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빈틈] '사적 제재'까지 공감하는 사회… 신뢰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최근 온라인에서는 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거나 직접 응징하는 콘텐츠까지 적지 않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이른바 '사적 제재'다. 공권력 대신 개인이 정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은 빠르게 확산하고 있지만, 사실관계가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정보 공개와 과잉 응징은 또 다른 피해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취재에서 만난 스토킹 피해자는 탐정을 찾았고, 사기 피해자는 피해자 모임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았다. 모두 국가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자구 노력'과 사적 제재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면서도,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그 경계 역시 흐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공권력 신뢰 왜 무너졌나 박동균 대구한의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공권력 신뢰의 부분적 이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법과 제도는 존재하지만 피해자가 이를 신속하고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데서 괴리가 발생한다"며 "절차는 정당하지만 보호가 지연되거나 체감되지 않을 때 국민은 '법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고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이 국가기관보다 탐정이나 피해자 모임 같은 민간을 먼저 찾는 이유는 빠르고 구체적이며 즉각적으로 체감되는 대응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며 "공권력이 속도와 밀착성에서 뒤처질수록 비공식 영역이 그 공백을 메우는 구조가 형성된다"고 분석했다. 다만 박 교수는 탐정이나 피해자 모임과 신상공개·온라인 응징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보 공유와 증거 확보, 피해 회복을 돕는 활동은 공권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신상공개나 온라인 응징은 사실 확인 오류와 2차 피해를 낳을 수 있는 사적 제재"라며 "형벌권을 개인이 행사하는 순간 법치주의를 훼손하게 된다"고 말했다. ◆ '신고 이후'까지 책임지는 국가 전문가들은 결국 해법은 새로운 처벌 규정보다 국민이 실제로 보호받고 있다고 체감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박동균 대구한의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국민 신뢰 회복의 핵심은 피해자 보호의 즉시성·통합성·지속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라며 "신고 직후 위험 평가와 긴급 보호, 수사, 사후 회복 지원까지 끊김 없이 연결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피해자가 여러 기관을 전전하지 않도록 통합 지원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으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를 지원하는 해바라기센터와 같은 모델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공권력이 미처 닿지 못하는 영역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민간의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며 "탐정 역시 이미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방치하기보다 관리·감독 체계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지원 현장에서도 처벌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구여성의전화 부설 여성인권상담소 '피어라' 스토킹피해자지원사업부 박진희 팀장은 "피해자들이 실제로 가장 필요한 것은 긴급한 구조보다 안전하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라며 "긴급 보호가 끝난 뒤에도 주거 이전비와 생계비, 취업 지원 등 자립을 돕는 제도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스토킹 피해자는 안전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사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후의 삶을 떠받쳐 줄 제도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며 "피해자가 안전을 위해 생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국가의 역할은 신고를 접수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할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가 실제로 '국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체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권력에 대한 신뢰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26-07-18 08:30:00
[법의 빈틈] 경찰서 나와 탐정사무소로…피해자 국가 밖 향하는 이유
경찰서를 나선 뒤에도 피해자들의 발걸음은 끝나지 않는다. 스토킹 피해자는 하루 100만원이 넘는 비용을 감수하며 탐정사무소를 찾고, 사기 피해자는 온라인 피해자 모임에서 계약서와 송금 내역을 맞춰보며 같은 피해자를 찾는다. 국가의 문을 두드린 뒤에도, 그들은 다시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 제도가 움직이는 시간과 피해자가 견뎌야 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킹 피해자는 수사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재범의 공포를 견뎌야 하고, 사기 피해자는 그동안 사라진 돈을 찾기 위해 계약서와 계좌내역을 모으며 스스로 피해 회복에 나서야 한다. 적법절차는 법치국가의 기본 원칙이지만, 그 시간을 버티는 일은 결국 피해자의 몫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7월 17일은 제헌절이다. 헌법은 국민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를 규정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법에 닿기까지 너무 어렵다", "법은 있지만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제헌절이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국민은 언제 국가의 보호를 '권리'가 아닌 '현실'로 체감할 수 있을까. ◆ 보호받고 있지만 안전하지 않았다 "신고하면 보복할까 두려웠어요" 작년 스토킹 피해를 겪은 김모 씨(28)는 신고를 망설였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러닝을 하던 중 일면식도 없는 남성이 여러 차례 자신을 뒤따랐고, 편의점과 제과점 앞에서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본 뒤에야 스토킹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범해지는 스토킹에 결국 김 씨는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렸고, 진술 조사와 함께 스마트워치 지급과 순찰 강화 등 신변보호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일상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김 씨는 "헬스장도 가지 못했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일조차 무서웠다"며 "제도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들었던 말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거부 의사를 표현했느냐',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는 그런 질문들이 너무 상처였다. 그 사람 앞에서 거부 의사를 밝히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이라고 느꼈졌기 때문이다" 스토킹처벌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며 피해자 보호 제도를 지속적으로 보완해 왔다. 반의사불벌죄가 폐지됐고, 접근금지와 통신금지,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유치장·구치소 유치 등 단계별 잠정조치도 마련됐다. 신고 직후 경찰이 내릴 수 있는 긴급응급조치와 신변보호 제도 역시 확대됐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잠정조치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위험도 평가 결과에 따라 적용되는 보호 수준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접근금지나 연락금지 조치가 내려진 이후에도 "혹시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호소하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피해자 지원 현장에서는 이러한 불안의 핵심을 단순히 '신고 이후의 공포'가 아니라 '일상의 붕괴'로 본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거지와 직장, 생활반경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기존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에도 법원의 접근금지 등 보호조치가 내려진 이후 강력범죄로 이어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도가 마련된 것과 피해자가 체감하는 안전 사이의 간극을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씨는 "법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실제로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 공백을 메운 민간 신변보호 결국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처벌 결과만이 아니다. 