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내가보는 가야사] ⑫유네스코에서 바로잡은 가야사

유네스코 '가야고분군' 기문국·다라국→가야정치체 변경
"야마토왜 200년간 한반도 남부 점령"…日·韓 역사학계 근거 없는 억지 주장
삼국사기·신라본기 등 관련 내용 없어
정부 '가야고분군' 세계문화유산 신청…전북 운봉면 야마토왜 식민지 기문국
경남 쌍책면은 임나 다라국으로 서술
영·호남 시민 '가야사 바로잡기' 앞장…유네스코 센터에 서한 보내 우려 표명

경남 합천의 쌍책고분군, 문화재청에서 임나7국의 하나인 다라국으로 신청했다가 항의 끝에 다라국을 삭제했다.
경남 합천의 쌍책고분군, 문화재청에서 임나7국의 하나인 다라국으로 신청했다가 항의 끝에 다라국을 삭제했다.

일 왕가의 발상지인 큐슈 남부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박물관의 갑옷들. 가야계가 일 왕가를 건설했음을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일 왕가의 발상지인 큐슈 남부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박물관의 갑옷들. 가야계가 일 왕가를 건설했음을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6가야사》를 쓰고 싶다던 신채호

단재 신채호는 1927년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28년 5월 대만 기륭(基隆)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 와중인 1931년 11월 16일 《조선일보》의 신영우 기자는 여순까지 가서 신채호를 만난 후 〈조선의 역사대가 단재 옥중회견기〉라는 기사를 썼다. 기자가 "옥중에서 책자를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신채호는 '노역하느라고 시간이 없지만 한 십 분씩 쉬는 동안에라도 책을 보려고 힘쓴다'고 답변했다. 간수가 면회시간이 끝났다고 재촉하자 신채호는 "《조선사색당쟁사》와 《6가야사》만은 조선에서 내가 아니면 능히 정곡(正鵠:과녁의 한복판을 맞춤)한 저작을 못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이때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를 옥중 투고하고 있었는데, 정작 쓰고 싶은 것은 《조선사색당쟁사》와 《6가야사》였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두 권 다 저술하지 못하고 1936년에 옥중 순국했다. 만약 신채호가 《조선사색당쟁사》를 썼다면 어떤 내용일지는 짐작이 간다. 계해정변(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노론의 관점에서 쓰여지고 있던 당시의 당쟁사와는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채호가 쓰려던 《6가야사》가 어떤 내용이었을까? 만약 신채호가 쓴 《6가야사》가 전해진다면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 어떤 대접을 받을까?

◆〈의열단선언문〉의 가야

그의 《6가야사》의 내용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주는 단서가 신채호가 1923년에 쓴 〈조선혁명선언〉, 곧 〈의열단선언문〉에 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하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다.

"자녀가 나면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라, 일문(日文)을 국문(國文)이라' 하는 노예 양성소 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왜곡)하여 소전오존(素戔鳴尊:일본 고대 여러 신 중 하나)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 한 일본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조선혁명선언〉)"

신채호가 쓰려던 《6가야사》는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고 한" 가야사를 해체하고 원래 가야사로 복원시키는 저서였을 것이다. 삼한은 '신라·고구려·백제'이니 삼한을 야마토왜가 점령했다는 식민사학에 대한 반론일 것이다. 메이지 때 국학자였던 나가 미치요(那珂通世)는 〈가라고(加羅考)(1896년)〉에서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한 후 다시 한 번 장수를 보내어 평정한 7개국 중의 하나인 가라국은, 즉 이 대가라"였다고 말했다. 나가 미치요의 이 말은 두 단계로 되어 있다.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다는 말은 《일본서기》 신공 9년(209)조를 말한다. 《일본서기》는 이때 야마토왜가 신라를 점령하자 고구려·백제왕도 야마토왜에 항복했다고 말한다. 세 국왕이 모두 "지금 이후로 영원히 서번(西蕃:서쪽 제후국)이라고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앞뒤 모순의 《일본서기》 해석

《일본서기》는 신공 9년 이후 삼한은 모두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공 47년(247)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품을 바쳤는데 백제의 조공품이 신라에 비해 좋지 않았다. 야마토왜에서 조사해 보니 백제가 신라의 조공품을 빼앗아 대신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마토왜에서 신공 49년(249)년 신라를 공격했는데, 정작 망한 것은 가야여서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7국"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나오는 《일본서기》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인데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120년을 더해서 369년의 일로 해석한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의 기사는 〈신공 9년〉조의 이른바 '삼한정벌' 기사를 전제로 한다. 지난 호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 일본 학계는 신공 9년의 '삼한정벌'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야마토왜가 신라·고구려·백제를 점령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때는 야마토왜가 생기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신공 49년에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은 사실이라고 우긴다.

