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수라상도 아니고 양반 밥상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백반보다는 융숭하고 잔칫상보다는 고졸(古拙)한 기품이 담겨있다. 그건 뭘까? 바로 '한정식'이다. 한국 한정식은 현재 남도한정식과 영남 한정식으로 크게 양분돼 있다. 남도식이 '가야금' 같다면 영남식은 좀 묵직한 구석이 있어 '거문고' 같다. 한정식은 K-푸드의 신지평이랄 수 있다. 전통음식이 일제강점기 크게 왜곡되고 이밖에 일식·중식·양식의 십자포화를 받은 한정식. 상당수 퓨전스타일로 건너왔기에 요즘 젊은 세대는 그 본질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다행히 안동 종가의 종부들이 내림음식으로 전승해 온 반가음식을 세계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경북 고조리서 3인방이랄 수 있는 안동의 '수운잡방', 영양의 '음식디미방', 상주의 '시의전서' 레시피도 재현해내고 있다. 미국 최초 미셰린 3스타 한식당 정식당의 오너셰프 임정식, 이밖에 에드워드 리, 코리 리, 옥동식 등 세계음식의 전시장이랄 수 있는 뉴욕의 외식시장에서 한국의 오너셰프들이 유명세를 날리고 있다.
◆한정식이란?
한정식은 궁중식·반가식·서민식·요정식 등으로 나눠진다. 코스식과 한상차림식이 있다. 전주와 진주한정식은 객사의 교자상과 궁중 한정식이 결합된 스타일이다. 신선로와 구절판 등을 앞세워 지극히 화려하다.
상당수 남도한정식 1번지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전주를 떠올린다. 사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스타일이 다르고 전남도 목포, 광주, 강진, 해남, 여수, 담양, 순천과 순창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남도스러운 건 강진과 목포 스타일이다. 나는 목포의 원도심 곳곳에 잡초처럼 피어 있는 백반정식 전문점이 진정한 남도식의 종착역이라 여긴다. 관광객을 겨양한 고만고만한 반찬 가짓수만 불린 퓨전 한정식은 먹어나 마나한 허수의 한정식이라 생각한다. 본바닥, 그리고 제철의 물산(物産)이 반영된 것, 물론 종일 식재료 관리를 위해 오너셰프 주인이 종일 부엌을 지키는 곳 말이다. 젓갈도 직접 담그고 된장, 간장, 고추장까지 직접 챙긴다면 능히 그 실력도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에 100여만 개의 식당군이 있는데 과연 그런 곳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남도한정식은 꼬릿꼬릿한 지역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다. '백성표'이다. 허름한 밥집의 백반정식 같다. 거의 1만원 정도이지만 그 감동은 10만원을 넘어선다.
◆남도란?
'남도'란 어떤 지역을 지칭하는 건가. 보통 경기도 이남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는 말인데 통상 남도한정식이라고 할 때는 전라남북도, 즉 '호남'을 의미한다.
갯내음이 남도 맛의 출발이다. 그 요체는 절임과 삭힘이다. 그것이 잘 반영된 맛을 토박이들은 '게미'가 있다고 한다. 제주도 토박이들은 그걸 '배지근한 맛'이라 한다.
게미, 이건 판소리 소리꾼의 쉰 듯한 보이스 컬러인 '수리성'에 해당된다. 목포3합(홍어·묵은지·돼지편육)이 그 축을 이룬다. 이밖에 보성 벌교의 참꼬막, 영암 독천의 갈낙탕, 장흥의 매생이, 무안 세발낙지, 여수와 순천의 짱뚱어탕, 서해안 젓갈, 영광굴비, 섬진강 참게, 장아찌, 간장게장, 갓김치, 모시떡. 서대회, 순창 고추장 등도 그 연장이다.
강진·목포·해남권 토박이들에게 더 어필하는 남도 맛이 있다. 토하젓, 밤젓, 그리고 백합탕이다. 토하젓은 민물 새우를 절며 만든 거고 밤젓은 전어 내장을 소금에 절며 만든 젓갈이다. 그리고 목포 같은 경우에는 황석어 젓갈을 끔찍하게 좋아한다. 물론 서해안의 어리굴젓도 유명세를 갖고 있다.
◆강진한정식
1993년 남도답사1번지로 베스트셀러작가로 급부상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남도답사1번지는 해남, 남도한정식 1번지를 강진으로 꼽은 적이 있다. 강진은 탐진강과 맞물려 포구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엄청 다양하다.
남도한정식 명가는 강진의 '해태식당', 순창의 '새집', 해남의 '천일식당', 담양의 '전통식당', 광주의 '섬진강', 그리고 백반스타일의 풋풋한 밥상은 목포시 복만동 '돌집'과 '백성식당'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해태와 천일은 한때 남도한정식 2인방이었는데 초창기의 맛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뒤에 알았지만 순창의 '새집' 한정식은 모든 음식을 한 상에 올려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고 온다. 예전 요정식 상차림을 연상시킨다. 새집은 남원집, 옥천골, 가람 등과 함께 순창한정식을 선도한다. 새집은 나지막한 기와집이다. 그런데 반은 한옥이고 그 옆에는 1960년대 버전의 하숙집이 맞붙어 'ㅁ' 자 구조를 이뤘다. 무엇보다 잘 익은 오딧빛 대청과 툇마루가 볼거리다. 여긴 투박한 한상차림이다. 서빙 방식은 경상도와 확연히 다르다. 이 집만의 사연을 간직한 호마이카상 10여 개가 눈길을 끈다. 대표 메뉴는 고추장돼지불고기인데 순창에서 맨 처음 내놓았다. 3년 만에 먹을 수 있다는 무장아찌 등은 여느 집과 달리 묵직한 울림을 준다. 깻잎장아찌도 대구식과 다르다. 말린 멸치를 깔고 그 위에 깻잎을 올려 쪄낸 것이다. 겨울에는 통무로 만든 신건지(동치미), 여름에는 죽순이 나온다.