신고 직후부터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리고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이 이어지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부 피해자들은 민간의 신변보호 서비스를 찾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탐정법인 JBK 백지연 대표는 "스토킹 의뢰인의 상당수는 경찰에 먼저 신고한 뒤 찾아온다"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혹시라도 가해자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설 신변보호 서비스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사는 시작됐지만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 피해자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백 대표는 "스토킹 사건은 물론 학교폭력이나 신변 위협 사건도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불안하다'며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탐정사무소를 찾는 사람은 여성만이 아니었다. 상가에서 사업을 하던 한 젊은 남성은 윗층 입주민의 지속적인 살해 협박을 받았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가해자가 불구속 상태였던 탓에, 사업장을 옮기는 이틀 동안 사설 신변보호 서비스를 이용했다. 탐정사무소는 방탄복을 착용한 요원들을 배치해 이사가 끝날 때까지 의뢰인을 보호했다. 학교폭력도 비슷하다. 사건이 접수된 뒤에도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은 학교에서 계속 마주칠 수 있다. 불안감을 이유로 보호 서비스를 문의하는 사례가 많다. 신변보호뿐 아니라 증거 확보를 위해 탐정을 찾는 사례도 있다. 스토킹 사건은 반복적인 행위와 위협을 입증하는 자료가 중요한 경우가 많지만, 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탐정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자료를 확보하는 역할을 하지만, 강제 조사권이나 수사권은 없어 국가기관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 백 대표는 "의뢰인들이 경찰을 믿지 못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며 "경찰은 법과 절차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많은 사건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수사 결과보다 '오늘 안전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더 절박한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 경찰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2023년부터 스토킹·교제폭력 고위험 피해자를 대상으로 민간 경호업체와 연계한 신변보호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긴급 상황에서 민간 경호 인력을 투입해 경찰 보호를 보완하는 제도다. 민간경호를 맡고있는 현장요원 이모 씨(30)는 "수도권은 경찰과 민간 경호업체 간 협력 체계가 비교적 잘 갖춰진 곳도 있지만, 경상권은 아직 그런 연계가 활성화되지 않은 편"이라며 "지역별 편차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피해자들이 서로를 찾는 이유 탐정을 찾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피해자들이 만든 상담 모임을 찾고, 온라인 카페와 오픈채팅방에서 같은 피해자를 찾는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유는 비슷하다. 혼자서는 해결 방법을 찾기 어렵고, 국가 제도만으로는 당장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얻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 돈을 잃었는데 왜 사기가 아니라고 하나요." 경찰을 찾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송치 결정을 받았던 한모(34) 씨는 가장 답답했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가구 제작업을 하는 한모 씨는 최근 인테리어 업체로부터 가구 제작을 의뢰받아 납품을 마쳤다. 그러나 약속했던 대금은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 업체는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다 일부 금액만 송금한 뒤 다시 연락을 끊었다. 한 씨는 애초부터 대금을 지급할 의사가 없었던 것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기로 보기 어렵다", "민사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답을 들었다. 일부 금액이 지급된 점 등을 이유로 형사상 사기 혐의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한 씨는 "내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돈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며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법적으로 기망 의도를 입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국 '처음부터 속일 의도가 있었다'는 걸 내가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답답했다"고 말했다. 사기 피해자들이 경찰이나 법률기관 만큼이나 온라인 카페와 오픈채팅방, 피해자 모임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혼자서는 자신의 사건이 단순한 채무불이행인지, 형사상 사기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업체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례를 찾고, 계약서와 거래 내역, 문자메시지, 녹취 등 어떤 자료를 확보해야 하는지 정보를 공유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 대응이나 공동 고소를 준비하기도 한다. 결국 한 씨가 찾은 곳은 같은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비슷한 피해 사례를 공유하고, 계약서와 거래 내역을 비교하며, 어떤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지, 경찰 신고와 민사소송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경험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혼자서는 막막했던 문제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 제도에 닿기 전 마지막 안전망 이처럼 비슷한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고 대응 방법을 공유하는 일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넘어 피해자 모임과 민간단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만든 상담 네트워크가 대표적이다. 어떤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지,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법적으로 무엇을 입증해야 하는지를 함께 찾는다.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의 정태운 공동위원장은 피해자 모임이 생기는 이유를 "같은 피해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 위원장은 "사기 피해는 한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경우가 드물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수법, 같은 가해자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관과 피해자 모임의 역할이 다르다고 봤다. "국가기관은 법과 제도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피해자들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계약서와 자료를 비교하고, 피해가 반복된 구조를 함께 찾아낸다. 혼자서는 보이지 않던 단서가 여러 사례를 모으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정 위원장은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제도보다 먼저 서로를 찾는 이유로 '공감'을 꼽았다. 그는 "어딜 가도 '왜 그런 계약을 했느냐'는 말을 먼저 듣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같은 피해를 겪은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한다. 함께 사건을 들여다보다 보면 경찰이나 변호사보다 사건 구조를 더 깊이 파고드는 피해자들도 생기고, 각자가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역할을 나누면서 해결 가능성도 커진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결국 국가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은 '시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법과 제도가 있다는 이유로 '사기가 맞는지부터 피해자가 증명하라'는 접근이 반복되면 피해자는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좌절하고 돌아온다"며 "제도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를 바라보는 관점과 상담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피해자들이 탐정이나 피해자 모임을 찾은 이유는 국가를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신고 이후의 불안을 견디고, 흩어진 증거를 모으고,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며 다시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스토킹 피해자는 자신의 위험을 설명해야 했고, 사기 피해자는 피해가 사기였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은 공권력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 제도에 닿기 전 피해자들이 기댈 수 있는 또 하나의 안전망이 되고 있었다.
