수희 연출은 배우 출신답게 연출적인 양념이나 테크닉을 부리기보다는, 희곡과 배우들의 연기로 승부하려는 작품답게 오랜만에 전통 코미디를 본 느낌이다. 타인의 이해는 낯선 관계와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보이지 않는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한일 수교 60주년 기념행사로, 일한국제교류기금 서울센터와 공동 제작된 공연이다. 일한 국제교류기금의 신진번역가 발굴프로젝트에서 선정된 임예성 씨가 번역했다. <라이어>처럼 제목을 바꾸고 완전한 일본 코미디극으로 방향을 잡아도 특화된 무대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진지해지는 장면을 약간 정리하고, 코미디로 레퍼토리 화해도 좋을 것 같다. 극단 58번 국도 고수희(나옥희)의 연출 작품으로는 <접수>, <이방인의 뜰>,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 <상대적 속세>, <해녀연심>이 있고 일본 희곡 번역으로는 <노인과 AI>, <카즈오>, <동경이야기> <오징어 지우개>가 있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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