◆경주 요석궁 한정식
경주 최부자 후손이 꾸려가는 '요석궁'(瑤石宮). 상업화된 경상도 반가음식 중 비교적 가풍을 고수하는 곳으로 인정받는다. 요즘 전국 유명 한정식이 너무 퓨전으로 치닫는데, 여긴 튀지 않고 담담하게 기본에 충실하다. 와송(臥松)이 압권인 정원. 풍류 가득한 사랑채로 평가받는 '수재당'(守齋堂) 등도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1920년대 스웨덴 구스타프 왕이 세자이던 시절, 신혼여행 중 경주 서봉총 발굴 소식을 듣고 왔다가 이 집에서 묵었다. 6·25전쟁 때 의료단으로 참전한 스웨덴군이 자국 왕실의 요청으로 최부잣집 안채 사진을 샅샅이 찍어 가기도 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전주 한정식을 주목했지만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시절부터 굵직한 외교사절들이 가장 선호하는 반가 한식당 1순위로 자릴 잡았다. 요석궁은 요석공주가 기거한 곳. 원효가 남천의 느릅나무 다리에서 떨어진 인연으로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게 된 것도 바로 여기다. 요석궁 옆 다리는 이제 '월정교'로 복원됐다.
360여 년 전 요석궁의 새 주인이 나타난다. 최부자 가문의 터를 다진 최언경이다. 경주최씨는 원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터 잡고 살다 250년 전에 교촌으로 이사했다. 그때 내남면에 있던 집을 뜯어 옮긴 것이다. 하지만 금싸라기 같은 이 세거지는 문파 최준에 의해 1947년 대구대(영남대 전신)에 기탁된다. 그로 인해 가문은 급속도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훗날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 기탁은 자의보다 타의가 컸고, 훗날 영남대와도 소원한 관계가 된다. 최인환이 71년 '요석궁'이란 요정을 차린 것도 호구지책의 일환이었다. 2005년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아들 재용 씨가 칙칙했던 요석궁을 반가 한정식 전문점으로 산뜻하게 리모델링한다.
◆발효가득한 밑반찬
가장 인상적인 건 메인 음식이 아니다. 사철 변하지 않는 발효 가득한 밑반찬이다. 감질나게 담겨 나오는 육장·집장·멸장·육포·명태보풀(보푸라기)·사인지·어만두…. 음식에서 종부의 손길이 느껴진다. 남도 한정식과는 요리의 질감이 사뭇 다르다. '육장'은 태양초 고추장에 최고급 한우를 갈아 넣은 일종의 '소고기고추장볶음'이다. '집장'은 직접 재배한 국산 콩을 메주로 띄운 뒤 그 메줏가루에 다시마와 부추, 무, 한우 등 몸에 좋다는 20여 가지 재료를 넣고 약불에 10시간 이상 졸여 낸 정성 만점 밑반찬이다. '멸장'도 땀의 결정체. 최상의 마른멸치의 내장을 다 빼낸 뒤 멸장용 기름기 없는 정육으로 육수를 만들어 2~3일 그늘에서 말린 무와 고추장을 넣고 양념해 뭉근한 불에 조청 만들 듯 5~6시간 졸여 만든 밑반찬이다.
'사인지'는 최부잣집에 시집온 며느리의 고단함과 사연이 스며들어 있다. 갖가지 재료를 장만하는 게 너무 힘이 들어 사연이 많은 김치라고 해서 처음에는 '사연지'로 불렸다. 국물이 자박한 보쌈김치처럼 보인다. 그 깊은 맛은 흡사 동굴 속 천연수를 방불케 한다. '수란채'는 임금한테도 진상됐다고 한다. 잣 국물에 전복과 해삼, 문어, 대게 등을 넣고 쑥갓으로 향을 더한 후 계란과 건고추, 석이버섯 등으로 고명을 올려놓는 영양식이다. '음식은 정성'이다 싶어 전 직원이 맘을 다해 매월 음력 초하루엔 음식을 위한 '식제(食祭)'까지 올린다.
◆한정식 전도사 열전
오늘의 한정식 문화를 이끈 건 조선왕조궁중요리 기능보유자인 황혜성과 그의 딸 한복녀(궁중요리연구원장) 원장, 그리고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73세 생일상을 차려낸 안동소주 조옥화 명인,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 남북정상회담 때 만찬상을 설계한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윤숙자 소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전국 유명 한정식 사장은 대다수 그 문하 출신이라 보면 된다.
대구의 한정식의 뿌리는 한때 요정을 중간거점으로 다양한 형태로 이합집산된다. 90년대 초 지역의 여러 요정들은 유흥업소 특별소비세를 피하기 위해 한정식 전문점으로 업태를 변경한다.
대구의 경우 한식대첩4 최종 우승자가 된 들안길 용지봉, 이밖에 청도 유등지 근처로 이전한 '안압정', 들안길의 '남도명가'와 '호남정', 달서구 두류동 들메꽃 등도 자기 색깔을 지켜내고 있다.
남도한정식도 일부 서울로 흘러들었다. 첫 업소는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근처에 있는 '장원'이다.
아무튼, 한식과 한정식 사이에 숱한 허기의 스토리가 SNS를 통해 방방곡곡을 딛고 전세계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태양만큼 소중한 음식, 그러니 부디 '조립' 수준이 아닌, 진정한 물성이 살아 숨쉬는 한식 조리철학의 절창이 대대손손 이어졌으면 좋겠다.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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