2026-07-18 06:30:00
[내친구 AI] 휴가 준비도 AI 시대…'수백 번 검색' 대신 질문 한 번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여행 계획을 세우는 손길도 분주해지고 있다. 노트북 화면에는 항공권과 숙소, 맛집, 지도, 환율 사이트가 빼곡히 열려 있다. 브라우저 창은 스무 개를 넘고 메모장에는 저장한 링크가 끝없이 쌓인다. 여행 일정을 짜느라 몇 시간을 보내던 순간, 옆에서 한마디가 들려온다. "아직도 그렇게 여행 계획 세워?"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여행 준비의 공식도 달라지고 있다. 여행 날짜와 예산, 동행만 입력하면 일정표부터 이동 동선, 맛집과 카페 추천까지 단 몇 초 만에 제안받는 시대다. '그래도 여행은 직접 찾아봐야 제맛이지.' 반신반의하며 '3박 4일 일본 여행 일정 짜줘'라고 입력했다.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오전부터 밤까지 짜인 일정표와 추천 동선, 식당 목록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 "수백 번 검색 대신 질문 한 번" 생성형 AI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 드는 시간을 크게 줄여준다. 여행 날짜와 예산, 숙소 위치, 꼭 가고 싶은 여행지, 동행 정보를 입력하면 일정표는 물론 이동 동선과 맛집, 카페, 예상 비용까지 한 번에 제안한다. 기본 일정이 완성되면 취향에 맞게 일부만 수정하면 된다 . 직장인 김가빈 씨(29)는 최근 일본 가족여행을 준비하며 AI 서비스 '클로드'를 활용했다. 항공권과 숙소 예약 확인서, 렌터카 바우처 PDF를 그대로 올리자 AI가 도착·출발 시간과 렌터카 픽업·반납 시간을 읽어 일정에 자동으로 반영했다.김 씨는 "바우처만 첨부했는데 픽업·반납 시간을 알아서 찾아 동선을 짜주고, '도착편이 빠듯할 수 있으니 입국심사를 마치면 바로 렌터카 카운터로 이동하라'는 팁까지 알려줬다"며 "예전처럼 예약 정보를 엑셀에 하나씩 옮겨 적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AI는 일본에서는 6세 미만 어린이의 카시트 착용이 의무라며 렌터카 예약 시 주니어 시트를 미리 신청하라고 안내했다. 또 료칸 조식 시간을 가장 이른 시간대로 예약하면 사파리를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다는 점, 안판만 뮤지엄은 사전 웹티켓을 구매하면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 등 현지 여행 팁도 함께 제안했다. ◆ AI도 골라 쓰고, 섞어 쓴다 AI 종류가 다양한 만큼 여행 목적에 맞는 도구를 골라 쓰는 흐름도 뚜렷해지고 있다. 실시간 항공권과 숙소 가격을 비교하거나 최신 여행 정보를 찾을 때는 검색 기능이 강한 AI를 활용하고, 여행 자료나 예약 확인서, PDF 문서를 한꺼번에 읽어 일정을 정리할 때는 문서 분석에 강한 AI를 쓰는 식이다. 예산 관리와 여행 경비 정산, 일정표 시각화 등은 별도 특화 서비스를 함께 이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최근 강릉 여행을 다녀온 이은수 씨(42)는 먼저 ChatGPT에게 여행 일정 초안을 짜달라고 한 뒤, 결과를 Napkin AI에 입력해 마인드맵 형태로 다시 정리했다. 그는 "텍스트로만 보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림으로 바꾸니 이동 동선과 일정이 훨씬 보기 편했다"고 말했다. AI는 여행 취향이 다른 일행의 의견을 조율하는 데도 활용된다. 올여름 부산 여행을 계획 중인 고등학교 동창 이인영·이규민 씨(35)는 각자 AI를 활용해 원하는 여행 일정을 만든 뒤, 두 결과를 다시 입력해 "두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일정으로 조정해 달라"고 했다.이규민 씨는 "각자 원하는 것만 고집하면 일정 짜기가 어려운데, AI가 중간에서 적절히 섞어주니 서로 납득하기 쉬웠다"며 "예전 같으면 한참 이야기했을 일을 몇 분 만에 정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AI가 짜주지만, 확인은 사람 몫 생성형 AI가 여행 준비 시간을 크게 줄여주지만, 모든 정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영업시간과 휴무일, 입장료, 환율, 항공권과 숙소 가격은 시기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특히 정책이나 제도 변경처럼 날짜가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공식 홈페이지나 관련 기관을 통해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한 이용자는 AI가 일본 면세 제도 변경 시점을 안내해 그대로 믿고 여행을 준비했지만, 출국 전 세관 등 공식 자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행일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AI가 여행 계획을 짜주고 정보를 찾는 데는 정말 편리했지만, 정책이나 날짜, 요금처럼 수시로 바뀌는 정보는 반드시 공식 홈페이지를 다시 확인한다"며 "AI는 여행 준비를 도와주는 조력자이지, 최종 확인까지 대신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AI는 여행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역할일 뿐, 최종 결정과 실행은 사람의 몫인 것이다. 개인정보 관리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항공권과 숙소 예약 확인서, 렌터카 바우처 PDF에는 이름과 예약번호, 결제 정보 등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 있는 만큼 AI에 업로드할 때는 불필요한 개인정보를 가리거나 삭제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2026-07-17 13:17:00
어린이집 사진이 올라오는 시간쯤이면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연다. 오늘 태서는 뭐 하고 있었을까. 아니, 정확히는 오늘 태서가 얼마나 웃긴 모습으로 찍혔는지 확인하러 간다. 태서는 어린이집에서 별명이 두 개다. 하나는 '한테토(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서 나온 신조어)'. 선생님 표현을 빌리자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안 우는 '상남자'다. 또 하나는 담임 선생님의 '오른팔'이다. 정리 시간이면 제일 먼저 장난감을 치우고, 동요를 부르면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친구를 도와주는 일도 제법 능숙하단다. 집에서는 장난꾸러기인데 어린이집에서는 의외로 모범생인 모양이다. 그래서 사진첩을 열면 늘 두 명의 태서를 만난다. 배를 까고 대자로 누워 있는 한테토. 친구 옆에서 장난감을 정리하는 담임 선생님의 오른팔. 둘 다 우리 아들이 맞나 싶다가도, 마지막 사진은 늘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다. 그 사진 몇 장이 참 고맙다. 출근길마다 남는 워킹맘의 죄책감도 활짝 웃는 사진 한 장이면 조금은 덜어진다. 태서네 어린이집은 키즈노트처럼 아이별 사진을 올리는 대신, 반 아이들 사진을 한꺼번에 올려준다. 그래서 태서뿐 아니라 친구들의 하루도 함께 보게 된다. 그런데 늘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한 명 있다. 사진마다 자주 울고 있는 아이. 엄마가 보고 싶은 건지, 원래 눈물이 많은 성격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사진은 하루의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몇 초 뒤에는 웃었을 수도 있는데, 부모는 그 몇 초로 여덟 시간을 상상한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키즈노트를 둘러싼 이야기도 많다. 긴 하루가 사진 몇 장으로 압축되다 보니, 부모는 그 몇 장으로 하루를 읽으려 하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돌보는 틈틈이 그 몇 장을 남긴다. 아이들의 하루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건 분명 좋은 변화다. 다만 그 사진이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보다 "오늘도 잘 지냈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는 안부로 남았으면 좋겠다.
