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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 함지박 / 변재영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변재영 님.
2025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자 변재영 님.

침묵하는 세간 하나가 까칠하게 가슴을 긁는다. 어머니의 살로 닳은 함지박이다. 나이테에 감긴 수백 년의 세월이 숱한 얘기를 풀어 놓는다. 한때는 천년 솔을 꿈꾸며 청춘을 불살랐겠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가지들, 소실점으로 멀어진 아득한 우듬지는 뭇새들의 보금자리로 새 생명을 품기도 했으리라. 혈맥 같은 물무늬 나뭇결을 쓰다듬자 찡한 온기가 전해 온다.

어머니의 49재가 마무리되던 날이다. 빈 둥지로 남은 시골집을 정리하다가 함지박과 마주했다. 손쉬운 플라스틱 대야나 고무 통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알곡이 상한다며 여태껏 함지박을 고집하셨다. 가실 때를 아셨을까. 비닐로 꼼꼼하게 싸매어 곳간 시렁 위에 올려놓았다. 포장을 풀자 금시 그분의 바지런한 손길이 다녀간 듯 반들반들 윤이 났다.

"언제 다시 와서 쓰시려고…."

광주리가 고작이던 시절, 함지박은 막사발처럼 무엇이든 담아내는 요긴한 그릇이다. 삼대에 걸쳐 대물림으로 내려온 넉넉한 귀함지는 시간의 무게만 해도 내게는 무정한 물건이 아니다. 선대 할머니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우리 집의 보물이다. 땡볕이 고추처럼 매운 날이면 이글거리는 태양을 담고 넉걷이가 저물면 달빛을 담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내게는 아픈 기억을 더 많이 담고 있는 애물이다. 전쟁처럼 처절했던 격정의 한 생이 웅크린 함지박은 기구한 생을 치열하게 살다 가신 어머니의 아름다운 분신이다.

내 유년 시절, 어머니는 꽃무늬 앞치마를 즐겨 입으셨다. 뽀얀 실비단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며 당신의 삶도 오뉴월 장미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셨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한낱 바람일 뿐, 일찍 청상이 된 어머니는 가난과 굴종 체념과 희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물꼬를 생판 하늘에다 대고 있는 천둥지기 몇 마지기로는 사 남매의 초롱초롱한 별빛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반티이장사로 나섰다. 좌판은 언감생심 읍내 후미진 골목이 어머니 노역의 공간이다. 새벽밥을 먹고 시오리를 걸어 부산발 첫차로 오는 도매상으로부터 함지박 가득 생선을 넘겨받아 팔았다.

꽃나비 노닐던 어머니의 앞치마는 칙칙하고 볼품없는 면포로 바뀌었다. 분내가 향긋하던 몸에도 비린내가 진동했다. 오일장마다 달콤한 사탕 봉지가 유혹하던 함지박은 팔다 남은 생선의 고약한 냄새가 파리떼를 불러들였다. 그때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은 나를 '꽁치'라고 불렀다. 내 성질머리가 밴댕이 속 같아서가 아니다. 생선을 파는 어머니를 빗댄 별명이었다.

"생선 사이소, 싱싱한 꽁치 사이소."

생선 반티를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헤집고 다니는 어머니의 추레한 모습이 부끄러웠다. 마뜩하지도 않았다. 비릿한 그 함지박이 우리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밥줄이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초등학교 4학년일 때로 기억된다. 점심시간, 누군가가 외쳤다.

"얘, 꽁치! 네 엄마 왔다."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이목이 쏠린 그곳에는 낡은 수건을 눌러쓴 어머니가 빈 함지박을 옆구리에 끼고 서 계셨다. 장사가 신통찮아 기성회비 납부 날짜를 넘긴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 나는 저녁밥도 먹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보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학교에 발걸음을 하는 일이 없었다.

