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함재봉 칼럼] 대통령의 면책권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아무리 표차가 근소하였고, 아무리 경쟁이 심했던 선거였다 하더라도 선거에서 패한 후보는 평화롭게 현직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대법원의 새뮤얼 알리토 2세 대법관의 말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사람이 형사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가능성은 그만큼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알리토는 "그렇게 될 경우 우리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뒤흔드는 악순환이 시작되지 않겠는가?"라고 물으면서 "선거에서 지는 후보가 감옥에 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다"고 첨언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기한 헌법 소원에 대한 대법원 심의 중에 나온 발언이다.

트럼프는 2021년 1월 2일 조지아주의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조지아주의 선거 결과를 바꾸도록 압력을 넣는다. 4일 후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부정선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군중이 미국 의회 건물을 습격한다. 이 과정에서 5명이 죽고 174명의 경찰관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한다.

트럼프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폭도들이 미국 의회 건물을 습격하는 것을 트럼프가 적극 부추겼으며 이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또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의 여성 편력이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대 여성에게 '입막음 돈'(hush-money)을 지불한 바 있다.

그러나 트럼프 측에서는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한 일에 대해서는 헌법이 완벽한 면책권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소신껏 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검찰은 대통령도 일반 시민과 똑같은 법의 적용 대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4월 26일 진행된 미국 대법원의 헌법 소원 심의 중 트럼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대통령의 면책권 범위에 대한 집중적인 심의가 진행되었다. 닐 고서치(Gorsuch) 대법관은 "우리는 앞으로 오랫동안 적용될 규정을 오늘 만들고 있다"고 했다.

미국 대법관들은 트럼프 개인의 운명을 결정할 판결을 내리는 동시에 앞으로 미국의 모든 전직 대통령들에게 적용되는 규정을 만들고 있다. 대법관들은 미국 대통령들에게 대통령직이 수반하는 고유의 책무를 다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해 주는 동시에 실제로 법을 어길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통령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결정에 대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기소를 당할 여지가 있다면 대통령들도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통령직과 관련 없는 범죄를 저지르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

미국 대법원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직 대통령이 기소될 경우 우선 하급 법원에서 기소의 대상이 되는 위법행위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한 공무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사적인 행위였는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트럼프의 재판이 하급 법원의 심의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오는 11월 대선 전까지 최종 판결이 나올 가능성은 사라진다. 트럼프를 반대하는 측에서 대법원의 이러한 결정을 미리 반대하고 나서는 이유다.

미국 정치는 트럼프의 등장을 전후로 그 수준이 급속히 하락하고 있다. 이는 민주당, 공화당, 대통령, 의회에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미국 정치의 품격을 지켜 주는 마지막 보루인 대법원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평가 역시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직도 전직 대통령을 기소하는 문제를 놓고 신중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트럼프가 한 일이 아무리 대통령의 품격과 품위를 낮추고 심지어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할지라도 트럼프 개인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부러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감옥을 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본인이나 직계 가족을 감옥에 보내지 않고는 직성이 안 풀리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정치가 아닌 복수의 악순환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복수의 악순환을 언제까지 견뎌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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