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책] 내가 알던 사람
샌디프 자우하르 지음 / 글항아리 펴냄

[책] 내가 알던 사람
[책] 내가 알던 사람

40년대 할리우드 스타 리타 헤이워드는 1980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1987년에 생을 마감한다. 헤이워드의 딸은 "엄마의 병이 알코올중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치매 진단을 받고서야 지옥 같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미국 알츠하이머협회는 매년 '리타 헤이워드를 추모하는 치매 기부모임'을 열고 있다. 헤이워드 덕분에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내 아버지도 일흔 여섯에 치매 판정을 받았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그 사이 아버지는 전국을 배회하셨다. 인천과 수원과 천안과 강릉과 구포 등 전국의 파출소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아버지를 모시러 간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서 돌보는데 한계가 있으니 요양병원에 모시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굳은 의지는 변할 줄 몰랐다. 나는 너무 힘이 들었지만, 남들에게 아버지의 나약하고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를 설득할 순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책에 등장하는 헌신적인 입주생활도우미 하윈더의 조언도 꼭 내 어머니의 말과 같았다. "요양원에선 어르신께 주사를 놓을 거예요. 여기선 내가 차와 간식을 내드리지만."
심장내과의사 샌디프 자우하르의 '내가 알던 사람'은 알츠하이머인 아버지를 7년간 지켜보는 아들의 간병 기록인 동시에 애끓는 사부곡이다. 저자는 전문의다운 시선으로 부친의 질병을 추적하는 공부를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알츠하이머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샌디프는 1976년 '우수 과학 인재' 자격으로 이민 길에 올라 유전공학자로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부친에 대해 "아내와 어린 세 아이를 데리고 대륙과 바다를 건너 이민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전히 경외감이 든다. 하지만 그토록 무모한 위험을 감수했던 남자가 인생의 마지막 행보를 아름답게 정리할 수조차 없게 된 작금의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면서도 시종 정제된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가족 중에서 가장 냉철하면서 희망을 놓지 않던 저자조차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아버지의 임종이 다가오자 흔들린다. 양친을 향한 두 아들과 딸의 헌신과 애정에 감탄하며 읽던 나 역시 마음이 무너져내린 대목.

「"이젠 떠나셔도 돼요, 아버지." 라지브 형은 이렇게 속삭였지만, 아버지는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는 내심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고통을 놀랍도록 꿋꿋이 견뎌냈으니까.」

감히 이 책에 대한 섣부른 평가나 왈가왈부할 권리가 내겐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 절망 앞에서도 최대한 자제하고 감내하는 가족의 내적 고통이 보이기 때문. 알츠하이머와 싸우는 노년의 부모를 둔, 혹은 앞으로 노년의 생을 살아야 할 모든 이들을 향한 경구이자, 부친의 영전에 바치는 고해성사. 아들 샌디프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일곱 해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아버지의 치매는, 존엄성을 해치고 우리 인생을 수치스럽게 하는 일종의 불경한 기운처럼 비쳤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정신의 황폐는 자연스러운 현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또한 그러므로 치매는 우리가 결국 피할 수도 없는 장애와 붕괴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그리 이질적이지도, 부자연하지도, 비인간적이지도 않다는 것을."(339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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