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장입니다. 동민여러분 밤새 별 일 없으셨지요? 오늘은 우물 청소를 하는 날 입니다. 집에 있는 두레박과 양동이를 들고 우물가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동민여러분 이장입니다…"
이른 아침 아버지의 목소리로 마을은 하루가 시작 되었습니다. 마을 산 중턱에 걸려있는 확성기에서는 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었지요.
중학교 문턱에 갔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도에 포기해야 했지만 독학으로 한자를 깨우치시고 글씨는 대서방(글씨를 대필해주는 곳)을 차려도 될 만큼 달필이었습니다. 이장 일을 오랫동안 보셨고 동네에 대소사가 생기면 아버지가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정리했습니다. 작은 키에 아버지는 늘 당당하셨고 말씀도 유창하게 잘 하셨으며 지식도 해박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기죽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외동으로 자란 아버지는 자식 욕심도 많으셨습니다. 작은체구의 아버지는 다른 사촌형제들에게 괴롭힘도 많았기에 형제가 많은 것이 늘 부러워했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데도 육남매를 낳으셨고 큰 누나는 여상을 졸업하여 직장생활을 바로 시작했고 오남매는 모두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논농사가 좀 있는 집안에서도 모두 대학을 졸업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 생신에 고향집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과 어린 손자 손녀들로 왁자지껄하던 그 때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찾아나섰더니 아버지는 흐릿한 가로등 아래에서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시고 계셨습니다. 축 처진 어깨와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으로 언제나 당당하셨던 아버지가 왜소해 보였던지요. "아부지 담배 끊어요. 이젠 건강도 생각하셔야죠." 잔소리를 해도 싱긋이 웃으시며 그냥 쳐다보고 계셨어요.
"아버지 여기서 뭐하세요?"
"응, 그냥…."
"들어가세요, 식구 다 모였는데 주인공이 빠지면 안되잖아요."
"으응, 그래. 들어가자."
아버지가 떠나신지 벌써 5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가로등 아래 아버지의 그 담배연기에는 세월의 고단함과 힘듦을 뿜어내는 아버지의 삶이 녹아 있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식농사지어 짝지어 보내고 손주 손녀까지 얻었으니 당신의 역할은 다 하신것 같다는 그 책임감의 무게가 축쳐진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만약 다시 아버지와의 그 시간이 주어진다면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따듯하게 안아드리면서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세 번의 암 수술과 치료중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칠순의 나이에도 경매공부를 배워 전국의 부동산을 찾아 경매에 도전하시고 외서면 게이트볼 회장을 역임하면서 상주시장배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시고 상주시 대표로 전국대회에도 진출하셨습니다. 농협감사, 새마을금고 대의원 등으로 활동하시면서 지역사회 봉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아버지는 암수술 후에도 전투적으로 삶을 사셨습니다
어쩌면 그런 강한 아버지였기에 제가 나이가 들어서도 투정을 부리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형제들과 다툼이 있었는데 제가 가족모임에 안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전화로 저를 다독이며 "그냥 와라, 그냥 오면되지 뭘 그래." 라고 하셨죠. 그런데 저는 결국 그 모임에 가지 않았고 그게 아버지가 저를 부른 마지막 가족 모임이었습니다. 저의 버르장머리 없고 알량한 자존심이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을 날려버렸습니다. 이제는 다시 되돌릴수도 없고 다시 만날수도 없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저는 아버지가 쳐다보던 늦은 밤의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죄송해요.잘 계시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닮아 저도 마이크 잡는 일로 먹고 살고 있어요, 하하.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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