◆《삼국사기》 불신론의 발명

지금 일본과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처럼 야마토왜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야마토왜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 관련기사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사가 전무하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 불신론'을 창작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허접한 논리가 지금까지도 남한 강단사학계의 이른바 정설(定說)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 불신론의 연장선상에서 가야는 서기 42년이 아니라 3세기 후반에 건국되었다고 우겼다. 그런데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가야고분군'을 유네스크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하면서 가야가 3세기 말에 건국했다고 신청했다. 또한 경남 합천 쌍책면의 고분군을 임나 7국의 하나인 다라국으로, 전북 남원 운봉면의 고분군을 야마토왜의 식민지 기문국의 고분군으로 신청했다. 문화재청의 가야고분군 신청서의 내용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가야는 서기 3세기 말에 건국했습니다. 일본 열도에 있던 야마토왜는 서기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습니다. 경남 합천이 임나 7국의 하나인 다라국인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한 야마토왜는 지금의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까지 지배했습니다. 전북 남원이 야마토왜의 식민지인 기문국인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 내용을 유네스코에서 국제적으로 공인해 주십시오.」

문화재청은 국내 식민사학자들에게 국고를 지원해 《가야고분군 연구총서》(1~7권)을 발간했는데 한국 재점령을 꿈꾸는 일본 극우파에서 발간했다면 그 정체성에 맞을 내용이다.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 한 조선총독부의 주장을, 21세기 유네스코에서 대한민국 국고를 가지고 국제적으로 공인 받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믿기 힘들 것이다.

◆21세기 역사의병전쟁이 일어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영남과 호남의 애국시민들이 21세기 역사의병전쟁을 일으켰다. '식민사관 청산과 가야사 바로잡기 전국연대', '역사바로세우기 불교대책위원회', '가야사 바로 세우기 가락종친비상대책위원회', '(사)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 등은 '일제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바로잡기 전국연대'를 결성해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센터에 서한을 보냈다. 그 첫 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야고분군 발굴보고서는 과거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제국주의가 조작한 역사관에 의해 서술되었습니다. 특히 귀 심사단에 제출한 신청서(초안) 중에 남원, 합천의 두 고분군은 일본식 지명이 들어 있습니다.(제국주의 문화침략의 잔재)"

서한은 또한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할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관련 진행과 모든 문서 작성을 비밀리에 추진하였습니다.(비밀 행정)"라고 비판했다. 문화재청은 시민단체의 등재신청서 공개 요청에 '국가기밀'이라는 논리로 거부했다. 유네스코 승인 사항 중의 중요한 내용이 공개성과 접근성이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가야고분군 등재신청서가 핵개발 문서나 대륙간탄도미사일 문서라도 된다는 듯 비공개로 일관했다.

◆유네스코가 바로잡은 가야사 왜곡

가야사를 임나일본부사로 조작하는 것에 조직의 사활이라도 걸린 것처럼 돌진하던 문화재청의 행보는 대선 이후 주춤해졌다. 가야사에 관심 많던 김병준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이 문화재청 관계자를 불러 질책한 일도 이때 벌어졌다. 비로소 문화재청은 〈'다라국'을 '쌍책지역일대의 가야 정치체'로, '기문국'을 '운봉고원 일대의 가야 정치체'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수정 서한을 유네스코에 보냈다.

유세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의 아소모(Lazare Eloundou Assomo) 위원장은 2023년 9월 13일 '일제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바로잡기 전국연대'의 '유네스코 특별위원회' 박진무 위원장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왔다. '기문국'과 '다라국'에 대한 한국 시민단체들의 우려를 주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제기구의 위원장이 시민단체 관계자에게 직접 공식서한을 전달한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프랑스인인 아소모 위원장이 볼 때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프랑스로 따지면 나치 역사관으로 등재신청한 것이니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9월 17일 유네스코의 심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세 가지였다.

"첫째, 가야고분군 7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 둘째, 임나 지명인 기문국을 운봉고원가야정치체, 다라국을 쌍책지역가야정치제로 변경을 허가하고 한국 정부가 제출한 등재 신청서 서류 일체에서 이 지명 변경을 인정한다. 셋째, 가야 건국은 3세기 말이라고 쓴 기술을 1세기로 변경 신청 낸 것을 허가 한다."

당초 '일제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바로잡기 전국연대'는 정부기관인 문화재청에서 공식 신청한 내용을 바꾸기 힘들 것으로 판단해서 등재 심사를 3년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보류할 것도 없이 일제식민사관의 잔재를 거의 삭제한 내용으로 등재신청을 승인한 것이다. 구한말 조정의 관군과 일본군이 한편이 되어 동학농민혁명군과 의병들을 살육하던 비극이 재연될 뻔 한 것을 21세기 역사의병과 유네스코가 한 몸이 되어 가야사를 대부분 원형대로 되살렸다.

국가발전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용들을 가지고 사생결단하는 지금의 여·야는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 역사문제에 관한 한 단재 신채호가 감옥에서 신음하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시민단체의 항의시위. 일본서기가 아닌 우리 역사서로 유네스코에 등재신청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항의시위. 일본서기가 아닌 우리 역사서로 유네스코에 등재신청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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