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신라 사람 장보고처럼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 취재본부장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도 훌륭한 기업가라고 할 만한 분들이 많다. 특히 신라시대의 장보고 같은 위대한 존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천 년 전 해상무역로를 개척해 중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멀리 동지나해 깊숙이까지 그 세력을 뻗치면서 상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일대를 누비는 절대적인 힘의 무역상이었다. 중국 사서나 일본 고서에도 장보고는 그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 중에서)

호암은 장보고를 소환, 우리 역사의 중심에 세운 사람이다. 1938년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설립, 해외무역을 통해 크게 사업을 일궈 나간 호암은 먼 옛날 신라시대에 살면서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던 해상무역왕 장보고를 주목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에 대한 조명을 건의했고 박정희 정부를 시작으로 역대 모든 정부에서 이른바 '장보고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남극 과학기지에 장보고 이름이 붙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 이름이 장보고함이다. 우리나라 잠수함 등급은 장보고로 시작되며 국제기구가 명명하는 태평양 해역의 해상에도 장보고 이름이 들어가 있다.

호암을 시발로 해서 우리는 물론, 세계가 장보고를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 것은 먼 옛날 통일신라시대에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고, 세계를 호령하기 위해서는 육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바다 제패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선각자적 신념을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장보고는 해적이 쏘다니는 살벌한 해상 질서를 바로잡았고, 신라-당나라-일본을 연결하는 항로까지 개척,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냈다.

장보고를 제대로 알아 봤던 호암도 바다에 천착했다. 우리 경제 발전의 역사는 포스코가 세워진 포항을 비롯해 바다와 접한 임해공업단지의 성공과 함께 다져졌는데 호암은 오늘의 울산공업단지를 태동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호암이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을 무렵, 정부에 건의해 울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도록 했다. 이후 울산은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 지역에 포함돼 석유화학산업은 물론,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주창했던 호암은 1977년, 조선업도 시작했고 글로벌 회사인 삼성중공업으로 키웠다.

대한민국을 반도 국가라고 하는데 우리 지도를 제대로 살펴보면 사실상 해양 국가다. 지정학적으로도 그러하지만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경제 구조를 감안할 때 수출입 물동량의 99%가 넘는 비율이 컨테이너든, 벌크 형태로든 바다를 통해 오간다. 장보고가 오래전에 했던 것처럼 바다를 장악할 능력을 갖지 않고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정부와 기업인들이 바다의 위력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덕분이다.

예멘 후티 반군의 선박 공격으로 홍해에서 위험이 불거지면서 개방경제 국가 대한민국이 불안해지고 있다. 지난달 EU발 해상 수입 운송비는 그 전달에 비해 한 달 새 40% 가까이 올랐다. 바닷길 혼란은 우리 경제에 초대형 악재다. 포항에서 유럽으로의 바다 지름길인 북극 항로 개척을 위한 행보에 속도를 올려야 하고 이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바다에 대한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미국, 영국, 일본 등 바다를 잘 아는 나라는 모두 선진국 대열에 올랐고 강대국이 됐다.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 신라 사람 장보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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