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날을 맞아 어린이집 알림장에 짧은 감사 인사를 남겼다. "우리 아이를 예뻐해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복직 후에도 안심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쓰고 나니 마음이 조금 뭉클했다. 누군가 우리 아이를 함께 돌봐 주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안심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잘 지내고 있겠지"라고 믿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평범한 부모들의 일상은 그런 믿음 위에서 굴러가는지도 모르겠다. 감사 인사를 적고 나니 문득, 그런 안심을 쉽게 누리지 못하는 부모들이 떠올랐다.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장애 아동 부모들이다. 장애 아동 부모들 역시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 돌봄 기관에 맡긴다. 다만 그 과정은 훨씬 어렵고 절박하다. 특수학교는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고, 일반학교 특수학급 역시 과밀 상태다. 자리가 없어 일반학급에 먼저 배치된 채 특수학급 자리를 기다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부담은 가족의 삶 자체를 바꿔 놓기도 한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맞는 교육 환경을 찾아 삶의 터전을 옮긴다. 실제 한 가족은 특수학급과 돌봄 자리를 따라 범어동에서 칠곡으로, 다시 중구와 남구로 이사를 반복했다. 어렵게 학교를 보내고 나서도 마음을 놓기는 어렵다. 새 학기마다 어떤 인력이 배치될지, 아이가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마음을 졸인다. 인력이 부족할 때면 부모가 직접 학교를 오가며 아이의 이동과 화장실 이용을 돕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어머니는 결국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수업 중 돌발 상황이 생기거나 아이의 이동, 안전 문제로 부모가 직접 와야 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언제 학교에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직장 생활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늘 상시 대기 상태 같았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물론 현장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은 존재했다. 특수교사와 실무 인력은 충분하지 않고, 학교 역시 제한된 인력 안에서 운영된다. 통합교육이 확대되고 있지만 학생별 특성과 지원 수준은 모두 다르다. 교사와 실무사, 부모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 현장에서는 "누가 더 지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두고 서로의 자리를 걱정하는 일도 벌어진다. 구조가 감당해야 할 문제들이 종종 개인 사이의 갈등처럼 흘러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변화의 움직임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학교 단위 통합 지원 체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대구에서도 통합교육지원단 운영과 수준별 특수학급 확대 같은 변화가 진행 중이다. 해외처럼 학교 안에서 교사 지원과 학부모 상담, 외부 기관 연계를 함께 조정하는 체계의 필요성 역시 꾸준히 제기된다. 결국 중요한 건 부모 개인의 희생만으로 버티는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함께 웃고 여행을 떠나고, 아이 손을 잡고 추억을 만드는 가족의 풍경이 넘쳐 난다. 하지만 어떤 가족에게 하루는 여전히 긴장과 대기, 미안함 속에서 흘러간다. 알림장에 남겼던 편지를 다시 읽어 봤다. "덕분에 안심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이 문장이, 언젠가는 어떤 가족에게도 당연한 말이 되면 좋겠다.
2026-05-17 12:40:44
[데이터로 보는 세상] 썰렁한 아빠 농담의 반전… 아이 '회복탄력성' 키웠다
주말 저녁, 뜬금없는 농담으로 가족들을 웃기려는 아버지가 있다. "아빠 또 시작이네"라는 아이들의 핀잔이 쏟아지지만, 그 어설픈 '아재 개그'가 사실은 아이 마음속에 평생을 버틸 '행복의 근육'을 키우고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북대학교 아동가족학과가 발표한 〈아버지의 유머스타일이 아동의 행복감에 미치는 영향〉 은 아버지의 유머가 자녀 발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데이터를 통해 분석했다. 연구진은 대구·경북 지역 초등학교 4~6학년 아동과 아버지 460쌍을 대상으로 심층 조사를 진행했다. ◆ 개그맨 아빠가 아니더라도 이번 연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결과는 의외로 '직접효과의 부재'였다. 연구진은 아버지의 유머를 타인과 유쾌하게 관계를 맺는 '사회적 유머',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긍정성을 유지하는 '자기확장 유머', 스스로를 낮추거나 망가뜨려 웃음을 유발하는 '자기패배 유머' 세 가지로 나눠 분석했다. 하지만 세 가지 유머 모두, 아동의 행복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아빠가 개그맨처럼 아이를 크게 웃긴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아이의 근본적인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아빠의 농담은 '즉효성 행복 버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아빠의 유머는 무의미할까. 데이터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아빠의 유머는 아이에게 직접 행복을 주입하기보다, 아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두 가지 능력인 '사회적 유능감'과 '자아탄력성'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사용하는 아버지의 '사회적 유머'는 아이의 사회적 유능감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간접효과를 보였다. 아빠가 사람들과 유쾌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 역시 관계 맺기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자기확장 유머' 역시 아이의 사회적 유능감과 자아탄력성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빠의 농담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몸으로 가르치는 일종의 생활 교육이었던 것이다. ◆ 자학개그? 아빠가 하면 좋아! 흔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자기패배 유머'가 의외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보통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바보처럼 행동해 웃음을 만드는 방식은 자존감을 낮추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자기패배 유머는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아버지의 자기패배 유머는 아동의 사회적 유능감을 매개로 행복감을 높이는 간접효과를 보였고, 자아탄력성을 통한 효과 역시 확인됐다.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 대신, 일부러 망가지고 실수하며 웃음을 만드는 아빠의 모습은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아빠도 완벽하지 않구나", "실수해도 괜찮구나"라는 메시지가 아이 마음속 불안을 낮추고, 결국 세상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에 대해 "아버지의 유머는 아동의 사회적 관계 형성, 정서적 자기조절, 긍정적 자아개념, 삶의 만족도 등 다양한 발달 영역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더 많은 정보와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데 몰두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 연구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조금 다르다. 아이를 행복하고 단단하게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비법이 아니라, 저녁 식탁에서 오가는 사소한 농담과 웃음, 그리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편안한 관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재미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 순간에도, 아빠의 '썰렁한 농담'은 조용히 아이 마음속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6-05-15 14:20:00
"고쳐주세요" 한마디에 뚝딱! 장난감 병원 13명 의사들
5살 남자아이가 쭈뼛쭈뼛 문을 연다. 손에는 낡은 자동차 장난감 하나가 꼭 쥐어져 있다. "고쳐주세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얼룩지고 닳은 장난감 곳곳에는 아이가 얼마나 오래 이 물건과 함께했는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곳은 대구에서 유일한 '장난감 병원'이다. 장난감을 받아 뚝딱 고쳐내는 13명의 의사 선생님이 있다. 아이의 동심의 곁에 선 어른들이 있는 곳. 지난 30일 기자는 달서아이꿈센터에서 운영·지원하는 장난감 병원을 방문했다. ◆ 고장난 장난감의 '응급실' 드라이버, 건전지, 크고 작은 나사들이 어지럽게 놓인 작업대. 고장난 장난감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이곳에서 연신 다급한 목소리가 오간다. "정쌤, 이거 안되겠는데요." "권쌤, 저걸로 한번 뚫어보죠."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기 한 시간여. 장난감에서는 마침내 불빛이 켜지고 소리가 흘러나온다. "딱 고쳤을 때 희열이 정말 크다. 아이가 고쳐진 장난감을 안고 펄쩍펄쩍 뛸 때는 더 그렇다." 장난감 병원 기술 고문 김영석 씨(63)의 말이다. 철로 정비 일을 하던 그는 은퇴 후 이곳에서 '기술 고문' 역할을 맡고 있다. 장난감 고장의 대부분은 비교적 단순하다. 끊어진 전선, 녹슨 건전지 단자, 느슨해진 스위치, 먼지가 낀 전기기판 등이 주요 원인다. 다만 전자기판이 복잡한 장난감은 수리가 쉽지 않다. 건반 악기나 학습용 전자 장난감이 대표적이다. 김 씨는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하지만 안 될 때도 있다"며 "그럴 때면 아이들이 실망할까봐 더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수리가 어려우면 '상급 병원(?)'으로 보내기도 한다. 달서아이꿈센터 유창우 관장이 직접 손보는 단계다. 김 씨는 "장난감 병원의 아이디어도 유 관장의 관심에서 시작됐다"며 "쉬는 날에도 나와 수리를 할 만큼 진심이다. 장난감 병원 원장님답다"고 웃었다. ◆ 배워서 고친다… 기술 문외한 이곳이 더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장난감을 고치는 13명의 '의사' 대부분이 원래는 공구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고쳐주고싶다' 는 일념 하나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다. 권혁환 씨(67)는 "처음엔 드라이버 이름도 몰랐다"며 "지금은 고장 진단부터 수리, 테스트까지 혼자 해낸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 부산의 한 장난감 업체 전문가에게 한 달간 집중 교육을 받으며 기술을 익혔다. 공구 사용법부터 스위치 작동 원리, 기본적인 전기 지식까지 차근차근 배웠다.드라이버와 인두기, 전압·전류 측정기, 전선 피복기, 납땜 도구 등 장난감 수리에 필요한 장비도 생각보다 다양했다. 기본 공구조차 낯설던 이들은 직접 도구를 다뤄보고, 고장난 장난감을 분해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수리 기술을 몸으로 익혀갔다. 