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집시 여인·플라멩고·황금 제단…스페인 세비야

세계서 세 번째로 큰 세비아 대성당…80년 동안 제작 중앙 제단 '금쩍금쩍'

플라멩코의 도시 스페인 세비아.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그런데 그 춤이 슬프다. 다소 과장스럽지만 우리네 살풀이춤 같다.
플라멩코의 도시 스페인 세비아.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그런데 그 춤이 슬프다. 다소 과장스럽지만 우리네 살풀이춤 같다.

◆집시(Gypsy), 히타나(gitana), 롬(Rom)

세비야 담배공장 여공 카르멘이 노래한다. '사랑은 길들지 않는 새,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 하바네라(Habanera)다. '사랑은 집시, 법이라곤 알지 못하네.' 아름다운 집시 처녀 카르멘이 붉은 드레스 자락을 팔랑대며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한다.

좋든 싫든 자신과 상대를 파멸로 몰아넣는 무대 위 카르멘의 운명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객석에선 또 하릴없이 그 곡에 스며들고 마는데, 나는 그것을 모든 인류가 집시에게 매혹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안달루시아 과달키비르강가 세비야의 첫인상도 쿠바 무곡 아바네라에 맞춰 춤을 추며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던지는 카르멘의 그것과 흡사했다.

전 세계에서 집시가 없는 곳은 그린란드, 일본, 우리나라 세 곳뿐이어서 특히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 '낭만의 수호자'로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래 이집트계로 알려졌으나 언어학의 발달로 그들이 11세기 인도 펀자브에서 이동한 아리아계 민족임이 근대에 밝혀졌다.

80년 동안 제작했다는 세비야 대성당 중앙제단은 말 그대로
80년 동안 제작했다는 세비야 대성당 중앙제단은 말 그대로 '금쩍금쩍'거린다.

수장을 중심으로 약 100명 단위로 모든 짐을 마차에 싣고 국적도 주거지도 없이 세금도 내지 않으며 원시공산체계로 유랑하여 곧 부랑자, 전염병 매개체, 도둑의 이미지로 굳어졌고 당연히 원주민들의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다만 스페인에서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 8세기부터 1492년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가 무어인들을 축출할 때까지 기독교인들의 이베리아 재정복운동)를 도운 그들 일부는 히타나(gitana)라 불리며 안달루시아에 정착했다.

주로 서아시아와 특히 동남부 유럽을 유랑하며 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게 고난을 겪었다. 그나마 금융업과 상업으로 부를 거머쥔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사회적 입지를 다져 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현재까지 교육을 받지 않는 유랑생활로 취직도 못하다보니 소매치기 등 경범죄와 싸구려 물품 사기 판매를 거쳐 갱단이나 마피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수많은 집시들이 희생되었지만 지금까지 독일 정부의 별 다른 사죄도 받지 못한 상태다. 이러다보니 각 국가에 전쟁이나 경제 위기가 오면 반(反) 집시 폭동이나 추방 정책, 증오범죄에 노출되기 일쑤다. 이에 일부 부유한 집시들을 중심으로 롬의 깃발(Styago le romengo) 아래 존중받는 롬(Rom)으로 살아가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세비야엔 대낮에 켜진 백열등처럼 오렌지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세비야엔 대낮에 켜진 백열등처럼 오렌지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스페인 세비야의 오렌지와 세비야 대성당
스페인 세비야의 오렌지와 세비야 대성당

◆오렌지 정원의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1월의 세비야엔 대낮에 켜진 백열등처럼 오렌지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어릴 때 읽은 계몽사 동화 '오렌지꽃 피는 나라'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맡은 알싸한 슬픔이나 향수, 추억, 환희 같은 감정들이 오렌지나무 가로수 길을 지날 때마다 느껴졌다.

'나의 뽀르뚜까', '밍기뉴', '여기 내 가슴 속 새장이 텅 빈 것 같아', '서로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깊이 품고 있으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단다' 등 세비야대성당 오렌지 정원을 산책하면서 이렇게 나는 바스콘셀로스의 책 속 주인공 제제를 생각했다. 오렌지를 훔치러 간 제제와 너무나 가난한 제제의 아빠… 그래서 난 오렌지향만 맡으면 슬퍼지나 보다.

세비야대성당 첨탑에서 바라본 세비야대성당과 시내모습.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세비야대성당 첨탑에서 바라본 세비야대성당과 시내모습.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세비야는 고대부터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카이샤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일시적이나마 서고트왕국의 수도였으며, 베르베르인에 정복되었으며, 1269년까지 알모하드 조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현재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다음 네 번째로 큰 도시다.