2026-07-17 13:00:00
[YES KIDS ZONE] "하나는 외롭다?" 외동이 보통이 된 대한민국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면 어르신들은 꼭 한마디를 건넨다. "첫째예요?" "얼른 동생 하나 만들어야지." "하나는 외로워." 아이를 예뻐해서 하는 덕담이지만, 그 말에는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의 가족관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기면 풍경은 조금 다르다. 뛰노는 아이들 가운데 외동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부모들 사이에서는 "한 명만 낳아 잘 키우자"는 말도 어렵지 않게 들린다. 어른들의 상식은 여전히 다자녀 시대에 머물러 있지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이미 '외동 사회'로 바뀌고 있다. ◆ 외동이 보통이 된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한 명만 낳아 기르는 가정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출생아 가운데 첫째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2년 처음으로 60%를 넘어선 62.7%를 기록했고, 2024년에도 61.3%를 유지했다. 태어나는 아이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첫째인 셈이다. 교육 현장도 달라지고 있다. 사교육비 조사 기준 전국 초·중·고등학생 가운데 외동 비율이 2017년 13.9%에서 2024년 18.2%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이제 학교에서도 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외동이다.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도 18세 이하 자녀를 둔 가구 가운데 1자녀 가구 비중은 2017년 39.4%에서 2022년 42.4%로 늘어난 반면, 2자녀 이상 가구 비중은 감소세를 보였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면, 이제는 외동이 자연스러운 가족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왜 둘째를 포기하게 됐을까. 처음부터 외동을 계획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첫째를 키우는 과정에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가족계획을 바꾸게 됐다. ◆ 둘째를 포기한 부모 한승원(42) 씨도 그 중 한명이다. 한 씨는 "예전 어른들은 '애는 낳아 놓으면 알아서 큰다'고 쉽게 말씀하시는데 직접 키워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아내도 노산이다보니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아이 한 명에게 들어가는 교육비와 생활비도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우리 가계 자체가 한 아이를 기준으로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둘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최근 초혼과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첫째 출산 자체가 늦어지고, 체력적 부담과 고위험 임신 가능성 등을 고려해 외동으로 가족계획을 마무리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여기에 양육 부담과 교육비, 돌봄 공백 등이 겹치면서 '둘째 포기'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현실적인 결정이 되고 있다. 한국부모교육학회 역시 외동 선택을 미리 정해 둔 계획이 아니라 첫째를 키우는 과정에서 누적된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맥락적·과정적 결정'으로 분석했다. 부모가 직접 겪는 신체적 피로와 정서적 소진, 경제적 부담은 물론 독박육아, 가족의 정서적 지지 부족, 신뢰할 만한 돌봄서비스와 일·가정 양립이 어려운 직장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 외동은 정말 외로울까 이처럼 현실적인 이유로 외동을 선택한 부모들이지만, 막상 아이를 키우면서 외동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형제가 없다는 사실 자체를 걱정했다면, 이제는 외동이 흔해진 사회 환경 속에서 아이의 성장 방식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외동으로 자란 김다정(35) 씨도 과거에는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는 "나도 남편도 외동이라 어릴 때는 형제가 있는 집이 부럽기도 했고, 부모님을 모시는 일도 언젠가는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며 "결혼 전에는 둘째까지는 꼭 낳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첫째를 키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김 씨는 "요즘은 주변을 보면 한 명만 낳아 키우는 집이 정말 많다"며 "우리가 자랄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어린이집이나 문화센터, 키즈카페 등에서 또래를 쉽게 만나 함께 어울릴 기회도 많아 아이가 예전처럼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또래와 관계를 맺는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물론 문화센터, 키즈카페, 공동육아 모임 등 또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해지면서 형제자매가 사회성 형성의 중요한 통로였던 과거와는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는 평가다. 학계에서도 외동을 결핍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부모교육학회는 외동 가정을 단순한 '출산 기피'가 아니라 부모가 자신의 삶의 조건과 양육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내린 주체적인 가족 선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첫째부터 키우기 쉬워야 둘째도 낳는다" 전문가들은 저출산 정책도 달라진 가족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주거와 공공요금, 세제 등 대부분의 지원은 2~3자녀 이상 다자녀 가구에 집중돼 있다. 반면 출생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자녀 가구는 첫째를 키우는 과정에서 돌봄과 일·가정 양립, 경제적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음에도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외동 부모는 "우리도 똑같이 세금을 내는데, 하나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국가가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다"며 "첫째를 키우는 것도 벅찬데 둘째를 낳으라는 말만 들으면 허탈하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출산 결정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다자녀 우대 중심의 획일적인 지원에서 벗어나 첫째를 키우는 부모들의 실제 어려움을 반영한 정책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첫째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돌봄 환경과 안정적인 일·가정 양립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둘째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저출생 해법이라는 데 의견이 모인다.
