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32> 헤세의 ‘데미안’: 에바, 여성성의 근원

이경규 계명대 교수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헤세의 '데미안'은 탁월한 교양소설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교양(Bildung)은 '지식·정서·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이라는 사전적 정의와는 사뭇 다르다. 빌둥(Bildung)은 '형성하다'(bilden)라는 독일어 동사에서 파생한 말로 인격적·정신적 성장을 뜻한다. 결과로서의 성취보다 그 과정이 중요하다. 한 인간이 성장·성숙하는 데 사랑과 연애는 필수이듯이 교양소설에서 연애사는 필수 요소다.

그러나 '데미안'에는 러브 스토리라 할 만한 게 나오지 않는다. 대신 두 명의 여성이 색다른 방식으로 주인공(싱클레어)의 성장을 돕는다. 베아트리체와 에바가 그들이다. 이들의 아름다움과 여성성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다. 베아트리체는 고등학생인 싱클레어가 공원에서 가끔 마주친 소녀인데, 단테의 첫사랑과 이름이 같다. 싱클레어가 저 혼자 붙인 이름이다. 베아트리체는 날씬하고 우아하게 생긴 미모지만 똑똑하고 정신력 강한 소년 같다. 첫눈에 반한 싱클레어는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숭배하듯 한다.

한 번 만나지도 못한 이 베아트리체가 싱클레어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욕정과 세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청년이 갑자기 신을 모시는 사제처럼 변한다. 싱클레어는 아침마다 찬물에 샤워하고,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까지 순수하고 고결하고자 한다. 친구들이 우습다고 놀리지만 그의 내면에는 날마다 예배가 거행된다. 그런 마음을 담아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그렸을 때, 그것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이교도의 신상 같다.

"절반은 남자고 절반은 여자고, 나이도 알 수 없고, 굳센 의지력과 몽환이 섞여 있으며, 딱딱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다."

이렇듯 싱클레어가 은밀히 동경하는 여성상은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다. 곱고 육감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강인하고 정신적인 모습이다. 그러한 베아트리체가 단기간에 싱클레어의 피폐한 삶을 바로잡아준다. 베아트리체에 이어 나오는 에바 부인은 더욱 강력한 카리스마를 펼친다. 에바는 데미안의 어머니로 나오지만 실상 모든 본성의 어머니로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한 마디로 에바는 싱클레어를 자유로운 주체로 성장시키는 여성이다. 아름답고 품위가 넘치면서도 남성적인 강인함이 전신에 탑재되어 있다.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깊이 빠져 모든 것을 그녀의 인도에 맡기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싱클레어의 주인은 싱클레어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내 존재를 이끄는 그녀의 자아가 실은 내 내면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를 내 속으로 깊이 인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에바는 싱클레어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원초적 자아를 이끌어낸다. 베아트리체나 에바나 역사시대의 남자들이 투사해 온 아름답고 헌신적인 여성상이 아니다. 한없는 연민을 자아내는 청순가련형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남녀의 틀도 초월한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의 원형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남편(아담)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신의 율법마저 깨뜨리는 태초의 자유인 이브다. 이브의 본질은 저 자유의지에 있다. 바로 그녀의 아들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길을 안내하며 소설의 타이틀을 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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