갈수록 손에 익는 노하우도 쌓이고 있다. 정현희 씨(47)는 "처음에는 하나씩 뜯어보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여러 종류를 다뤄보니까 이제는 어느 부분이 고장났는지 감이 온다"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수리 시간도 많이 줄었다. 예전에 고쳐봤던 장난감은 원인을 금방 파악해서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단순 수리 넘어 '자원순환'까지 장난감 병원의 역할은 단순한 수리에 그치지 않는다. 쉽게 사고 쉽게 버려지는 장난감은 대부분 플라스틱 폐기물로 남는다. 이곳에서는 고장난 장난감을 고쳐 다시 기부하거나 저렴하게 판매하기도 한다. 수리가 불가능한 장난감은 부품을 분리해 재사용하고, 캐릭터는 키링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한다. 버려질 뻔한 장난감이 또 다른 형태로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달서아이꿈센터 관계자는 이를 두고 "아동복지를 넘어 자원순환까지 함께 고민한 결과"라며 "달서구청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구 유일의 장난감 병원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경산 등 타 지역에서도 일부러 찾아오고, 출장 수리 요청도 들어온다. 이종윤 씨(73)는 "북구에 고장난 장난감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직접 가서 고친 적도 있다"며 "힘들어도 보람이 더 크다"고 말했다. ◆ 무보수로 왜? "추억 잇는 의미있는 일" 이곳의 장난감 의사들은 대부분 자녀를 다 키운 세대다. 그래서인지 장난감을 고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과거가 떠오른다. "아이들 어릴 때가 많이 생각난다. 동요 나오는 장난감 을 고칠 때면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 보수도 없이 시간을 쪼개 이어가는 봉사지만, 이들에게 이 일은 단순한 수리가 아니다. 고장난 장난감을 고치며 아이들과의 추억까지 함께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고쳐줘서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우리가 더 하고 싶다." 버려질 뻔한 장난감이 다시 움직이고, 아이의 웃음이 되살아난다. 장난감을 고친다는 것은 단순한 수리가 아니다. 아이의 기억을 이어주고, 어른의 추억을 다시 꺼내는 일이다. 이 작은 병원에서는 오늘도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2026-05-08 14:30:00
[창간 80년,격동 80년] "경제냐, 자존심이냐"…6월 거리로 쏟아진 분노
"민족적 민주주의를 확립하자." "굴욕 외교 반대!" 1964년 6월 3일, 서울 도심은 학생들의 외침으로 뒤덮였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들의 분노는 곧 시민들로 번졌다. 단순한 학생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적 저항으로 확산됐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경찰과 학생이 충돌하는 와중에도,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방패와 곤봉에 맞서며 학생들은 끝까지 구호를 외쳤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하나둘 거리로 나왔다. 그날의 거리는 '경제 성장'과 '민족 자존심'이 정면으로 부딪힌 현장이었다. ◆ '돈이 필요했던 나라' 배경에는 냉혹한 현실이 있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경제성장'을 정통성으로 내세웠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수준의 빈곤에 놓여 있었다. 산업화를 추진할 자금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했고,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경제권 형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국·일본·대만·베트남 등을 묶는 '반공 경제 블록'이다. 이 흐름 속에서 정권이 주목한 카드는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김종필은 1962년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과 협상을 통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도출하며 청구권 자금 문제를 정리했다. 이후 평화선·어로 문제까지 타결되며 국교 정상화는 급물살을 탔다. 정부에게 한일회담은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에 가까웠다. ◆ "굴욕이다" 국민들은 반대 문제는 과정과 내용이었다. 회담은 국민 눈에 '납득하기 어려운 협상'으로 비쳤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이어진 강제 동원과 자원 약탈 등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은 가장 큰 반발을 불러왔다.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명확히 묻기보다 '청구권 자금'이라는 경제적 보상 형태로 정리되면서, 역사적 정의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컸다. 독도 문제 역시 국민 정서를 자극한 대목이었다. 영유권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정부가 일본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됐다. 여기에 협상 과정 전반이 국민에게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도 논란을 키웠다. 주요 내용이 비공개로 진행되면서 '밀실 외교'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국민적 공감대 없이 중요한 국가 간 합의가 추진되고 있다는 불신이 커졌다. ◆6월 3일, 분노가 거리에서 터지다. 정부가 내세운 것은 '선(先) 경제 발전, 후(後) 민주화'였다. 하지만 학생들과 시민들은 달랐다. 경제보다 역사와 자존심을 먼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간극은 결국 거리에서 폭발한다. 시위는 빠르게 확산됐다. 학생들의 행동에 공감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학생 운동'은 '국민 저항'으로 번졌다. 이에 정부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수많은 학생이 체포·구금됐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도심 곳곳이 통제됐고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시위는 꺾이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민족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외침은, 억압 속에서도 계속됐다. 6.3 항쟁은 한일회담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남긴 흔적은 컸다. "정부 정책에 대해 시민이 저항 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느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민주화 운동의 토대가 됐다. 4.19 혁명 이후 주춤했던 학생운동은 다시 살아났고, 이는 훗날 유신체제 저항과 민주화 요구로 이어졌다. 또한 정부 역시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이후 외교 정책에서 '국민 감정'은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는다. 6·3 항쟁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큰 사건이었다. 경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 자존심 사이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선택을 고민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2026-05-08 12:44:00
한물간 한국 레슬링… '초통령' 됐다고? 'PWS' 인기 비결은
오랜만에 만난 조카가 휴대폰 화면에 푹 빠져 있다. 상대를 번쩍 들어 올리는 리프팅 기술에 환호하고, 공중에서 펼쳐지는 묘기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링, 가면, 챔피언 벨트까지. 영락없는 프로레슬링이다. 초딩이 뭔 레슬링이냐며 휴대폰을 뺏으려들자 조카가 소리친다. "요즘 이거 안 보는 친구들 없어!" 부모 세대는 어리둥절하다. "우리 때 이왕표, 박치기왕 나오던 그 레슬링 맞아?" 아이에게 여러번 되묻기도 한다. '한물간 스포츠'로 여겨지던 프로레슬링이 어떻게 어린이들 사이에 급속도로 인기를 끄는 것일까. '뽀로로' '티니핑'에 이어 새로운 '초통령'으로 떠오른 PWS. 그 인기의 이유를 들여다봤다. ◆ PWS 매진행렬 '이례적 성과' 오는 9일 열리는 'PWS 레슬네이션2'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약 3천 석 규모의 체육관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는 2천700석 이상이 이미 판매됐다. 국내 프로레슬링이 여전히 일부 마니아 문화로 여겨지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성과다. PWS는 2018년 설립된 국내 신생 프로레슬링 단체다. WWE식 캐릭터 중심 연출을 도입하며 꾸준히 성장해왔다. 2023년까지만 해도 소규모 공연장에서 70~100명의 관객을 모으던 수준이었지만, 2024년 2천100명, 2025년 8천900명으로 관객이 급증했다. 이희정 PWS 총괄이사(57)는 "작년 최대 유료 관객 3천명을 기록했다. WWE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례"라며 "WWE의 타지리, 리카르도 로드리게즈, 멜리나, 돌프 지글러 또한 주목해야 하는 단체로 꼽기도 했다"고 말했다. ◆ 초통령 비결은 뭘까 이러한 인기의 중심에는 어린이 관람층이 있다. 실제 관객 대부분은 6~12세 아이들과 부모들이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열광할까. 답은 단순하다. 쉽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선'과 '악'이 명확히 나뉜다. 복잡한 서사가 필요 없다. 누굴 응원해야 할지,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아이들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단순함이 몰입을 만든다. 김건우(12) 군은 "악당을 물리치는 레슬러들의 모습이 통쾌하다"며 "모두 같이 악당에게 손가락질 하며 야유할때 재밌다"고 말했다. 의상과 색깔도 의도적으로 단순화했다. 진개성은 초록색, 시호는 빨간색, 최영준은 파란색 등 캐릭터마다 색을 달리해 어린이들이 한눈에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총괄 이사는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색깔과 캐릭터를 명확히 나눴다"고 설명했다. 과격함도 줄였다. 2024년부터는 위험한 기술과 자극적인 연출을 대폭 덜어냈다. 이 총괄이사는 이를 두고 "강한 자극은 금방 질린다. 특히 아이들은 더 그렇다"고 말했다. 대신 응원 문화는 더 커졌다. 악역이 등장하면 야유가 쏟아지고, 영웅 캐릭터가 나오면 "이겨라!"라는 함성이 터진다. 조용히 관람하는 공연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참여하는 무대에 가깝다. ◆ 단순한 재미 넘어 '투영의 대상' 단순해서 빠져들지만, 그 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서사는 아이들에게 '재미'를 넘어선 의미를 만든다. 이들은 경기를 보며 자연스럽게 자신을 투영한다. 이은수(13) 양은 "반칙하는 악당 선수를 물리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약한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른바 '권선징악' 구조의 스토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평가다. 