두어 해 더 매미가 여름을 울고 갔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행상으로 뒷골목을 누빈 지 2년, 어머니도 겨우 읍내에 있는 노점 골목에 돗자리 하나를 깔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학교가 그 시장통로 끝머리에 있지 않는가. 파리채로 생선 반티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나는 좀 멀어도 어머니의 가판을 피해 한길로 둘러 다녔다. 하루 이틀도 아닌지라 어머니인들 내 못된 심사를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저녁 밥상머리에 둘러앉으면 공부를 잘하는 내가 자랑스럽다며 등까지 토닥여 주셨다. 그렇게 또 물색없는 아들은 오디처럼 까맣게 탄 어머니의 속내를 외면한 채, 감자밭 이랑처럼 깊게 패인 당신의 이마에 엄대 하나를 더 그었다.

고등학교는 대구로 유학을 했다. 방학이 끝나면 어머니는 자취를 하는 내가 먹을 반찬이며 쌀자루를 챙겨 함지박에 담았다. 그리고는 쌀말 무게를 훌쩍 넘기는 그 함지박을 이고 산길을 올랐다. 신작로까지 십 리 길이지만 쉬는 법이 없었다. 버스에 짐을 냉큼 올려주고는 차가 산모롱이를 돌아갈 때까지 빈 함지박을 이고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눈바래기 하시던 어머니. 그제야 철이 드는 것일까. 그 모습이 왜 그리 눈에 밟히던지….

노점에서 좋은 목을 차지하는 건 오직 힘이다. 온갖 악다구니와 실랑이가 끊이지 않는 곳이 장바닥이 아니던가. 생존경쟁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덤빌 때마다 체구가 적은 어머니는 함지박 하나로 버텨내었을 것이다. 바람막이도 없이 종일 정물처럼 쪼그리고 앉아 떨이를 외치다 보면 쇳몸인들 당하겠는가. 몸을 함부로 내돌린 탓이리라. 이순 중반에 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환자복 속에 얼비친 몸은 검불처럼 말라 있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갈대는 흔들리지만 결코 약한 식물이 아니라"고. 묵은 갈대는 속에 품은 새끼 갈대가 바람에 깔리지 않고 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을 때 비로소 몸을 뉜다. 어머니가 그랬다. 목발로 버티는 반쪽 수족이지만 텃밭까지 가꾸며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도록 잘 견뎌내셨다. 막내가 일가를 이룬 후에야 이승에서 할 일을 미친 듯 우리 곁을 훌쩍 떠난 것이다. 임종을 앞두고 나를 불렀다.

"못난 어미 만나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걸 안다. 가슴에 담아두지 말거라. 누구보다 맏이인 네가 고생이지."

링거 꽂힌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순간 예리한 칼날로 가슴살을 씀벅 베인 듯 뜨끈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어머니의 마음 저울은 아직도 당신의 남루한 행색이 부끄러웠던 푼수를 향하고 있었다. 아들이라는 음표로 어머니를 춤추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입신을 핑계로 언제 어머니의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본 적이 있었던가. 할말을 잊은 나는 맞잡은 두 손 위로 닭똥 같은 눈물만 펑펑 쏟아부었다.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는다는 의식이 칠칠재다. 그 재를 올리고도 나는 아직 어머니를 놓아드리지 못하고 있다. 함량 미달의 불초, 내 자신이 싫다. 자식이란 늘 누군가의 불효자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평생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으로 살았다는 것이 슬프다. 아내가 내 속을 읽었는지 유리판을 올려 차탁으로 쓰겠다며 함지박을 고이 승용차로 모신다. 가슴이 시릴 때마다 따스한 홍차 한 모금 음미하며 어머니를 그릴 것이다.

석양이 산정에 걸린다. 돌아가야 할 시간, 굽진 언덕길을 자동차로 오른다. 봄을 물고 있던 산새 한 마리가 악쓰는 엔진 소리에 놀라 포로롱 허공을 가른다. 헛것을 본 것일까. 함지박에 얼굴을 묻은 어머니가 저만치 앞서 고개를 오르고 있다. 타박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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