세비야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르네상스 양식),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네오르네상스 양식)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고딕 양식 성당 중에서는 세비야 대성당이 가장 크다. 레콩키스타의 도시, 안달루시아인, 아랍인, 유대계 스페인인 그리고 집시들, 대성당의 희고 아름다운 이슬람식 히랄다탑을 바라보며 가무잡잡한 집시들의 얼굴과 플라멩코의 기원을 혼자 짐작한다.

80년 동안 제작했다는 중앙제단은 말 그대로 '금쩍금쩍'거린다.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대항해를 한 이탈리아 제네바 출신 콜럼버스의 유언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라.'를 존중한 스페인정부가 당시 4대 왕국이었던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의 왕들이 그의 관을 짊어지게 만든 묘도 웅장하다.

이 성당의 화려함은 이후 신대륙에서 약탈한 금으로 장식한 것일 터. 2020년 미국에서 집단 학살자로 지목된 콜럼버스의 동상이 무너뜨려지는 것을 볼 땐 이 묘의 화려함과 역사의 재조명을 다시 생각했다. 오렌지 정원을 거쳐 알카사르(Sevilla Real Alcázar) 페드로 1세 궁전의 별자리 천정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연못가 그로테스크 갤러리를 보니 가우디가 받았을 영감도 이해가 된다.

고풍스러운 마차를 타고 차도로 달려간 스페인광장은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다. 1929년 라틴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고풍스러운 마차를 타고 차도로 달려간 스페인광장은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다. 1929년 라틴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고풍스러운 마차를 타고 차도로 달려간 스페인광장은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다. 1929년 라틴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건물 양쪽은 히랄다탑을 본 따 만들었고, 건물 아래층 반원을 따라 타일로 장식된 곳은 스페인 모든 도시의 문장과 지도, 역사적인 사건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스타워즈 2: 클론의 습격, 나부행성의 도시 티드다. 아마딜라여왕의 분장이 집시풍이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플라멩코(Flamenco), 집시의 밤은 깊어가네

세비야 배경의 오페라는 비제의 '카르멘'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베토벤의 '피델리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등 셀 수가 없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젤소미나(La Strada),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Time of the Gypsies), 영국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도 집시의 메타포가 가득하다.

플라멩코의 도시 스페인 세비아.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플라멩코의 도시 스페인 세비아.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또한 보고 또 봐도 그림 속까지 따라 들어가 보고 싶을 만큼 화려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한 그 집시여인의 꿈마저 궁금할 지경이다.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 그들에게 관대한 안달루시아 세비야에는 분명히 예술가의 영감을 촉발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찰리 채플린은 자신이 집시의 혈통임을 엄청나게 자랑스러워했다하고 데미스 루소스 또한 집시였다.

아, 최근에 우리나라 이치현의 '집시 여인'을 대구 출신 시인이자 가수인 이솔로몬이 휘적 휘적 춤추며 부르던 모습이 이 글을 쓰는 순간 문득 떠오른다. 집시, 집시, 집시 여인, 밤에는 별 따라, 낮에는 꽃 따라 먼 길을 떠나가네. 그 여인들이 그날 스페인광장에서 캐스터네츠를 울리며 플라멩코를 추고 있었다.

플라멩코의 도시 스페인 세비아.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플라멩코의 도시 스페인 세비아.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샹그리아를 한 잔 마시고 산타크루스 지구 꼭대기에 있다는 플라멩코 공연장 로스 가요스를 향해 걷는다. 날씨도 적당하고 취기 또한 적당하다. 세비야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장이라더니 역시 입구부터 고색창연하다. 작은 무대 위에서 기타 연주에 맞춰 애절하게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칸테(cante, 노래), 토케(toque, 반주), 이제 바일레(baile, 춤) 차례다. 화려한 의상의 댄서가 등장하여 격렬하게 춤을 춘다. 그런데 그 춤이 슬프다. 다소 과장스럽지만 우리네 살풀이춤 같다.

캐스터네츠가 울리고 나비처럼 때론 폭풍처럼 남자 댄서와 무대를 바꿔가며 격정적으로 춤추는 늙은 여자 댄서까지 말 그대로 모두 플라멩코의 어원인 불꽃(flame) 같다. 작은 판자로 된 무대 위에서 무려 한 시간 동안 심오하고 장중한 비장미부터 자유분방하고 경쾌한 즐거움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이것이 시인 로르카가 그토록 찬양한 스페인의 두엔데(duende, 신들림)인가. 세비야의 밤은 깊어가고 나도 어느새 집시의 피 한 방울이 혈관에 스며들어 불꽃으로 산화(散華)된다. 안달루시아의 뜨거운 1월 밤하늘을 향해.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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