학부모 김아람(40) 씨는 "경기를 본 아이가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며 "백 번 말하는 것보다 경기 한 번 보고 오는 게 더 효과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투영'은 때로 현실의 어려움을 버티는 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PWS 측이 공개한 한 사연도 이를 보여준다. 백혈병 투병 중이던 한 아이가 힘든 치료 과정 속에서도 PWS 경기를 보며 웃음을 되찾고, 그 안에서 힘과 희망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해당 자녀의 아버지는 "힘든 치료 중에도 PWS를 볼 때만큼은 아이가 웃었다"며 "그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고 말했다.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영웅'은 단순한 연출을 넘어 하나의 세계로 작동된다. '악당'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아이들은 '영웅'을 보며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때로, 현실을 버티는 힘이 된다. ◆ 부모와의 대화 창구 부모들의 반응도 예상 밖이다. 한때 '과격하고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던 프로레슬링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실제 공연은 아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참여형 콘텐츠에 가깝기 때문이다. 학부모 이민건(50) 씨는 "처음엔 너무 과격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맘에 혼도 많이 냈다"며 "하지만 직접 가보니 생각보다 건전하고 재밌어서 안심했다"고 말했다. 게임에 빠져 있던 아이가, 집에서 아빠와 레슬링 흉내를 내며 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생기고, 함께 노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도 필요하다. PWS 측은 "선수들의 기술은 오랜 훈련의 결과"라며 "가정에서 무리하게 따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당부했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유튜브를 통해서만 경기를 접할 수 있는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꼽힌다. 공식적인 중계 채널이나 플랫폼 확대를 바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이 총괄이사는 "현재 일부 방송사와 프로그램 편성을 논의 중이며, OTT 플랫폼과도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 유초등생 부모들, 아이와 친해지려면 알고 가자! PWS 주요 캐릭터 한눈에 보기 진개성 : "개성만점!"을 외치는 정의의 히어로. 초록색 캐릭터시호 : "시호떡!" "10센치!"… 얍삽하고 얄미운 악당. 빨간색예니 : "애생소녀" "웅디강디꿍야"… 밝고 귀여운 발랄 캐릭터. 분홍색포이즌로즈 : '독장미'라 불리는 위민스 챔피언. 강렬한 블랙 콘셉트이랑 : "산산조각!"을 외치는 단순·직진형 악당. 비주얼도 강점하다온 : '상남자' 콘셉트의 힘 캐릭터
2026-05-08 11:45:00
태서가 태어나고 맞는 어버이날은 조금 다르다. 자식이기만 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부모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태서에게 효도를 기대하긴 이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 챙기고, 태서도 챙기느라 정신없는 어버이날을 두 해째 보내고 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은행에 들러 용돈을 뽑고, 식당을 찾아 예약 전화를 돌린다. 그 사이,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 옆에서 조용히 사고를 치는 나의 아들. 컵에 먹겠다고 해서 물을 줬더니, 언제 쏟았는지 바닥은 이미 물바다다. "어휴~ 태서야 엄마 바쁜데 왜 그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으로, 발로 물장구를 치며 더 엉망을 만든다. 그런데 이어지는 한마디에 웃음이 난다. "엄마 미앙…" 요즘 부쩍 말이 늘었다. 혀 짧은 소리로 "미안"을 건네는 걸 보고 있자니, 자식은 존재만으로도 효도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닦아." "치워." 본인이 쏟아놓고는, 정작 치울 생각은 없고 엄마에게 명령만 내린다. 가만 보니, 요즘 할 수 있는 말들이 전부 엄마를 부려먹는 말이다. 효도는커녕, 태서를 모시느라 바쁜 어버이날. 그 탓에 예전 돈방석이나 돈부채 같은 용돈 이벤트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님은 전보다 더 크게 웃는다. 이벤트가 없어도, 맛있는 식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 웃음의 중심에는 늘 태서가 있다. 그러니까 오늘의 효도는, 내가 아니라 태서가 다 한 셈이다. 나는 그저 효도를 '전달'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2026-05-08 11: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대구의 명소 탄생… 근대 유원지 조성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마지막 순서인 4부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 개발, 그리고 문화 및 행정 시설의 외곽 이전 전략에 따른 도시의 질전 변화를 다룬다. (편집자 주) 주택과 업무지구, 상업시설은 최소한의 도시 조건일뿐이다. 만족스러운 도시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위락시설도 필요했다.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원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진다. 도시와 조금 거리가 있더라도, 수변 경치를 구경할 수 있고 넓은 토지를 보유한 곳에 위락시설 건설이 검토된다. 즐길거리를 찾아 헤매는 시도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이뤄졌다. 1933년. 화원유원지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성대한 개장식을 연다. 산과 물, 꽃이 있는 절경을 구경하려는 이들로 유원지는 복잡해졌다. 신식 유희거리인 육상트랙, 골프장, 미끄럼틀, 요정, 수영장도 인기몰이의 비결이었다. 시간이 흘러 1972년, 지역 주류기업인 금복주가 토지를 매입하면서 한 차례 변화를 맞는다. 동물원과 조경공간을 추가 신설하며 '화원동산'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1993년에는 대구시로 기부채납됐다. 1930년대 화원유원지가 최신식 유락시설로 인기를 끌자, 동촌유원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도 빗발친다. 동촌유원지는 1918년 일제에 의해 유원지로 최초 조성된 비교적 오래된 유락시설이다. 이후 한국 전쟁기에 피란민들이 유원지 근처에 정착하면서 더욱 번성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케이블카와 구름다리와 같은 놀거리가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끊기질 않았다. 이후 수차례 개선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1980년대 대구시는 동촌유원지를 3차례에 걸쳐 개선하겠다는 게획을 밝힌다. 수목을 추가로 심고, 도로와 광장을 확장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계획이 모두 마무리된 건 2010년대에 이르러서다.
2026-05-01 14:3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먹방 보다 동선…시니어 관광객이 본 대구
요즘 관광은 '먹으러' '보러' 다니는 시대다. 맛집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고, 사람들은 사진 한 장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시니어 관광객의 기준은 다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저렴한 비용과 안전한 이동이다. '어디가 맛있나'보다 '얼마나 편하게 갈 수 있나'를 먼저 따진다.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시니어 관광에 대한 맞춤형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요는 늘고 있지만 도시의 관광은 여전히 '젊은 사람의 기준'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공간디자인학회가 펴낸 '시니어가 선호하는 대구광역시 관광지'를 통해 시니어 관광의 현실을 짚고, 개선 방향을 함께 제시해 봤다. ◆ 대구 관광지 1위 '달성공원' 시니어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구 관광지는 달성공원(13.64%)으로 나타났다. 이어 경상감영공원(11.50%), 두류공원(8.56%), 수성못(8.02%), 동화사(7.22%) 순으로 집계됐다. 도시공원과 호수 같은 자연 자원부터 전통시장, 종교시설, 심지어 교통 거점까지 포함되며 특정 유형에 쏠리지 않는 '다층적 관광 패턴'이 확인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니어들이 관광지를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평가 지표(5점 만점)에서 '저렴한 비용'이 4.36점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혔다. 이어 '안전'이 4.22점, 자원 매력성이 4.05점을 기록했다. 반면 일반적인 관광의 핵심 요소로 여겨지는 먹거리(3.75점)나 볼거리(3.69점)는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보였다. 신체 기능 저하로 인해 보행 환경의 안전성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여가 활동 시 경제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시니어 세대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 인기 관광지의 민낯 하지만 '선호'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컸다. 연구진이 무장애 관광 전문가와 함께 시니어 선호 대구 관광지 19곳을 직접 조사한 결과, 관광 편의성 점수에서 평균을 넘긴 곳은 단 4곳에 불과했다.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곳은 문양역(69.23점)이었고, 반대로 동화사(7.69점)와 청라언덕(8.33점)은 10점에도 못 미쳤다. 특히 19곳 중 17곳이 시니어 및 장애인을 위한 관광정보 제공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경사로, 휴게공간, 다목적 화장실 등 기본 시설 역시 '부분 적합' 수준에 머물며 실제 이용에는 불편이 뒤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시니어 관광 환경이 여전히 이용자 중심으로 설계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결과 속에서 눈길을 끄는 곳이 있다. 지하철역인 문양역이다. 문양역은 선호도 20위권(1.87%)에 포함됐을 뿐 아니라, 관광 편의성 평가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곳은 단순한 환승 공간이 아니다. '노인건강테마역'으로 조성돼 로컬푸드 매장, 식당 픽업 서비스, 인근 마천산 둘레길과 산림욕장까지 연결된다. 관광·쇼핑·운동·사교가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구조다. 결국 시니어들이 찾은 것은 '명소'가 아니라 불편함 없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 ◆ 초고령사회, 관광의 기준 바꿔야 연구진들은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시니어 관광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현재 관광 환경을 시니어 중심으로 재설계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교통수단 확대, 휴게공간 확충, 보행권 내 관광지 발굴, 큰 글자 안내물 등이 시급한 과제로 꼽혔다. 또한 단순 방문을 넘어 건강·취미·학습을 결합한 프로그램 부족 역시 문제로 지적됐다. 이에 연구진은 문양역 사례를 의미깊게 봤다. "문양역 사례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평탄한 길, 충분한 쉼터, 이해하기 쉬운 안내, 그리고 체험 프로그램까지. 이 네 가지가 갖춰질 때 관광지는 '구경하는 곳'에서 '머무는 곳'으로 바뀐다"라며 "결국 시니어 관광의 경쟁력은 화려한 콘텐츠가 아니라 얼마나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2026-05-01 10:30:00
