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미술' 선입견 깬 270개 벽돌…김용익展 ‘후천개벽: 아나와 칼’

새로운 시대 꿈꾸는 작가의 새로운 전시 방식
4월 21일까지 봉산문화회관 4전시실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 김용익전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 & Carl)'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 김용익전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 & Carl)'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김용익, 제목은 아직 고민중인 설치물의 계획도, 2023, 방안지에 색연필, 펜, 78.5×54cm.
김용익, 제목은 아직 고민중인 설치물의 계획도, 2023, 방안지에 색연필, 펜, 78.5×54cm.

전시실 중앙 바닥에 270개의 벽돌이 2단으로 편평하게 쌓여있고, 그 위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의문의 사건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전시실 한쪽 벽면에는 이 벽돌 설치물 구상을 위한 계획도가 가로 54cm, 세로 78.5cm의 방안지에 꽤 구체적으로 그려져있다. 피는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설치물에 담긴 뜻은 대략 어떤 것인지, 제목은 뭘로 할지 등 나름 치밀하게 준비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봉산문화회관 4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기억공작소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Carl)'은 김용익 작가의 개념적 접근과 실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그는 그간 현대미술의 어떠한 사조나 운동에 속해있지 않은 독자적인 작업들을 진행해왔다. 1974년 홍익대 서양화과 재학시절 발표한 '평면 오브제' 연작으로 국내외 유수 전시에 소개되고 모더니즘 미술의 총아로 조명 받았으나, 정작 그는 현실과 거리를 둔 모더니즘 미술의 한계와 폐쇄성에 실망해 모더니즘의 절대성, 완전성 등에 저항하고 균열을 내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양식을 전용해 편집하는 방식을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시각에 호소하지 않는 미술을 보여준다. 이게 작품이라고? 의문을 갖기 충분하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벽돌 설치 작품과 계획도 외에 작가가 직접 쓴 작가노트 텍스트, 작가와 큐레이터가 전시를 위해 주고받은 이메일 출력물, 택배 박스, 인터뷰 영상이 전시품의 전부다.

전시 준비 과정도 일반적인 전시와 달랐다. 전시 작품과 액자는 모두 우편으로 전시장에 도착했고, 작가로부터 작품의 개념을 텍스트와 드로잉으로 전달 받은 큐레이터가 직접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했다. 배송에 사용된 박스와 지관도 전시물로 사용된 뒤 전시가 끝나면 그대로 다시 우편으로 작가에게 보내질 예정이다. 270개의 벽돌 역시 전시 이후에는 원래의 쓰임새를 찾아간다. 최소한의 인적, 물적 자원으로 진행된 알뜰한 전시인 셈.

안혜정 봉산문화회관 큐레이터는 "완성된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시각적으로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뜻과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과 전시를 완성하기까지의 진행 과정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각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고 개념 자체에 집중하는 전시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전시라는 것이 결국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시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는 자기모순에 당착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와 큐레이터가 시각언어로만 소통했을 때의 의도치 않은 화음, 혹은 불협화음과 기존 전시 방식의 틀을 깨고자 했던 시도, 그리고 결과를 이번 전시를 통해 제시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 김용익전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 & Carl)' 전시실에 상영 중인 김용익 작가의 인터뷰 영상. 이연정 기자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 김용익전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 & Carl)' 전시실에 상영 중인 김용익 작가의 인터뷰 영상. 이연정 기자

다시 벽돌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품의 제목은 전시 제목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Carl)'과 같다.

그가 중요한 개념적 요소로 내세운 '후천개벽'은 말그대로 인류 문명 발생 후 5만년간 이어져온 '선천개벽' 시대가 저물고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양(陽)적인 것, 즉 남성이 음(陰)적인 여성을 누르는 형태로 존속돼왔으나 전쟁과 테러, 자연재해 등 말기적 징후를 보이고 있기에 이제 조양율음(調陽律陰·양과 음의 조화)을 이끌어내는 시대가 돼야한다는 것.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그는 "지구상의 위기는 남성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됐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돌봄과 호혜, 공동체를 우선하는 여성주의적 가치관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후천개벽의 시대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결국 이 벽돌 작품은 세계적인 미니멀리즘 조각가 칼 안드레와 그의 부인 아나 멘디에타의 얘기를 담고 있는데, 피로 상징되는 아나가 점점 벽돌의 중심, 즉 칼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듯한 모양을 보이며 남과 여가 동등한 예술가로 대접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새로운 전시 방식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작가의 작업이 관람객들에게는 다소 혼란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그가 직접 쓴 작가노트가 힌트를 주고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개념미술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미술이다'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지적인 호기심과 즐거움을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치 퍼즐 놀이나 숫자 맞추기 등 게임을 즐기는 마음 같은 것이다."

전시는 4월 21일까지. 053-422-6280.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