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반갑다새책]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 펴냄

2022년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서울시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틀 뒤 서울시는 지하·반지하 주거를 금지하겠다는 '안전대책'을 발표했지만 이는 헛구호에 그쳤다. 반지하방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복잡한 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폐지'를 연상시키는 이같은 성급한 대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당사자를 중심에 두고 깊이 있게 고민하면 세상을 바꾸는 정책이 등장하기도 한다. 1988년 미국 뉴욕시는 HIV 신규 감염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낙인에 굴하지 않고 마약 중독자들에게 깨끗한 주삿바늘을 무상 제공하는 이른바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곧바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보건학자 돈 오페라리오는 "보건학적 개입은 개인의 삶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질문해 온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김승섭 교수가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후 수 년 만에 그 동안의 연구와 공부, 그리고 시행착오를 고백하는 분투기를 내놨다. 차별을 정확한 데이터로 마주하고, 당사자의 고통을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헤아리는 과정이다.

그는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들의 고통에 구체적 데이터와 정확한 문장으로 응답하기 위해 그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막막한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 치열하게 고민했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출생 시 법적 성별과 외모에 드러나는 성별 정체성이 다른 트랜스젠더 5명 중 1명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두려워 병원 이용을 포기한 적 있다고 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운전기사나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포기한다.

저자는 자신의 실패담도 함께 풀어놓으며 모든 고통이 동등하게 주목받지는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연구에 참여한 보상으로 지급한 기프티콘에 있는 '트랜스젠더 연구'라는 말이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수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후 장애인 이동권 연구에서 같은 실수를 피했다. 하지만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료로부터 '편의점 기프티콘을 받아도 직접 사용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는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회문제 해결은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푸는 대신, 큰 칼을 휘둘러 자르는 것은 칼을 휘두른 이를 영웅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영웅적 결정은 종종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저자의 문장은 사회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피해자 혹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고민해야할지 큰 질문을 던진다. 320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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