명문대 공대→대기업 개발자 관두고 '버스기사?'…이런 청년 수두룩 [커버스토리]
인서울 대학에 진학했다. 소위 '취업이 보장된다'는 명문대 공대였다. 첫 직장은 공기업. 이후 그 경력을 바탕으로 연 매출 1조원대 반도체 기업으로 이직해 개발직군으로 일했다. 누군가에겐 탄탄대로로 보이는 이력이다. 하지만 그는 돌연 퇴사를 선택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대구로 내려오자 주변에서는 "창업이라도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예상 밖이었다. 2024년, 그는 버스 기사가 됐다. 바야흐로 취업 시즌. 고용 한파를 넘어 '취업 빙하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1990~2000년대생 청년들 사이에서는 "열심히 준비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푸념이 낯설지 않다. 유망하다는 말에 뛰어들면 열풍이 채 식기도 전에 인공지능(AI)이 대체를 이야기하고, 한때 '안정적'이라 불리던 직업도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스펙을 쌓아도 문은 더 좁아졌다. 이런 시대, 일부 청년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성별의 경계를 넘고, 나이의 기준을 깨며 '남들이 정해준 길' 대신 자기 기준으로 직업을 고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이 정한 길보다, 내가 오래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역시 하나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청년들이 더 이상 '정답'이라 불리던 길만을 좇지 않는다는 점이다. ◆ 취업 '정석' 보단 나의 '만족' 이승준 씨(29)는 2년차 버스기사다. 한양대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하고 고연봉 취업까지 했던 그에게 "왜 이 직업을 선택했냐"는 질문은 늘 따라붙는다. 전공을 살려 취업했지만, 보수적인 조직 문화가 걸림돌이 됐다. 이 씨는 "개발직군은 개인의 성과가 중요한데도 상명하복식 문화 속에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해갔다"며 "성장이 정체된다는 느낌이 컸다"고 말했다. 40대 중반 이후 희망퇴직이나 권고사직을 마주하는 업계 현실도 고민이었다. 반면 버스기사는 정년이 보장되고 근무시간이 명확해 워라밸을 지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는 "수평적인 분위기도 매력으로 느껴졌다"며 "겉으로 보기엔 있어 보이는 직업이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터전"이라고 했다. 버스기사는 교대 근무 체계로 하루 운행 시간이 비교적 명확하다. 야근이나 불규칙한 초과근무가 잦은 일반 사무직과 달리 일정이 안정적이다. 정년 역시 60세 이상으로 길어 장기적인 생계 설계가 가능하다. 직장 내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이 씨는 "사무직은 환경이 쾌적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경험해본 사람만 안다"며 "혼자 운행한다는 특성도 요즘 젊은이들이 버스기사로 눈을 돌리는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버스기사는 직장 상사·동료와 부딪히지 않고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다. 노선 안내나 인사같은 기본적인 응대 외엔 승객과 대화할 일도 많지 않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30세대 버스 기사는 2022년 7천559명에서 2025년 1만234명으로 3년 사이 약 37% 증가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청년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맞닿아 있다. 과거 버스 기사는 하루 15시간 이상 운행한 뒤 다음 날 쉬는 '격일제' 근무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준공영제 도입 이후 '2교대제'로 전환된 지역이 늘면서 근무 여건도 개선됐다. 일반 사무직처럼 하루 9시간 안팎으로 일하고, 주 5일 근무에 주당 근무시간은 40~50시간 수준인 곳이 많다. 이 씨는 "이전에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스 운행을 시작하며 내 행동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기쁘게도, 혹은 슬프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의 발'이 되어 누군가의 여정을 돕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남들 시선 뭐가 중요해요" 요즘 청년들은 직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선'도 가볍게 넘는다. 성별에 따라 나뉘던 직업의 경계 역시 흐려지는 모습이다. 김보라 씨(21)는 특수용접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여성 용접사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앉아서 하는 일은 맞지 않았고,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선택이었다. 용접은 좀처럼 여성 기술자를 찾아보기 힘든 대표적인 금녀의 영역으로 알려진다. 웬만한 남성도 견디기 힘든 체력적 부담과 그보다 더 힘들다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실제 현장은 녹록지 않았다. 여성 용접사가 드문 탓에 숙소나 근무 환경에서의 불편함은 물론, 체력적인 한계와 주변의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김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대를 더 크게 받거나, 반대로 '왜 굳이 힘든 일을 하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감수해야 할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김 씨는 "한창 꾸미고 싶은 나이인데 방진마스크 마찰로 여드름이 잘 생기고, 파마를 해도 안전모나 용접면에 눌려 금방 풀린다"며 "작업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겪는 일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힘든 날에는 퇴근하고 눈물로 보낸 적도 많지만, 그만큼 버텨온 나 자신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며 "지금은 배우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남성 네일아티스트 손기환 씨(42)의 선택도 같은 맥락이다. 카페 창업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접한 네일아트에 흥미를 느끼며 이 길에 들어섰다. 그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성 네일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은 시작부터 장벽이었다. 예약까지 하고 찾아왔다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돌아간 손님도 있었다. 그는 "이해는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 고객의 취향을 이해하기 위해 패션과 디자인을 따로 공부하고, 트렌드를 꾸준히 분석했다. 노력은 결과로 이어졌다. 손 씨는 "손님들이 '지금까지 받아본 곳 중 가장 낫다'고 말해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남자라는 점이 오히려 차별화된 강점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네일을 받고 나서 남자친구에게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고 전해주는 고객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공통된 기준은 분명하다.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가'다. 김 씨도 손 씨도 말한다. "돈도 중요하지만, 결국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관심과 재미를 따라가다 보면 실력은 쌓이고, 그것이 결국 나만의 경쟁력이 된다" ◆ 사무실 밖으로… 블루칼라 재발견 사무실 대신 현장을 선택하는 20~30대 청년들도 늘고 있다. 기능직·운송·물류 등 이른바 '블루칼라' 직종으로의 유입이 눈에 띄는 흐름이다. 과거에는 현장직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고용 안정성과 근무 유연성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일자리로 재평가되고 있다.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선호 직종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박세라 씨는 23세에 주택금융공사를 자발적으로 퇴사하고 자동차 정비사의 길을 택했다. 고졸 상태에서 공기업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주변에서 '안정적인 선택'을 포기한 사례로 여겨졌다. 하지만 박 씨의 기준은 달랐다. 그는 "반복적인 행정 업무를 하면서 '이 일이 과연 나에게 맞는가'라는 고민이 컸다"며 "내 능력으로 직접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보상을 얻는 일이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무직보다는 경험과 기술을 쌓아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고 덧붙였다. 부모와 지인들의 만류도 이어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편해질 텐데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퇴사를 선택했다. 이후 6개월간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 과정을 수료한 뒤 곧바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변화하는 노동시장 속에서 블루칼라 직종을 새로운 대안으로 삼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5년차 자동차 정비사로 근무 중인 황신원 씨(27)는 "AI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흐름 속에서도 정비는 완전히 대체되기 어렵다고 본다"며 "기술은 평생 내 것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황 씨는 전공을 바꾼 사례다. 실용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뒤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자동차 정비에 흥미를 느끼며 진로를 전환했다. 이후 미래자동차공학과 야간 과정에 진학해 현재 4학년 심화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몸은 힘들지만 지금의 삶이 더 만족스럽다"며 "회사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훨씬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실제 한국고용정보원이 한국직업정보에 있는 520개 직업을 대상으로 2024년과 2027년의 AI에 의한 직무 대체율을 분석한 결과, 화이트칼라가 비(非)화이트칼라보다 더 급격하고 강력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과거 자동화에 취약할 것으로 여겨졌던 현장직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덜 대체되는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일자리 시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최근 변화는 긍정적인 현상"이라며 "개인이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용가능성'을 어떻게 키워나가느냐가 중요한 변수"라고 덧붙였다.