2026-07-17 13:0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경북 청년 절반 "결혼하고 싶지만 지금은 못 한다"
경북 청년의 절반 이상은 결혼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결혼은 늦어지고 있다. 청년들이 결혼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주거, 충분한 자산을 갖추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결혼을 전략적으로 미루고 있었다. 경북연구원은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가치관 변화가 아닌 노동시장과 주거환경, 사회적 비교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구조적 결과로 분석했다. 특히 저출생 예산의 75% 이상이 출산·육아에 집중된 반면, 청년 자립을 지원하는 예산은 0.35%에 그쳐 정책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결혼은 시작이 아니라 완성" 연구진은 오늘날 청년들의 결혼을 '성과화된 결혼'으로 설명했다. 과거에는 결혼이 독립과 사회생활의 '출발점'이었다면, 이제는 학력과 취업, 주거, 경제력 등을 모두 갖춘 뒤에야 가능한 삶의 '완성점'으로 인식된다는 의미다. 실제 경북 청년의 51.3%는 결혼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장과 충분한 소득, 내 집 마련 가능성 등 여러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인식했다. 심층 면담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31세 제조생산직 청년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계약직을 전전하다 29세가 되어서야 정규직이 됐다"며 "사회생활은 일찍 시작했지만 삶을 안정시키는 데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33세 사무직 청년은 "혼수와 결혼식 비용만 해도 수천만원이 든다"며 "최소한 7천만~8천만원 정도의 여유자금은 있어야 결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경제적 조건뿐 아니라 사회적 비교도 결혼을 늦추는 요인으로 나타났다. 한 청년은 "아이들끼리도 '너희 집 어디냐', 'LH 임대주택 아니냐'고 묻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불안한 상태에서 결혼을 시작하기보다 차라리 미루는 편을 선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 결혼 전 자립 예산 고작 0.35% 하지만 정책은 출산 이후에 머물러 있었다. 2024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생애주기별 저출생 대응 예산은 모두 7천944억2천800만원이다. 이 가운데 육아 예산이 51.60%, 출산 예산이 24.03%로 두 분야가 전체의 75.63%를 차지했다. 반면 취업과 주거 기반을 마련하는 '결혼 전(성인 이행기 자립)' 예산은 27억5천700만원으로 전체의 0.35%에 그쳤다. 결혼 단계 예산도 4.00% 수준이었다. 결혼해야 출산도 가능하지만 정책은 이미 결혼한 부부와 아이를 키우는 가정을 지원하는 데 집중돼 있는 셈이다. 경상북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석 대상 저출생 대응 예산은 3억2천900만원으로,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육아와 일부 자립 지원에 편성됐다.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한 장기적인 주거·일자리 기반을 지원하는 정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분석됐다. ◆저출생 정책 전환 목소리 연구진은 청년들의 결혼 유예를 개인의 가치관 변화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이 결혼을 미루는 이유는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높은 주거비, 자산 형성의 어려움, 결혼 이후 경력단절에 대한 우려 등 복합적인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단발성 만남 행사나 결혼 비용 지원보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장기 주거 지원, 자산 형성을 돕는 금융 정책 등 '성인 이행기' 전반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이정민 부연구위원은 "청년들의 결혼 유예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불안정한 사회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전략적 대응"이라며 "결혼 자체를 장려하는 정책보다 청년이 지역에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저출생 해법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2026-07-10 12:25:00
[내 친구 AI] 워킹맘을 도와줘…가정용 피지컬 AI 등장
퇴근 후 현관문을 열자 한숨부터 나온다. 거실에는 아이 장난감이 굴러다니고 있고, 싱크대에는 아침에 먹은 그릇이 그대로 쌓여 있다.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아이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니 밤 10시. 이제야 진짜 퇴근인가 싶어 한숨 돌리려는 찰나, '삐리삐리삐~'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됐다는 소리가 눈치 없이 흘러나온다. "누가 좀 대신 치워줬으면…." 워킹맘이라면 한번 쯤 해봤을 생각. 그런데 그 '도움'이 굳이 사람일 필요가 있을까. 쓸데없는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필요한 일만 조용히 처리해주는 존재라면 말이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몸을 가진 '피지컬 AI'가 인간의 노동까지 대신하려는 시대가 오고 있다. ◆ 로봇청소기는 시작일 뿐 작년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서도 핵심 화두 중 하나는 단연 휴머노이드 로봇이었다. 더 주목받은 건 이러한 로봇들이 공장이나 산업 현장을 넘어 '가정'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 테슬라는 인간형 로봇 '옵티머스'를 공개했고, 미국 AI 로봇 기업 1X테크놀로지는 집안일 수행용 로봇 '네오(NEO)'를 선보였다. 이 로봇은 설거지와 빨래는 물론, 문을 열어주거나 물건을 가져다주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가격은 약 2천900만원 수준. 월 구독형 모델도 등장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가정마다 자동차처럼 로봇을 1~2대씩 보유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 기업들도 속도를 내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로보틱스 연구소를 신설하고 글로벌 로봇 기업인 피규어 AI 등에 투자했다. LG의 서비스 로봇 '클로이드'는 사람 손처럼 움직이는 정교한 팔을 통해 접시를 정리하거나 빨래를 집는 동작까지 구현한다. 단순 반복 노동을 넘어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존재'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핵심에는 '제로 레이버 홈(Zero Labor Home)'이라는 개념이 있다. 가사 노동 시간을 최대한 줄여 인간에게 더 많은 여유 시간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 AI는 이제 '생각'만 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최근 휴머노이드 로봇 발전 속도가 빨라진 배경으로 '월드모델(World Model)' 기술을 꼽는다. 기존 로봇이 단순히 카메라로 사물을 인식하고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주변 환경과 물체 관계, 이후 상황 전개까지 내부적으로 예측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컵 하나를 집더라도 단순히 위치만 인식하는 게 아니다. 