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찬란한 욕망과 폐허

모나코/ 김기창 지음/ 민음사 펴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고 장담했는데 일주일을 호되게 앓았다. 코로나도 안 걸린 내가 감기에 걸리다니. 앞으로는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말을 매일매일 실감하는 삶이 될 것이다. '모나코'의 노인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노인이 욕망하는 젊은 여자와 아이가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여자의 남자가 찾아와 인터폰으로 자기 아이와 여자가 이곳에 있느냐고 묻고는 노인이 그렇다고 답하자, 이렇게 말한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166쪽) "남자는 노인에게 고맙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167쪽) 젊은 남자의 한 마디로 경기에서 이기고 승부에서 진 꼴이다. 세월은 아킬레스건이었다. 노인은 참담했을 것이다. 죽을 날이 머지않은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에 불과한데다가 무성욕자로 전락한 자신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김기창의 장편소설 '모나코'는 포기할 수 없는 욕망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다 고독사에 이르는 어느 노인의 이야기다. 작가는 노인 주위로 그를 돌보는 도우미 덕과 유부남의 아이를 낳은 미혼모 진을 포진시킨다.

한국사회에서 노인은 동정과 연민과 관리의 대상이었으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이미지를 품은 무기력한 타자였다. 반면 '모나코'의 노인은 사회적 발언권을 가진 경제주체인 동시에 욕망을 드러내는데 스스럼없는 욕망기계이다. 아내와 사별했고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었으며 이제는 수영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해산물 파에야를 직접 요리해먹고 몬테크리스토 시가를 피우며 클래식을 즐기는 부유한 노년의 삶이다. 진과 덕과 캐리어할멈과 구멍가게 노인과 신문보급소장으로 상징되는 중산층 이하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사는 남자다. 노인은 상대에게 비웃을 기회를 줌으로써 빈틈을 넓히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틈이 생기면 갖은 비아냥거림과 독설을 퍼부어도 상대방은 아무것도 방어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121쪽) 상대의 틈이 삶과 생존이라면, 노인의 틈은 욕망이다. 나이 값 못한다고 비난 받을 욕망이 노인에겐 외려 큰 무기였다.

다른 노인들이 삶과 싸우며 생존을 걱정할 때 노인은 진을 욕망하고 모나코 행을 꿈꾼다. 문제는 쇠락하는 육체일 뿐. 진이 머리를 기댔을 때, 두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할 정도라면 좀 곤란하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김기창은 견줄 바 없이 풍요로운 노인의 삶을 하드보일드 필치로 풀어내더니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그러니까 두 번의 사건. 진을 찾아낸 상대남자가 "다행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정신적 패배를 맛보고, 예전 자신이 복부를 가격했던 20대 남자에게 배를 맞고 쓰러진 이후로 우울증에 시달리며 "급격하게 쪼그라든다."(191쪽) 정신과 육체의 싸움에서 모두 진 노인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어느 누구도 원망할 것 없는 죽음이었고, 놀랄 것도 없는" 죽음을….

간결한 문체로 선명한 서사를 유지하는 '모나코'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직관적이다. 김기창은 씨네필이 아니고서는 떠올리기 힘든 단어(비트 다케시와 KINO로 추정되는 폐간된 영화잡지가 꽂인 서재 등)를 곳곳에 드러낸다. 부유한 노인의 백일몽 같은 욕망은 만개 직전에 좌절과 죽음으로 서둘러 봉인된다. 노인은 모나코에 가지 못한다. 모나코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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