2026-04-25 15:30:00
어릴수록 위험…당장 스마트폰 내려놔야 할 이유 [데이터로 보는 세상]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가 말 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에 빗대어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다'는 말이 있다. 잠들기 전 '잠깐만' 보려던 스마트폰이 한두 시간을 훌쩍 넘기는 일, 이제는 낯설지 않다. 손에서 놓기 어려운 이 작은 화면은 어느새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과의존 위험도 함께 커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있을까. 2024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를 통해 그 실태를 짚어봤다. ◆ 줄어든 중독, 커지는 격차 조사 결과 우리나라 전체 스마트폰 이용자의 과의존위험군 비율은 22.9%로 나타났다. 2021년 24.2%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3년 연속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감소 추세 이면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과의존위험군의 수는 줄어드는 반면, 어린 연령층에서는 오히려 과의존이 심화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연령대별로 보면 청소년(42.6%)의 과의존위험군 비율이 가장 높았고, 유아동(25.9%), 성인(22.4%), 60대(11.9%)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만 10~19세 청소년은 전년(40.1%) 대비 2.5%p 상승하며 전 연령대 중 가장 큰 증가폭을 기록했다. 이들의 특징은 단순한 이용 증가를 넘어 '조절 실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적절한 스마트폰 이용시간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문항 점수가 가장 높았다. 또 가족과의 심한 갈등, 학업 수행의 어려움 등 일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아들 역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만 3세부터 9세까지 유아동의 과의존위험군 비율은 25.9%로 전년(25.0%) 대비 0.9%p 상승했다. 반면 40대 이상에서는 과의존위험군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며 연령대 간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 부모 편의가 만드는 첫 중독 왜 나이가 어릴수록 스마트폰 과의존위험군 비율이 높아질까. 이들을 훈육하는 학부모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학부모들은 주요 원인으로 '맞벌이 증가 등으로 인한 훈육 시간 부족'(36.7%)을 가장 많이 꼽았고, '스마트폰 이용 지도 방법을 몰라서'(32.8%)가 뒤를 이었다. 여기에 '부모의 편의에 의한 사용 방임'(17.1%)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실제 사용 상황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확인된다. 만 3~9세 자녀를 둔 학부모의 42.7%는 공공장소에서 자녀를 통제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여준다고 응답했다. 부모의 가사·직업·대인관계 활동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29.4%로 뒤를 이었다. 부모의 편의를 위한 선택이 반복되면서, 아이가 스마트폰에 의존하게 되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 짧고 강한 콘텐츠의 위험성 과의존위험군에서 이용량이 가장 크게 증가한 콘텐츠는 영화/TV/동영상(16.4%)이며, 이어서 SNS(13.8%), 게임(13.5%) 순으로 나타났다. 동영상 시청 내용은 게임(29.9%), 푸드(21.6%), 스포츠(20.8%) 순으로 집계됐다. 눈에 띄는 점은 '숏폼 콘텐츠'의 이용 양상이다. 과의존위험군의 숏폼 이용률은 86.8%로 일반군보다 7.2%p 높았다. 이용 플랫폼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유튜브 숏츠 이용 비중이 가장 높았지만, 과의존위험군에서는 틱톡(28.7%)과 인스타그램 릴스(16.5%) 이용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다. 특히 온라인 동영상 시청 시간의 절반 이상을 숏폼에 사용하는 비율이 35.7%로, 일반군(19.4%)보다 크게 높았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 중심의 소비가 과의존을 더욱 강화하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었다. ◆ 어떤 노력으로 떨치고 있나 이용자들은 스마트폰 과의존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디톡스'를 시도하고 있다. 가장 많이 실천하는 방법은 보행 중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하는 것으로, 전체 스마트폰 이용자의 63.6%가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외에도 종이책 읽기, 명상, 운동 등 대체 활동(23.6%), 이용 시간 확인(20.6%), 사용 시간·공간 제한 설정(19.5%) 등이 주요 방법으로 꼽혔다. 흥미로운 점은 과의존위험군(86.6%)이 일반 사용자군(85.4%)보다 오히려 디지털 디톡스를 더 많이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앱을 통해 이용 시간을 확인하는 비율도 위험군이 더 높았다. 이는 과의존 상태에 놓인 이용자일수록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더 적극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알고 있지만 끊기 어려운' 스마트폰 사용의 특성도 함께 드러낸다. 겉으로는 감소세지만, 실제로는 더 어린 세대로 번지고 있는 스마트폰 의존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2026-04-24 15:30:00
돌준맘·돌끝맘 "아이 첫 생일 위해"… 커지는 돌잔치 시장
"언니 돌끝맘이잖아. 너무 부럽다~ 돌스냅은 어떻게 했어? 돌준맘 좀 도와줘." 돌끝맘은 돌을 끝낸 엄마의 줄임말로, 돌준맘은 돌을 준비하는 엄마를 지칭한다. 아이의 첫 생일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준비에 나서는 이들이다. 친한 동생의 SOS에 나의 '돌준맘 시절'을 떠올려봤다. 아, 일년도 채 안 된 일인데 왜 이렇게 까마득한 옛날 같은지. ◆ 바쁘다 바빠 '돌준맘 스케줄' 돌준맘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장소 예약도, 사진관 섭외도 아니다. 맘카페에 들어가 'OO지역 돌잔치'를 검색하는 것이다. 대구 돌잔치만 쳐도 돌끝맘들의 생생한 후기가 쏟아진다. 요즘 돌잔치 준비는 대략 이렇다. 음식점을 예약하고, 그 공간을 꾸밀 돌상 업체를 찾는다. 한복이나 턱시도, 드레스 등 의상도 대여한다. 여기에 돌잔치를 기록할 사진사를 섭외하고, 하객들을 위한 답례품까지 준비한다. 아차차! 돌잔치 전에 촬영해 사용할 '스튜디오 사진'도 따로 찍는다. 당일 촬영은 '돌스냅', 사전 촬영은 '스튜디오'로 구분되는 셈이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생각처럼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출산율은 낮다는데 돌잔치 예약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실제 대구 지역 인기 돌잔치 장소에 문의한 결과, 2~3개월 뒤 주말 예약은 이미 대부분 마감된 상태였다. 10월 돌잔치를 앞두고 장소 선정을 위해 이른바 '돌잔치 투어'를 돌고 있다는 김은주 씨(29)는 "요즘은 음식보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장소가 인기"라며 "특히 봄, 가을처럼 야외 촬영이 가능한 시즌은 1년 전에 예약하는 경우도 있다. 한옥이나 호텔로 많이들 한다"고 말했다. ◆ '하루'를 둘러싼 시장, 커지는 돌산업 하루에 끝나는 돌잔치지만, 그 하루를 둘러싼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진이다. 돌사진 수요가 늘면서 일반 스튜디오가 돌스냅을 병행하거나, 웨딩 스냅 업체가 아예 돌 시장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많다. 한 스튜디오 작가는 "웨딩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아이 사진은 성장 과정마다 이어질 수 있어 장기 고객으로 이어진다"며 "요즘은 웨딩보다 아이 시장이 더 유망하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돌잔치 당일 촬영인 '돌스냅' 역시 점점 확장되는 분위기다. 전문 카메라 촬영에 더해 '아이폰 스냅(아이폰으로 찍는 사진)'을 추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최근 돌잔치를 치른 김정주 씨(32)는 "돈이 더 들더라도 남는 건 사진이라는 생각에 카메라에 아이폰 스냅까지 추가했다"며 "한 번뿐이라는 생각이 지출을 결정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카메라와 아이폰 촬영을 함께 구성하는 상품도 등장했다. 메모스냅 대표는 "소규모 돌잔치가 늘면서 오히려 사진에 더 공을 들이는 부모들이 많아졌다"며 "가격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색감과 분위기를 위해 두 가지 촬영을 모두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돌상 역시 변화하고 있다. 생화 장식, 대형 포토존 등 다양한 콘셉트가 등장했고, 풍선 장식과 대형 백드롭을 활용한 포토존이 돌상 규모로 커지는 경우도 흔하다. 호호돌 대표 배영숙 씨는 "전통과 현대 돌상 안에서 어머니들이 다양한 취향에 맞춰 콘셉트를 선택한다"며 "실물 떡이나 생화를 추가하면 비용이 더 들지만 이 역시 선호도가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 '소규모·고비용'의 역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돌잔치 시장은 커졌을까. 이는 소비 방식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대규모 모임이 줄고 가족 중심의 소규모 행사 문화가 자리 잡았다. 과거처럼 회사 동료나 먼 친척까지 초대하기보다 가족과 가까운 지인만 초대하는 경우가 늘었고, 그 대신 한 사람에게 쓰는 비용이 크게 늘었다. 이른바 '소규모·고비용' 구조다. 초대 인원은 줄었지만 돌상, 촬영, 공간 연출, 답례품 등에 투자하는 금액이 증가하면서 전체 시장 규모는 오히려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돌잔치 답례품에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다는 이영주 씨(40)는 "과거 수건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유기 주걱, 티스푼, 와인 등 가격대가 높은 선물이 등장했다"며 "인원이 적다 보니 더 좋은 선물을 하게 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럭셔리한 돌잔치를 치르고 싶은 부모가 많아진 이유도 있다. 아이 한명만 낳아 잘 기르지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내 아이의 첫 생일은 돈 안 아끼고 보내겠다는 것이다. 자녀 한 명에게 모든 걸 쏟아붓는 이른바 'VIB(Very Important Baby)'다. 여기에 SNS 영향도 적지 않다. 인플루언서와 연예인들의 호텔 돌잔치가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보여지는 돌잔치'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다. ◆ 잔치 대신 기부, 여행…다양한 모습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돌잔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움직임도 있다. 규모나 형식보다 '무엇을 기념하는 자리인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돌잔치 대신 가족여행을 선택한 안혜영 씨는 "하루종일 아이를 성가시게 하는 것이 과연 아이를 축하하는 일일까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을 위해 아이를 오래 앉혀두기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느꼈다"며 "처음엔 '돌잔치는 해야지'라며 반대했던 부모님도 여행을 다녀온 뒤 오히려 더 만족해하셨다"고 말했다 아이 이름으로 기부를 선택하는 사례도 있다. 일정 금액을 아이 명의로 후원하거나, 돌잔치 비용 일부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방식이다. 셋째 아이의 첫돌을 맞은 김다정 씨는 돌잔치 대신 기부를 택했다. 임신 7개월 만에 1.6㎏의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한 달 넘게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던 경험이 계기가 됐다. 김 씨는 "당시 아이가 무사히 살아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며 "그 시간을 지나며 언젠가는 아픈 아이들을 위해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첫돌을 맞아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마다 돌을 챙기는 모습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 중심은 항상 '첫 생일을 기념하는 마임'이 있다. 돌준맘이든, 돌끝맘이든. 지난 1년, 한 아이를 키워낸 시간은 모두에게 충분히 특별하다. 돌잔치를 어떻게 했든, 그 결론은 결국 하나다. "잘 키웠다, 우리. 잘 해냈다 우리."