어느 방향으로 손을 뻗어야 넘어뜨리지 않는지, 힘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등을 먼저 시뮬레이션한 뒤 움직인다. 쉽게 말해 로봇이 인간처럼 '머릿속으로 먼저 행동을 그려보고 움직이는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궁극적인 시장 역시 공장보다 '가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인간 생활 공간 자체가 사람 신체 구조를 기준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데니스 홍 UCLA 기계·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계단, 문손잡이, 주방 도구 등 대부분의 생활 환경은 인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며 "결국 로봇도 사람과 비슷한 형태여야 실제 생활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휴머노이드 로봇 업체 리얼월드의 류중희 대표 역시 "사람이 일하는 환경 자체를 바꾸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며 "결국 사람 손처럼 큰 물체와 작은 물체를 모두 다루고 공구까지 사용할 수 있는 형태가 가장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로봇도 결국 엄마가 관리" 하지만 기대만 있는 건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육아 카페에서는 벌써부터 "로봇 상전 모시는 시대 오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실제로 로봇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센서 청소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오류 관리 등이 필요하다. 한 워킹맘은 "예전에는 집안일을 직접 했다면 이제는 로봇 오류를 해결하고 센서를 닦고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며 "가사노동이 사라진다기보다 노동의 형태만 바뀌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사회성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로봇에게 "정리해", "가져와" 같은 명령형 말투를 반복하다 보면 사람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보다. 집안 구조와 가족 대화, 생활 패턴까지 모두 알고 있는 로봇이 해킹당할 경우 사생활 침해 위험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피지컬 AI 시대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인간의 노동과 관계, 생활 방식 자체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다만 디지털 AI와 달리 물리 세계의 AI는 작은 오류 하나도 실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안전성과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 역시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6-07-03 14:14:00
[창간 80년,격동 80년] 통일을 말하던 해, 민주주의는 멈췄다
1972년 여름, 서울과 평양 사이 전화선이 다시 연결됐다.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서로를 향해 "대화하자"고 말했다. 정부는 '북괴' 대신 '북한'이라는 공식 호칭을 쓰기 시작했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말 통일 분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퍼졌다. 하지만 그해 가을, 국회는 해산됐다. 헌법 기능은 정지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972년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현대사의 가장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문을 연 해이기도 했다. ◆ 7·4 남북공동성명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 5월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중앙정보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뜻밖의 사실을 공개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북한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성명이 발표되고 있었다. 남과 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공동 합의문을 발표한 순간이었다.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 남북은 이 성명을 통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했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통일 문제를 해결하며,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체제와 이념 차이를 넘어 협력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합의였다. 남북은 상호 비방과 무장 도발을 자제하고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회담 추진,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의 내용도 담겼다. 정부는 성명 발표 다음 날인 7월 5일부터 공식 호칭 역시 기존 '북괴' 대신 '북한'으로 변경했다. 실제로 그해 8월에는 서울~평양 간 전화가 27년 만에 개통됐고, 남북 적십자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회담을 진행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말 통일 분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퍼졌다. 7·4 공동성명은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 남북 대화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1972년 10월, 유신 하지만 평화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불과 석 달 뒤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통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며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 및 정치활동도 중지됐다. 이후 비상국무회의를 중심으로 새 헌법 개정안이 마련됐고, 같은 해 11월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이 확정됐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 대통령 간선제와 긴급조치권, 국회 해산권 등이 포함되며 권한은 크게 강화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 거론됐고, 미·중 관계 개선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북한 역시 1968년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을 벌이며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었다. 국내 상황도 불안했다. 고도성장 속에서도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갈등은 커지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등 사회적 충격도 이어졌다. 