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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 땡겨볼까요 / 안병숙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박병숙 님.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박병숙 님.

아버지의 춤바람은 막을 길이 없다. 여름 무대복은 모시잠방이요, 겨울엔 구호품으로 받은 군복 같은 반코트와 군복 바지. 걷는 걸음이 춤사위요 내두르는 팔이 박자다. 그렇다고 흥이 많은 것도, 곡주에 입을 대는 것도, 작대기로 지겟다리 두드리며 박자를 넣는 것도 아니다. 흰 고무신 스텝은 동서양 춤을 가리지 않고 무대를 누빈다. 생모시 같은 자연 춤바람이다.

유월이 오면 스텝에 생기가 붙는다. 이른 새벽 재 너머 여남은 논마지기를 돌아보고 온다. 논둑에서 누구하고 스텝을 밟았는지 하얀 고무신에 논흙과 풀씨가 묻어 지저분하고, 누구하고 추었는지 바짓가랑이 여기저기에 풀물이 들었다. 누구하고 속삭이며 추었는지 얼굴에 온색이 돈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이 햇빛에 반들거린다.

콩밭 매러 간 아버지가 목이 마르지 않을까 물을 들고 가 보았다. 콩밭 고랑에서 오리 춤을 추며 콩들과 주거니 받거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긴 고랑 허리 굽혀 춤을 추어도 그을린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한 번씩 일어나 굽은 허리를 편다고 하늘로 향해 팔을 쭉 뻗친다. 풀들이 이제 '살았다' 외치기도 전에 다시 고랑에 앉아 씰룩씰룩 콩 키에 맞춰 춤을 춘다. 호미만 살갗이 벌겋다.

하루에 한 번씩 찾는 아버지의 제국. 도열 한 담배 군단. 고랑 위에 서 있는 담배와 일일이 악수하듯 붙잡고 곁순과 꽃 순 따며 휘파람 섞인 콧노래로 흥얼거린다. 사열 받는 장군처럼 홍조 띤 얼굴이 새삼스럽다. 고랑 고랑 밟으며 은근히 몸을 한 번씩 돌리는 아버지의 홀로 블루스. 후줄근한 모시 잠방이에 고무신 스텝으로 고랑을 돌지만, 당신의 눈빛은 담뱃잎이 황금빛 날개를 달 날을 기다림이라. 맥고자 아래로 흐르는 땀이 담배 빛으로 반짝인다.

어젯밤 영화를 보고 온 딸이 아버지 앞에서 박박 우겼다. 난생처음 보는 무성 영화 '상록수.' 초등학교 운동장엔 면에 사는 사람들이 다 모인 듯 북적거렸다. 변사의 구성진 목소리는 사람을 울리고 웃겼다.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 그렇게 정신없이 영화를 보다가 목이 서늘해 만져보니 목도리가 없다. 며칠 전 사준 꽃무늬가 그려진 융 목도리다. 앉은 자리를 찾아봐도 보이는 것은 둘러앉은 사람뿐. 이제 영화가 슬픈 게 아니라 꾸중 들을 것이 속상해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고 뒷문으로 학교에 갔다. 내 뒤에서 매의 눈이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저녁 먹고 난 뒤 부른다. '목도리도 안 쓰고 학교 가던데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 '몰라유' 퉁명스럽게 딱 잡아뗐다. 또 물어도 '모른다'고 우겼다. 끝까지 우겼다. 고집에 매가 춤을 춘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높이 들었다. 노래가 절정에 이르면 지휘봉 끝을 공중에 두어 사람들의 감정을 극도로 몰입시키듯. 매가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내 종아리에 내리꽂힌다. 마치 매가 먹이를 포착 했을 때 내려오는 속도다. 영화가 슬퍼서, 목도리를 잃어버려서, 종아리에 매 자국이 아파서 울고 또 울었다. 슬픈 영화는 끝까지 나를 울렸다.

아버지의 겨울 농사가 시작된다. 무대 의상은 반코트 군복과 바지 그리고 흰 고무신과 목양말. 큰 대문 옆 한쪽에 놓인 새끼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발판에 발을 올려 리듬 순위를 맞춰가며 스텝을 밟는다. 나팔관에 볏짚을 넣으면 볏짚은 빙빙 돌며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춘다. 당신의 팔도 여기에 맞춰 쉴 새 없이 춤을 춘다. 입은 연신 씰룩거리고 틀은 발 스텝에 와루 와르 소리 내며 장단을 맞춘다. 얼레도 새끼줄을 감으며 연신 춤을 춘다. 새끼틀과 함께 추는 이 춤은 왈츠를 넘어선 수준 높은 막춤이다. 겨울 농사만이 갖는 푸짐한 춤사위 한바탕이다. 얼레에서 새끼 다발을 빼내는 아버지 손이 하늘만큼 커 보인다.

볏짚의 변신은 무죄다. 볏짚은 새끼라는 새로운 스타일로 사랑방 옆에 똬리를 틀며 자리를 잡는다. 겨울 농사로 거둬들인 식구의 밥이다. 높다랗게 서너 줄을 쌓으면서 만져보는 아버지의 꺼칠한 손. 당신은 지금 무슨 꿈을 만지고 있을까? 내면의 꿈이 무엇이길래 정성스레 쌓아 놓고 바라만 보는가? 장날이 오면 벌채에 얹어 장에 낼 텐데. 아버지는 지금 오십 대 꿈을 지고 조금씩 건너는 중이리라. 한 번씩 머뭇거리는 당신을 어린 딸이 눈 여겨 본다.

누군가 말한다. '신은 모든 것을 주시고 더 이상 추가할 게 없을 때 걸작품이 완성 됐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신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콩 바심에 도리깨의 날렵한 율동. 일정한 높이의 폭을 지켜 바람을 가르며 내려친다. 콩대에서 쏟아지는 콩의 마지막 의례. 두들기는 그 단호함은 당신의 기조 높은 날개 춤을 닮았다. 호롱기를 밟으며 작은 볏단 이리저리 돌릴 때, 와릉와릉 소리가 격렬한 리듬 따라 손과 아우러져 춤을 춰도, 농악놀이로 흥겨운 가락 따라 춤을 춰도, 당신이 맘대로 추는 홀로 블루스 앞엔 그냥 몸짓일 뿐이다.

아버지의 춤바람은 집 주위를 다 무도장으로 만들었다. 텃밭부터 시작해 건너 건너 밭에 각종 작물을 심어 그들과 매일 춤을 추었다. 지금도 그 무대에선 아버지를 닮은 자식이 그저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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