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단편영화는 송혜진의 '안다고 말하지 마라'와 김희진의 '수학여행' 그리고 윤가은의 '콩나물'이다. '콩나물'은 당시 7살이던 연기 천재 김수안이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콩나물을 사러 나간 '보리'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로, 순수한 아이의 눈에 비친 처음 만나는 세상을 수채화처럼 곱게 채색한 걸작 단편. 영화를 보자마자 윤가은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꽂혔다.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나 그냥 놀고 싶은데, 그럼 언제 놀아?" 하던 준이의 명대사가 빛나는 장편 '우리들'의 감독도 윤가은이었다.
영화감독이 책을 내는 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글 잘 쓰기로 정평이 난 박찬욱은 여러 권의 책을 냈고, 김지운과 류승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윤가은의 책에는 뭔가 다른 세상이 있을 거 같았다. 제목부터 '호호호'다. 호불호가 아니라 호호호라니. 자신이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라서 이렇게 붙였다는 것. 모든 영화를 여름에 찍은 건, 추위를 못 견디는 체질에다 학사 일정상 여름에 촬영을 진행해야 했고, 해도 길고 일조량이 충분해 영화촬영에 좋다는 말로 주어진 환경을 긍정하는 사람. 땡볕 내리쬐는 여름날, 디렉팅하기 힘든 아역배우를 데리고 아이들 영화를 찍어온 동력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호호호'는 윤가은 영화의 바탕이 담긴 자양분을 하나씩 꺼내어 소개하는 일종의 What's In My Life 라고나 할까.
자축으로 시작해 이불킥으로 끝난 생일의 추억에서 키득대다가, 저자가 인생드라마를 밝히는 대목에 이르면 아연실색한다. 그러니까 윤가은이 꼽는 인생드라마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으로 2개 시즌에 걸쳐 장장 603화를 방영했다고. "애정 뒤엔 희생이, 희생 뒤엔 배신이, 배신 뒤엔 복수가, 복수 뒤엔 전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전쟁 뒤엔…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허공에의 외침만 남았다."며 이 드라마에 매료된 이유를 밝힌다.
흥미롭고 놀라운 건 무려 15쪽에 걸쳐 신나게(이 꼭지를 쓰면서 신나했을 저자의 얼굴이 상상될 정도다.) 써내려간 장난감과 만화, 특히 60-80년대 유행한 명랑만화를 다룬 꼭지다. 길창덕, 윤승운, 신문수, 박수동 화백의 이름이 등장할 땐 나도 모르게 와,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릴 적부터 만화와 문방구를 드나들며 자기만의 상상력을 키우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 여자아이들의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된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윤가은은 영화감독이 된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며 걷는 일에 대해 말한다. 산티아고 순롓길을 다녀와서도 의심과 회의를 품은 저자는, 결국 만족할만한 성취는 이루지 못했어도 행복이 없었던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밑줄 그을만한 말. "그 모든 순간들에 나는 아주 다양한 맛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행복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부지런히 꿈꾸지도 않았겠지." 그렇지! 각자 부지런히 꿈꾼 모든 것은 목적지를 향하는 동안에도 행복할 거라 믿었기 때문 아닐까.

청소를 좋아하고, 공책을 사 모으고, 어딘가 방문할 때면 꼭 빵 봉지를 손에 들고, 슬플 땐 별자리를 보는 영화감독 윤가은. "어쨌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눈이 크게 떠지고 세상이 활짝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라는 문장을 읽으며 나는 재삼 읊조린다. 이런 사람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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