여기에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접전을 벌이며 정치적 위기감도 높아졌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안보 위기와 정치 불안을 명분으로 더욱 강력한 통치체제를 선택하게 된다. ◆ 화해의 시대? 독재의 출발점? 1972년은 한편으로는 남북 대화와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해였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권위주의 체제인 유신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7·4 남북공동성명은 단순한 화해의 상징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남북 모두 내부 체제 결속과 권력 강화를 위해 대화 국면을 활용했다는 시각이다. 실제 남한은 같은 해 10월 유신체제로 들어갔고, 북한 역시 12월 사회주의헌법 개정을 통해 주체사상을 명문화하며 권력 집중 체제를 강화했다. 당시에도 7·4 공동성명이 정치적 목적에 활용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존재했다. 남북 모두 체제 경쟁 속에서 대화를 선전 효과와 내부 결속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성명 이후의 합의들도 대부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실제로 성사되지 못했고, 남북조절위원회 역시 뚜렷한 성과 없이 중단됐다. 평화와 통일의 기대가 커졌던 1972년. 그러나 그해 한국 사회는 동시에 더 강한 통제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2026-07-03 13:21:00
"태서는 이맘때(임신 37주) 몸무게 몇 kg이었어?" 출산을 앞둔 회사 선배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분명 내 배 속에도 태서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웃으며 말했다. "저 지난달 태서 몸무게도 기억 안 나요. 뱃속에 있을 때가 기억날 리가요." 선배뿐만 아니다. 육아 후배들이 "몇 개월에 걸었어요?", "통잠은 언제 잤어요?", "18개월 진짜 힘들어요?"라고 물어도 늘 비슷하다. "글쎄…." 분명 내가 키웠다. 하루 24시간 붙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지나고 나니 기억이 흐릿하다. 물론 태서는 비교적 수월한 아이였다. 통잠도 빨랐고, 지금도 잠꾸러기이며 밥도 (항상) 잘 먹고 이앓이도 없었다.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다는 '마의 18개월'도 우리 집에는 크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몇 번을 했는지 셀 수도 없는 수유.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한 안아주기. 끝이 보이지 않던 기저귀 갈이. 밤새 열이 올라 체온계를 들고 안절부절 못하던 순간들. 이유도 모른 채 함께 울었던 새벽도 있었다. 분명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잊힌다. 어쩌면 망각은 부모에게 주어진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수많은 밤샘과 걱정, 눈물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고, 아이를 향한 애정만 남는다. 오늘도 나는 망각할 것이다. 태서가 참외를 달라더니 갑자기 사과를 달라고 하고, 또 금세 블루베리를 달라고 떼를 썼던 일을. 그리고 함께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쿨쿨 잠이든 태서를 보고 웃음 짓던 일을. 아마 전자는 잊고 후자만 기억하게 되겠지. 어쩌면 그래서 부모들이 둘째를 낳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육아를 망각하는 순간 둘째가 생긴다"고. 다른 부모들보다 훨씬 심한 망각증 환자인 나로서는 꽤 위험한 이야기다. 괜히 불안해진 나는 오늘도 혼자 조용히 읊조려본다. "조심하자...^^"
2026-07-03 12:25:00
[YES KIDS ZONE] 비싼 키카 대신…육아 거지맵 어때요
최근 유행했던 거지맵을 떠올려보자. 1만원 이하 메뉴를 파는 식당들을 지도 위에 표시해 공유하던 서비스다. 이름만 들으면 왠지 처량할 것 같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유쾌했다. "여기 아직 7천원 김치찌개 판다", "가성비 성지 발견" 같은 후기들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서로의 절약 노하우를 나눴다. "'육아 거지맵'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육아를 하다 보니 문득 든 생각. 아이 입장료에 부모 입장료, 거기에 밥값까지 더하면 세 가족 한 번 움직이는 데 10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그렇다고 주말마다 집에만 있기엔 아이 체력은 넘쳐난다. 그래서 기자가 한번 만들어봤다. 치솟은 물가 속에서도 "아이에게 이것만큼은 경험시켜주고 싶다"는 부모들의 마음으로 완성된, 생활밀착형 주말 생존 지도다. ◆ 오픈런만 잘하면 가성비 甲 비싼 키즈카페 대신 '국립·시립·구립' 시설을 적극 활용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예약 전쟁만 뚫으면 가성비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부모들 사이에서는 "세금 낸 보람을 이런 데서 느낀다"는 말까지 나온다. 대구시 산하 시설인 대구어린이세상은 이미 유명한 육아 코스다. 보호자와 아이 각각 4천원 정도. 요즘 키즈카페 가격 생각하면 부모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짜"라는 반응이다. 공간은 1층과 2층으로 나눠져 있다. 1층은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게 푹신한 매트가 깔려 있고 볼풀장과 장난감 공간이 마련돼 있다. 2층에는 역할놀이 공간과 몸으로 탐험하는 시설도 있다. 대구시육아종합지원센터도 있다. 장난감도서관부터 체험 프로그램, 놀이실, 부모 교육까지 다양하게 운영하는데 무료다.문제는 예약이다. 한 달치 예약이 열리는 날이면 사실상 티켓팅 수준. "오픈 시간 전에 미리 로그인 해놔라", "새로고침 누를 준비하고 있어라" 같은 조언이 부모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하나의 팁이 있다면 비 오는 날을 노려보라. 갑자기 취소표가 꽤 풀린다. 각 구별 육아종합지원센터도 생각보다 알차다. 집 근처를 찾아보면 의외로 괜찮은 공간이 숨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수업이나 부모 교육 프로그램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마음껏 풀어놓고 책 읽고 장난감 만질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는 점이 좋다. 돈 안 쓰고 한 두시간 버티기(?) 가능한 곳들이다. 국립대구과학관은 부모들 사이에서 거의 '가성비 성지' 취급을 받는다. 공간이 넓고 각 전시관마다 볼거리가 다양하다. 특히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꿈나무과학관은 작은 키즈카페에 가까운 분위기다. 버튼 누르고, 만지고, 몸으로 뛰어다니며 과학을 체험할 수 있게 꾸며져 있다. 공룡 특별전이나 물놀이·흙놀이 체험 같은 시즌 콘텐츠도 자주 열린다. 시간만 잘 맞추면 사이언스 수업이나 로봇 공연도 볼 수 있다. 음악에 맞춰 춤추는 로봇 주변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그 환호성에 부모들도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국립대구박물관 안에 어린이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은근 모르는 부모들이 많다. 여기도 예약은 필요하지만 시간대가 세분화돼 있어 생각보다 자리를 잡기 어렵진 않다. 역사와 문화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놀이처럼 풀어낸 공간이라 주말이면 가족 단위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 자연은 다 공짜 날씨 좋은 날엔 사실 최고의 가성비가 따로 있다. 산, 풀, 나무다. 돈 안 들고 체력 잘 빠지고, 아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신나한다. 