2026-04-24 15:30:00
태서가 태어나고 외식 장소가 많이 바뀌었다. 일단 아기 의자가 있어야 하고, 수다쟁이 태서를 고려해 너무 조용하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 부부의 '외식 취향'도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엔 뷔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돈이면 고기나 제대로 된 한 끼가 낫지 않냐는 입장이었다. 이것저것 먹다 보면 괜히 헛배만 부른 느낌도 싫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가장 자주 찾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뷔페다. 이유는 단순하다. '36개월 미만 무료' 〈태서맘 생존기〉를 꾸준히 본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태서는 대식가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는다. 흘러내릴 듯한 볼살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밥태기 한 번 없이 20개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결과다. 뷔폐에 36개월 미만이 무료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기가 뭐 얼마나 먹겠어." 한두 입이면 끝날 거라는 전제다. 하지만 우리 태서는 많이 먹는다. 매운 것만 빼고 거의 다 먹는 태서 덕분에, 뷔페만큼 편한 외식 장소도 없다. 몇 번 다니다 보니 나름의 루틴도 생겼다. 에피타이저로 죽부터 공략하고, 최애 메뉴인 고기로 단백질을 채운 뒤 잡채·튀김·스파게티 등 탄수화물로 배를 채운다. 마무리는 과일과 빵. 완벽한 코스다. 엄마·아빠 입장에선 "돈 아깝지 않은 외식"이자 공짜로 만들어내는 창조경제인 셈이다. 하지만 가게 사장님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태서가 먹는 모습을 보면 이 생각이 절로 난다. "태서야. 양심이 있으면 돈 내고 먹어라" 무한리필 고깃집에 "씨름선수 출입 금지" "운동부 사절" 이라는 안내문이 붙듯, 언젠가 태서가 다녀간 뷔페 어딘가에 이런 문구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36개월 미만, 섭취량에 따라 요금 부과합니다."
2026-04-24 15:30:00
취준생 "일할곳 없다" 기업 "일할사람 없다"…대구 고용시장 미스매치
9일 찾은 한 채용 박람회장. 취업준비생 이모(27) 씨는 한참을 부스를 돌다 발걸음을 멈췄다. "지원할 데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막상 넣고 싶은 곳은 잘 안 보인다." 몇 걸음 떨어진 기업 부스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한 채용 담당자는 "지원자는 꾸준히 들어오는데 막상 현장에서 바로 일할 수 있는 인재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같은 공간에서 나온 두 목소리. 대구의 고용 시장은 지금, 서로를 향하지 않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미스매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해법은 있는 걸까. ◆ 청년들 "괜찮은 일자리가 없다" 대구의 산업 구조를 보면 이유는 분명하다. 제조업 취업자 비중은 2017년 21.7%에서 2024년 19.3%로 줄었다. 반면 보건·사회복지 등 서비스업 비중은 크게 늘었다. 전문가들은 "제조업이나 금융업은 전통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로 여겨진다"며 "제조업 비중 감소는 결국 좋은 일자리 감소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늘어난 일자리의 '질'이다. 보건·복지, 숙박·음식점업 등은 상대적으로 임금과 고용 안정성이 낮은 경우가 많다. 결국 청년들은 노동시장에 남기보다 '쉬었음' 상태로 빠지거나, 아예 지역을 떠난다. 문제는 단순히 산업 구조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좋은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 데다, 남아 있는 일자리마저 수도권에 집중되는 구조가 겹쳐 있다. 대기업들은 인재 확보를 이유로 연구개발(R&D)은 수도권에 두고, 지역에는 생산 기능 중심의 일자리만 남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김기헌 연구원은 "공공기관의 청년고용의무제 이행률이 2019년 90% 수준에서 2023년 70%까지 떨어졌다"며 "이행 점검만으로도 지역 일자리 확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단기적인 채용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연구원은 "더 나아가서는 대기업 유치에만 기대기보다 지역의 경쟁력 있는 중소·중견기업과 청년을 연결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라며 "기업 정보의 신뢰도 제고, 대학과의 연계, 지역 내 성장 생태계 구축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업들 "사람이 없다" 반면 기업들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 역시 단순한 인력 부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 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해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인재를 키웠다. 이른바 '가능성'이 기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업은 장기간 교육을 전제로 한 채용을 부담으로 인식한다. 채용과 동시에 실무에 투입될 수 있는 인재를 선호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AI와 자동화 기술 확산도 변화를 앞당겼다. 자료 조사, 보고서 작성 등 신입의 기초 업무는 상당 부분 자동화와 AI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기업 입장에서 교육이 필요한 신입보다 경험을 갖춘 인력이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됐다. 취준생들도 이를 체감하고 있다. 진학사 캐치 조사 결과 '직무 경험'이 84%로 가장 중요한 취업 스펙으로 꼽혔다. 학력(44%)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이에 취준생들은 자격증, 대외활동, 인턴 경험을 쌓지만 정작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취업 준비 3년 차 김모 씨는 "기업이 말하는 '능동성'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합격 이유도 알 수 없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경력을 쌓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대구 달성군은 청년 인턴 사업 '달성 경만이'를 통해 지역 청년들에게 실무 경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사업은 9.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높은 관심을 끌었다. 선발된 청년들은 올 11월까지 산하 기관에서 프로그램 운영과 홍보 등 실무를 맡는다. 청년에게는 '경험'을, 기업에는 '인력'을 연결하려는 시도다. 대학들도 변화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경북대는 AI 면접실과 현장실습 기반 프로그램을 통해 저학년부터 직무 경험을 쌓도록 지원하고 있다. 영남대 역시 1대1 상담을 통해 학생별 맞춤 취업 전략을 설계하고 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김현우 연구원은 "단순히 양질의 일자리만을 늘리는 정책만으로는 청년 고용률을 높이고, 청년층의 지방 엑소더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라며 "같은 청년층이더라도 인적 자본 수준, 개인 가치관 및 특성이 차별적이므로 이를 고려한 직업·직종·직업형태 등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2026-04-24 14: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재개발 광풍… 도심 부흥과 주택 공급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3부는 근대 산업의 태동부터 공업 단지 조성, 상업 중심지의 변화, 그리고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까지 경제 활동의 공간적 변천사를 다룬다. (편집자 주)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다. 일제에 의해 시작된 토지구획 정리는 1960년대에 이르러 정리됐지만,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며 또 한 번의 구획 정리가 필요해졌다. 공공시설이나 LH와 같은 공공주택이 들어설 부지도 필요해서다. 과거에는 기존 시가지를 개량하는 데 그쳤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개발되지 않았던 도시 외곽을 신도시로 개발해 도시 구역을 확장시키는 식으로 전환된다.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 단독주택의 계획과 시공을 지원해주기 위해 주택공사광고나 시청사 내부에 안내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만큼 새 주택지를 개발하는 데 온 관심이 몰려있던 때였다. 지산동과 범물동, 칠곡과 달서 등 지금도 대구시의 주거 기능을 담당하는 지역들이 이 당시 개발됐다. 균형있는 도시 개발과 저렴한 주택지 공급, 두 마리 토끼를 다잡기 위해 선택한 땅이었다. 태평과 덕산, 동인지구도 뒤이어 개발된다. 곳곳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소규모 저택이 포진돼, 제대로 된 주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서다. 노후하고 불량한 지역을 개발해 도시 기능을 회복하고, 고층 건물을 세워 한정된 토지에 더 많은 인구를 수용하고자 했다. 이들을 포함해 1983년 지구별 계획에 포함된 행정동만 20곳이 넘었다. 이 당시 불량 도심을 정리하고 들어선 업무용 건물의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북성1지구를 정비한 후 1980년대에 들어선 대우빌딩이다. 지금은 대구스테이션센터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오랜기간 대구역 인근에서 판매와 위탁, 근린, 업무시설을 담당해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며 개발 열풍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더 이상 새로운 개발 지구는 지정되지 않았고, 2000년에 이르러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2026-04-24 12:50:00
