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산불이 의성군을 휩쓸고 지나간 지 4개월여. 거멓게 그을린 산등성이는 여전하지만 에워싼 초록빛 산림에 처참함이 꽤 누그러졌다. 그을린 땅에는 낮은 풀들이 고개를 내밀며 강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자연의 회복 탄력성은 늘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다만 필요한 건 충분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역대 최악의 산불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깊다. 이번 산불로 의성군은 2만7천961㏊의 산림이 불에 타고 이재민 479명이 발생했다. 피해 면적만 여의도 면적의 96배, 축구장의 3만9천 배 크기다. 전체 피해액은 2천775억원에 달하고, 피해 복구에 4천336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물적 피해뿐만 아니라 깊은 정신적 충격도 안겼다. 의성군은 정신건강 위기 고위험군 31명을 발굴해 전문 의료기관의 심층 상담과 약물 치료를 진행 중이다. 산불 일선 현장에 투입됐던 공무원들도 말 못 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여전히 불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는 꿈을 꾸는 이도 있다.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증상들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피해에 공감한 국민들은 소중한 정성을 모았다. 산불 발생 이후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의성군에 접수된 기부금은 1천911건, 64억4천600만원에 이른다. 고향사랑기부금을 통해서도 1만1천801명이 16억1천700만원을 전달했다.
그런데 응당 기부자 명단에 있으리라 여겼던 기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의성군 황학산 일대 23만㎡ 터에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의성황학산풍력발전㈜이다. 이 업체는 SK디앤디 등 5개사가 공동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이다. 전체 사업비는 2천65억원으로 SK디앤디가 58.6%인 1천210억원을 맡았다.
SK그룹은 지난해 3월 SK디앤디의 신재생에너지 분야를 인적 분할해 SK이터닉스를 신설했다. 설비용량 99㎿ 규모의 이 단지가 완공되면 SK이터닉스는 국내 최대 규모의 풍력 민간 발전사가 된다.
이번 산불 현장에서 풍력발전단지가 마냥 안전했던 건 아니었다. 당시 화마는 공사 현장과 인접한 옥산면 실업리와 전흥리까지 밀어닥쳤다. 산림당국은 풍력단지를 중요 기반 시설로 보고 인력과 장비를 투입해 산불 저지에 전력을 쏟았고, 결국 불길 확산을 막아 냈다. 주민들의 피해 저지에 들어갈 공적 자원이 대기업의 개발 현장에도 투입된 셈이다.
물론 민간기업이 지역사회의 재난 복구에 힘을 보탤 '의무'는 없다. 그러나 수천억원 규모의 대형 공사를 진행하며, 향후 상당한 수익까지 거두게 될 기업이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SK디앤디는 지난 2022년 울진 산불 당시 이재민 지원에 1억원의 성금을 내고, 이재민 대피소에 생필품을 지원하는 등 지역사회 공헌 활동을 펼친 전력도 있다.
SK그룹은 재계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기업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8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사회적 가치를 경제 시스템에 내재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SK그룹이 제시한 사회적 가치와 ESG 경영 목표에는 '지역사회와 상생과 행복'도 명시돼 있다.
지역사회에 발생한 최악의 재난에 눈을 돌리고 있는 지금 모습이 SK그룹이 지향하는 경영 철학과 과연 어울리는지 짚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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