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억하고 싶은 날이 있나요?"…평범한 하루가 '기념일'이 되는 순간들

[책] 셋 세고 촛불 불기
김화진 외 7명 지음/ 은행나무 펴냄

'셋 세고 촛불 불기' 책 표지

매년 우리는 같은 날에 같은 이름을 붙인다. 생일, 기일, 첫만남. 이 날의 기억은 흐려져도 날짜는 남는다. 기념일이되면 우리는 그날의 분위기와 기억을 다시 꺼내 되새긴다. 그날에 대해 묻는 질문으로 소설 한 권을 채웠다.

'셋 세고 촛불 불기'는 김화진, 남유하, 박연준, 서고운, 송섬, 윤성희, 위수정, 이희주 등 8인의 작가가 함께한 소설집이다. 이들은 우리가 어떤 날을 '기념'한다는 행위에 담긴 복잡다단한 감정을 문학적으로 되묻는다. 각 이야기는 장르와 배경, 정조를 달리하면서도 '기념일'이라는 공통된 축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엮인다.

책의 제목 '셋 세고 촛불 불기'는 축하의 순간, 숨을 모으고 기도를 품으며 촛불을 끄는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 단순하고도 익숙한 행위는 지나온 시간을 인정하고 다가올 미래를 바라는 작고 진중한 제의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제의들에 주목한다.

'기념일' 관련 이미지. 게티이미지 뱅크

남유하 작가의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의 배경은 근미래, 인간의 정신이 기계에 업로드돼 안드로이드 바디로 살아가는 시대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 세계에서 주인공은 크리스마스라는 오래된 기념일을 보낸다. 축복의 본질을 되묻는 이 단편은 기념일이라는 주제에 대한 색다른 확장을 시도한다.

이희주 작가의 '0302♡'에서 주인공 유리는 전학 첫날인 3월 2일을 '기념일'로 기억한다. 유리는 그날 교실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 복도에 울리던 신발 소리, 낯선 얼굴들 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린다. 이 작품은 일상 속에서도 특별한 기억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박연준 작가의 '월드 발레 데이'는 예술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그린다. 세계 발레의 날 무대 위에서 죽음을 맞는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조차 기념일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장은 무대의 조명과 숨소리, 긴장된 발끝의 떨림을 실감나게 전하며, 무대 위에서 생이 사라지는 찰나를 장엄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기념일' 관련 이미지. 게티이미지 뱅크

위수정 작가의 '비트와 모모'는 반려견 모모의 생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살아 있는 동안 나누었던 일상들이, 시간이 흐른 후 '기념'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날 때의 아릿한 정서를 포착한다.

송섬의 '가장 빠른 축복'은 아이의 탄생일을 중심으로, 윤성희의 '바다의 기분'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맞이하게 된 날을, 김화진 작가의 '축제의 친구들'은 생일 파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책의 모든 작품의 중심에는 기념일이라는 키워드가 놓여 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각기 다르다. 누군가에게 기념일은 축제이고, 누군가에겐 애도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작가들은 '기념일'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소비하거나 장식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각 작품은 기념일을 통과점으로 삼아 인간의 정서와 삶의 리듬을 들여다본다.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타인의 기념일을 엿보는 동시에, 자기 삶의 중요한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셋 세고 촛불 불기'는 익숙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하루들을 고요히 불러내는 책이다.

은행나무출판사는 '바통' 시리즈를 통해 매년 동시대 작가들의 감각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내고 있다. 이전에 '우정', '초대', '나의 첫 번째' 등을 주제로 삼은 바 있으며, 이번 '기념일' 편은 그중에서도 가장 정서적인 울림이 깊은 작품집으로 손꼽힌다. 단순히 특별한 날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어떤 날을 기억하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을 문학적으로 되짚는다.

우리의 달력 속 수많은 날들 중 어떤 하루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저마다의 의미를 만든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 날을 떠올리며 각자의 달력에 점 하나씩을 찍게 될 수도 있다. 228쪽, 1만8천원.

'기념일' 관련 이미지. 게티이미지 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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