토끼처럼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어느 날부터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눈은 희어지고, 귀는 잘 들리지 않는다. 강아지의 삶에서 예쁘고 건강한 시기는 생각보다 짧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 짧은 시기만을 원한다. 늙고 병든 순간, 외면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반려동물 중 한 주인 밑에서 평생을 보내고 생을 마감하는 비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함께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입양이 어려운 노견에게 손을 내미는 선택이다. 병든 몸을 돌보고, 치료 비용을 감수해가며 외로운 시간을 함께 견뎌준다. 임지언 씨는 2024년 4월, 10살 순봉이를 입양했다. ◆ 아무도 관심 없는 노견 입양 임 씨가 순봉이를 처음 만난 건 유기견 공고 속 사진이었다. 최소 8살로 추정되는 말티즈였다. 무지개별로 떠나보낸 반려견과 닮은 모습에 먼저 눈이 갔다. 여기에 어린 강아지를 선호하는 시장에서 입양이 되지 못하고 안락사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움직였다. 보호소는 끊임없이 유기된 동물들로 채워진다. 자리가 비지 않으면, 공고 기간이 지난 개체는 안락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지자체 동물보호소에는 10만 마리 이상의 유기·유실동물이 입소했고, 이 중 절반가량이 보호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가운데 2만 마리 이상은 비용 문제 등으로 인도적 처리(안락사)를 당했다. 임 씨는 곧바로 보호소로 향했다. 보호소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공고번호를 말하자 한 강아지가 짐짝처럼 들려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는 결심했다. "입양하지 않으면 이 아이는 여기서 생을 마칠 수도 있겠구나." 그날, 순봉이는 가족이 됐다. ◆ 몸 곳곳 망가진 노견, 병원비 부담 그렇게 데려온 노견에게는 '순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온몸은 뼈가 드러날 만큼 말라 있었고, 체중은 2kg 남짓에 불과했다. 소변에는 피가 섞여 나왔다. 곧바로 병원을 찾았고,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심장병은 B단계에서 C단계로 진행 중이었고, 방광에는 큰 결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슬개골, 치석, 눈 핵경화, 곰팡이성 피부염 등 몸 곳곳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아파서 버려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견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어린 강아지보다 영양제와 사료, 생활 습관까지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현실적인 부담도 적지 않다. 약값만 한 달에 30만~40만 원이 들어간다. 임 씨는 "부담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 그럼에도 왜?…"마지막 기억 행복하길" 하지만 노견만의 매력도 분명하다. 이미 세상을 겪은 만큼 성격이 안정적이고, 차분하다. 임 씨는 "다 큰 강아지를 입양했더니 배변 훈련이 잘 돼 있어 편했고, 아기 강아지처럼 끊임없이 에너지를 쏟기보다 함께 있을 때 차분하게 곁을 지켜주는 점이 오히려 좋았다"고 말했다. 어린 강아지처럼 사고를 치지 않아 혼자 두는 시간에도 부담이 적다는 점도 차이로 꼽힌다. 무엇보다 임 씨가 노견을 입양한 가장 큰 이유는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이 아이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기억만큼은 차갑고 배고픈 보호소 뜬장이 아니라 따뜻하고 사랑받는 시간이었으면 했다"며 "모든 치료를 다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떠나는 순간까지 덜 아프고 좋은 기억을 안고 갔으면 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말했다. ◆ 노견 임보, 사실상 호스피스 개념 노견을 임시로 보호하는 이들도 있다. 입양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노견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임시보호는 원칙적으로 새로운 가족을 찾아 보내는 과정이지만, 노견의 경우 입양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들은 '언젠가'를 기대하기보다, 당장의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임시보호를 선택한다. 김보리 씨는 지난해 보호소에서 구조된 17살 노견을 임시보호 했다. 김 씨는"당시 강아지는 얼굴에 농이 흐르고 있었고, 치아와 잇몸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였다. 몸 곳곳에는 종양도 있었다"며 "사실상 호스피스로 시간을 보내던 아이였다"고 말했다. 임시보호 기간이 끝난 뒤 그 강아지는 다시 구조처로 돌아갔고, 김 씨는 최근 해당 개체의 호스피스를 제안받아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호스피스 임보'는 입양을 전제로 하는 일반 임시보호와 달리, 아픈 노견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곁을 지키는 돌봄을 의미한다.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입양에 가까운 형태다. 현장에서는 개인의 선의에 의존한 돌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부 단체를 중심으로 노령·중증 구조견을 위한 호스피스 센터 설립 필요성이 논의되는 이유다. 김 씨는 "쉼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구조견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년기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 아이들의 마지막이 조금이라도 더 안락하고 존중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2026-04-24 12:15: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대구 중소기업 일·생활균형 성적표 '낙제점'
대구지역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일·생활균형 성적표가 '낙제점'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화융합학회가 발행한 '중소기업 근로자의 일·생활균형 수준과 촉진 요인'에 따르면 대구 중소기업 근로자의 전체 일·생활균형 점수는 100점 만점에 49.2점으로, 중간 기준(50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연구진은 기존의 가족 돌봄 중심 정책을 넘어 근로자 개인의 '성장'을 지원하고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조직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이직을 줄이고 직장 만족도를 높이는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 일에 파묻힌 '성장' 근로자들이 가장 크게 균형이 깨졌다고 느끼는 영역은 '성장'이었다. '일·성장균형' 점수는 42.9점으로 전체 영역 중 가장 낮았고, 만족도 역시 5점 만점에 2.90점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는 과도한 업무로 인해 개인의 목표를 잊거나 자기계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성별에 따른 차이도 나타났다. 여성 근로자는 '여가'와 '성장' 영역에서, 남성 근로자는 '가정'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균형도를 보였다. 이는 대구 지역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 구조와도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 상사 눈치 가로막힌 워라밸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장벽은 '리더십'이었다. 일·생활균형을 지원하는 기업문화 요소 가운데 리더십 만족도는 5점 만점에 2.77점으로, 의사소통(2.94점)과 업무문화(2.89점) 등 모든 항목을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상사가 직원의 여가와 가정생활을 얼마나 배려하는지를 묻는 항목 점수는 100점 만점에 48.2점에 그쳤다. 이는 휴가나 유연근무를 신청할 때 '상사의 눈치'를 보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상황은 더 열악했다. 1~4인 규모 초소형 기업의 경우 리더십 수준은 41.4점, 만족도는 2.47점으로 전체 평균보다 크게 낮았다. 인사관리 체계가 부족한 소규모 기업에서는 대표의 인식과 판단이 곧 조직 문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실제로 활용하기 어려운 '그림의 떡'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 일·가정 양립 넘어 '일·성장'으로 연구진은 정책 방향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존의 '일·가정 양립'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기계발과 자아실현까지 포함하는 '일·성장 균형'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성장 기회는 직장 만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중소기업의 인력 유출을 막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 차원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분석 결과 직장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었다. 상사와 직원이 성장과 업무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제도를 눈치 보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실질적인 워라밸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기업 특성에 맞는 맞춤형 컨설팅과 관리자 인식 개선 지원을 강화해, 중소기업이 자율적으로 일·생활균형 문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그래픽〉 ▶일·생활균형 수준 (100점 만점) 전체 일·생활균형: 49.2점일·가정균형: 61.2점일·여가균형: 43.5점일·성장균형: 42.9점 ▶기업문화 수준 (100점 만점) 전체 기업문화: 51.2점업무문화: 54.2점의사소통: 51.1점리더십: 48.2점
2026-04-17 13: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 칠성과 고성 업무 단지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3부는 근대 산업의 태동부터 공업 단지 조성, 상업 중심지의 변화, 그리고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까지 경제 활동의 공간적 변천사를 다룬다. (편집자 주) 대구는 야금야금 덩치를 불렸다.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구 도심부가 많은 인구를 전부 수용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거주 조건을 갖추지 못한 불량 주택에 지내는 이들도 크게 늘어났다. 땅도, 주택도, 사무실도, 교통망도 모두 부족해지는 때였다. 새로운 요구에 따라 도시의 구조도 재개편된다. 이 가운데 토지를 개발하며 개인이 과도한 이익을 남기거나, 제대로 된 계획 없이 토지가 난개발 되는 걸 막기 위해 '공영개발'의 개념을 도입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할 수 있고, 불량한 지구를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었다. 1980년대 이후 대구장기종합개발계획에 공영개발의 개념이 포함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다. 대상지는 안심과 월배, 불로, 지산, 송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에 몰려있던 대구시의 중심이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형태로 개편 된다.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공업단지의 효능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히려 2, 3차 산업을 키우기 위해 업무단지가 더욱 필요해지는 시점이었다. 이곳 역시 재개발의 대상으로 점찍혔다. 1993년 대구시는 북구 침산동과 고성동 일대 15만5천평 일대를 업무단지로 개발하기로 한다. 제일모직이 5만2천평, 대한방직이 6만평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다. 용도를 변경해 사무실과 전문상가, 호텔, 백화점과 공원, 주차장 등 업무지원 시설을 입지시키려 했다. 이에 발맞춰 대한방직은 비산동 염색산업단지로 공장을 이전하고, 제일모직은 구미로 이전했다. 제일모직 자리에는 2000년대 초 오페라 하우스가 들어오고, 2015년 창조경제 혁신센터 및 삼성창조캠퍼스가 세워진다.
2026-04-17 13:00:00
[창간 80년,격동 80년] 거리 나온 대구 고등학생…민주주의 출발점
1960년 2월 28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학교에 갈 이유가 없는 주말, 대구 시내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령'이 내려졌다. "토끼 사냥을 간다", "영화를 단체 관람한다"는 등의 명분이 내세워졌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선거를 앞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통제였던 것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이에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첫 거대한 외침이었다. 이후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며,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됐다. ◆ 1960년, 거리로 나온 학생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은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각종 불법과 부정이 동원됐다. 특히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은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 가운데 대구는 선거 판세를 가를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1956년 선거에서 장면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야도(野都)'였기 때문.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대구 수성천 유세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이에 당국은 2월 28일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대상은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대구여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등이었다. 학생들은 일요 등교 방침이 알려지자 각 학교별로 긴급회의를 열었다. 부당함을 지적하며 학교 측에 철회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2월 27일 오후, 경북고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대구고·경북대사대부속고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하며 행동에 나섰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 시민들 움직인 학생들 외침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들은 불의를 규탄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봉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도 움직였다.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고, 상점 주인들은 물을 건넸다. 일부 시민들은 경찰의 탄압을 피해 학생들을 숨겨주며 시위에 동참했다. 나머지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날 약 2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됐고, 교사들 역시 책임을 추궁받았다. 이승만 정권 아래 움츠려 있던 대구 지역 언론도 학생들의 용기에 힘입어 2·28 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60년 2월 28일자 매일신문은 당시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정견 발표회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의 모습을 1면에 배치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정권 교체에 대한 기대를 생생하게 전했다. 이어 1960년 3월 2일자 대구매일신문 지면에는 2·28 대구 학생 의거 이후의 시위 상황이 비중 있게 다뤘다. 다가오는 3·15 부정선거를 앞둔 정치적 긴장 속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와 여야 간 치열한 선거 구도가 신문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당시 한국 사회를 뒤흔든 격변기의 분위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A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과 미국 등 세계 주요 일간지들도 2·28 민주운동을 잇따라 보도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이 국제사회에서도 주목받았음을 보여준다. 2·28 민주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자발적 저항이었다. 외부의 지시가 아닌 스스로의 결단으로 거리로 나선 이들의 행동은, 미래 세대가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 운동은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됐다. 2·28 대구 학생들의 저항은 이후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며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현재 2월 2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있으며, 2·28민주운동기념회관 등을 통해 그 의미가 이어지고 있다.
2026-04-10 12:3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유통과 상업의 심장... 대형 상업 시설과 유통단지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3부는 근대 산업의 태동부터 공업 단지 조성, 상업 중심지의 변화, 그리고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까지 경제 활동의 공간적 변천사를 다룬다. (편집자 주) 지금도 동성로 한복판에서 불을 밝히는 대구한일극장. 한때 이곳은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라, 약속 장소였고 만남의 기준점이었으며 '문화' 그 자체였다.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 체계에 편입돼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지만, 한일극장이 처음부터 거대한 자본에 기대 성장한 것은 아니다. 이 극장은 대구 시민들의 발걸음과 취향, 그리고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동성로 문화의 중심인 '한일극장'의 시작으로 거슬러가보자. 점차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서며 도시의 형태를 갖추던 때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키네마 구락부, 1950년대는 국립 극장으로 불리다가 1967년에야 한일극장이 됐다. 한일극장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이 상당해, 대구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한일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인기에 힘입어, 1969년 아케이드로 증축하기로 했다. 기존 한일극장 건물은 유지하고, 그 주변부에 'ㄱ자' 건물을 짓는 계획이었다. 도면상으로는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중앙부 사각형이 기존 한일극장 건물이다. 도면 중앙에 '관람석 920석, 종전과 동일'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극장은 동성로 방향으로 큰 출입구를 추가로 신설해, 두 건물을 쉽게 오갈 수 있게 했다. 아케이드 건물은 상가로 활용돼, 극장에 방문한 이들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주로 파는 건 외제품이나 다수의 할인상품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시설이 아닌 '종합유통단지'가 등장한다. 도매를 전문으로 하는 대형 업체의 공간이 필요해져서다.자리가 마련되면서 전자상가뿐만 아니라 섬유, 전기재료 등을 취급하는 업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엑스코와 대구종합무역센터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설이 계획돼, 대구 지역에 있는 상공업 업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서울에 편중돼 있던 무역 기능을 지역 독자적으로 갖춰,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하려는 의도였다.
2026-04-10 12:3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같은 '부족' 다른 이유… 대구경북 문화생활 격차
사람은 일하고 먹고 자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삶의 균형과 만족을 위해서는 적당한 문화생활이 필수다. 국가는 이를 보장하기 위해 '문화가 있는 날'을 운영하고, 공연장과 문화시설을 확충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노력에 힘입어, 대구·경북지역 시·도민들은 충분한 문화생활을 누리게 됐을까. 국가통계포털(KOSIS)에 공개된 2025 문화여가활동, 문화여가자원 통계를 바탕으로 그 실태를 들여다봤다. ◆ 낮은 문화 경험 비율 조사 결과, 지난 2025년 평균 문화예술·스포츠 관람 경험률은 57.7%로 나타났다. 관람 경험이 있는 국민은 연간 평균 7.1회를 관람했다. 대구는 관람 경험률은 51.9%로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 다만 평균 관람 횟수는 7.3회로 오히려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 관람하는 사람들의 '충성도'가 높은 구조다. 경상북도는 관람 경험률은 48.5%, 평균 관람 횟수 6.1회로 모두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관람 횟수는 전국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 영화·스포츠 강세, 콘텐츠 편중 뚜렷 대구·경북 지역민이 가장 많이 찾은 문화 콘텐츠는 영화였다. 대구는 관람 경험률 73%, 연평균 4.0회였고, 경북은 76.8%, 연평균 3.7회로 나타났다. 특히 경북은 영화 비중이 높아 문화 소비가 특정 분야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비교적 대구는 스포츠 경기 관람에서 강세를 보였다. 관람률이 35.2%로 전국 평균(28.5%)을 크게 웃돌았고, 특히 남성의 경우 47.7%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은 박물관 관람률이 29.0%로 전국 평균(27.2%)보다 높았다. 전통·전시 중심의 문화 향유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것으로 해석된다. ◆ 공연예술은 여전히 문턱 높아 반면 공연예술 분야에서는 대구·경북 모두 약세를 보였다. 무용 관람률은 전국 평균 2.4%에 비해 대구 1.5%, 경북 1.3%에 그쳤다. 연극·뮤지컬 역시 대구는 16.5%로 전국 평균(20.8%)보다 낮았고, 서울(27.8%)이나 세종(24.5%)과 비교하면 격차가 뚜렷했다. 음악회·콘서트 관람률도 대구는 26.3%로 전국 평균(30.4%)보다 낮았다. 경북은 스포츠 경기 관람에서도 약세를 보였다. 관람률 21.2%로 전국 평균에 못 미쳤고, 인접한 대구와 비교해도 14%p 이상 차이를 보였다. ◆ 만족도 낮은 이유는 달라 비교적 낮은 평균 관람 경험률과 마찬가지로, 대구경북의 여가생활 만족도 역시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매우 만족' 응답률은 전국 평균이 11.5%인 반면, 대구는 8.3%, 경북은 6.9%에 그치며 모두 하위권에 머물렀다. 특히 대구는 '불만족' 응답률도 19.1%로 전국 평균(15.9%)보다 높게 나타났다. 그 이유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지난 2024년 기준 대구의 인구 10만 명당 문화기반시설 수는 4.5개로 전국 평균(6.5개)에 크게 못 미친다. 실제로 '여가시설 부족'을 불만족 이유로 꼽은 비율도 3.1%로 전국 평균(2.1%)보다 높았다. 경북은 상황이 다르다. 인구 10만 명당 문화기반시설 수가 9.0개로 전국 평균을 웃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시설 부족으로 인한 불만족도는 2.6%로 전국 평균(2.1%)보다 높았다. 시설의 수는 충분하더라도, 시설의 지리적 접근성이나 공연 콘텐츠의 질적 수준이 시민들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경북은 여가 불만족 이유로 '건강 및 체력 부족'을 꼽은 비율이 24.9%에 달했다. 전국(16.3%)과 대구(17.0%)보다 크게 높은 수치다. 고령화 등 지역적 특성이 문화 향유 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수치만 놓고 보면, 대구와 경북 모두 문화생활의 관람률과 만족도가 낮은 지역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달랐다. 이제 필요한 건 획일적인 확충이 아니라, 데이터가 보여준 차이를 바탕으로 한 맞춤형 대책이다. 더 가까운 곳에, 더 다양한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이 부담없이 누릴 수 있도록 세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화생활이 일부가 아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일상'이 될 때, 비로소 살기 좋은 도시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2026-04-10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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