부모들 사이 "자연이 최고"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대구수목원이나 달성공원은 대표적인 무료 육아 코스다. 돗자리 하나 들고 가도 두세 시간은 금방 간다. 아이들은 돌멩이 줍고 개미 찾고 뛰어다니느라 정신없고, 부모들은 그늘 아래 잠시 앉아 숨을 돌린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비싼 장난감보다 나뭇가지 하나에 더 오래 웃기도 한다. 넓은 광장도 육아인들에겐 중요하다. 대구스타디움이나 강정보엔 주말이면 킥보드와 자전거 탄 아이들이 가득하다. 넘어져도 괜찮은 넓은 공간을 갖춘 것만으로 부모들 만족도가 높다. 체력 넘치는 아이를 한껏 방전시키기에도 좋다. 야외인데 실내 놀거리까지 있는 곳들은 특히 인기다. 화원유원지가 대표적이다. 유원지 분수 앞에는 여름만 되면 물놀이하는 아이들이 몰려 있고, 부모들은 옆에서 신발과 옷이 젖는 걸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조금 더 올라가면 나무로 만든 놀이터도 있다. 특히 바로 옆 화원역사문화체험관은 숨은 꿀코스다. 미디어아트와 디지털 체험 공간이 있어 더위에 지친 아이를 잠시 데리고 들어가기 좋다. 부모들에게도 물론 피난처 같은 존재다. 경산 삼성현공원도 마찬가지다. 넓은 잔디와 그늘이 많아 돗자리 펴기 좋고, 산책로와 분수 놀이터도 잘 돼 있다. 실내 영아놀이터는 푹신한 매트 공간에 공놀이, 색칠놀이, 스티커놀이, 조립놀이까지 가능해 어린 아이 데리고 가기 좋다. 야외는 아니지만 달서구에 있는 달서목재문화관도 숨은 육아 코스다. 나무 향 가득한 공간 안에 유아 체험 공간인 '나무상상놀이터'가 운영되는데, 아이들이 나무 블록을 만지고 몸으로 뛰어놀 수 있게 꾸며져 있다. 예약만 하면 무료로 이용 가능한 프로그램도 많다. 무엇보다 자연 육아의 가장 큰 장점은 따로 있다. 육퇴가 빨라진다는 것. 햇빛 실컷 보고 흙냄새 맡으며 꼬질꼬질해진 채 집에 돌아오면, 씻고 나서 노곤노곤해진 아이가 평소보다 훨씬 빨리 잠든다. ◆ 무료 혜택 야무지게! 조금이라도 지출을 줄이기 위한 부모들의 정보력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아이 무료입장이 가능해도 문제는 늘 부모 입장료다. "애는 공짜인데 어른 둘 값이 더 무섭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는다. 대표적인 게 생일 혜택 활용이다. 대구아쿠아리움은 생일자 무료입장 혜택이 있는데, 생일 당일만 되는 게 아니라 앞뒤 이틀까지 적용된다. 그래서 육아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공식도 돈다. "엄마는 생일이라 무료. 아기는 어려서 무료." 실제로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에는 "이번 달 생일자 누구냐" "생일 혜택 되는 곳 리스트 공유해달라" 같은 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카드 할인, 통신사 할인, 문화의 날 혜택까지 챙기다 보면 부모들은 어느새 작은 '가계부 전략가'가 된다
2026-07-03 12:24:00
"사고 없는 곳 지키던 카메라"…데이터가 찾은 대구 교통안전 해법
대구광역시의 교통사고 발생률은 전국 평균을 웃돌며 시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자동차 1만 대당 교통사고 건수는 72건으로 전국 평균(65건)보다 높고, 인구 10만 명당 사고 건수 역시 434건으로 전국 평균(379건)을 크게 상회한다. 이에 대구시는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시 전역에 총 909대의 무인단속 카메라를 설치·운영 중이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이 장비들이 과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까? 최근 계명대학교 연구진과 대구시 자치경찰위원회가 진행한 연구에서 데이터 분석 결과는 단순히 카메라 개수를 늘리는 것보다 어디에 설치돼 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 사고 없는 곳 지키는 카메라들 무인단속 카메라 설치 전후 3년간, 반경 30m 이내 교통사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카메라 효과는 지역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설치 이후 사고가 감소한 지점은 416곳으로, 일정 수준의 사고 예방 효과가 확인됐다. 반면 카메라 설치 이후 오히려 사고가 증가한 지점도 200곳에 달했다. 단순 설치만으로는 사고를 막기 어렵고, 지역 특성에 맞는 교통안전 대책이 병행돼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데이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카메라 설치 전후 사고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무사고 지점'이 118곳에 달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46곳은 초등학교 주변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예방 차원의 유지 필요성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부 간선도로와 고속도로 진출입 구간 등에 설치된 장비들은 실효성 측면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연구진은 단순 사고 건수뿐 아니라 사고의 심각도까지 반영했다. 사망·중상 사고 등에 가중치를 부여해 금전적 피해 규모로 환산하는 EPDO(사고비용 환산법) 분석을 통해 대구시내 실제 고위험 지점을 선별했다. 분석 결과 사고 다발 지역임에도 무인단속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신규 설치 필요 지점'과 기존 장비의 방향 조정이 필요한 '고위험 지점'들이 다수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연구진은 2015~2024년 10년간 경상 사고가 4건 이하였던 지점 가운데 초등학교 주변 등 필수 구역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13대를 '우선 철거 및 이설 대상'으로 선정했다. ◆ "2.6억 들여 옮기면 40억 편익" 연구 결과는 단속 장비의 단순 '철거'보다 '재배치'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도 보여준다. 연구진은 사고 예방 효과가 낮은 카메라 13대를 실제 고위험 지역으로 옮길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편익을 분석했다. 카메라 1대당 이설 비용은 약 2천만 원. 총비용은 약 2억6천만 원 수준이다. 반면 단속 장비의 사고 예방 효과를 40%로 가정했을 때, 재배치 이후 5년간 기대되는 교통사고 감소 편익은 약 40억9천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단순 계산으로도 투자 비용의 수십 배에 이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데이터가 보여주는 방향은 분명하다. 무인단속 카메라 정책을 단순히 "많다""적다"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사고 위험 지역에 얼마나 정교하게 배치돼 있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전체 장비 규모는 유지하되, 사고 데이터와 지역 특성을 기반으로 장비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스마트 운영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진은 "전체 장비 대수는 유지하되 데이터에 기반한 효율적 재배치 중심의 운영 전략이 필요하다"며 "향후에는 교차로의 기하구조나 교통량, 그리고 과속·신호위반 등 단속 카메라의 세부 기능까지 고려한 맞춤형 정책 설계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26-05-29 13:35:00
"국밥 한그릇 하까?" 사투리 푹 빠진 미스춘향 [임터뷰]
미스춘향 '미'가 된 뒤에도 그의 하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들과 "국밥 한 그릇 하까?"를 외치며 학교 앞을 돌아다니고, 경북대교 주변을 산책한 뒤 치맥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범한 일상. 한복을 벗고 일상복을 입은 그는 영락없는 대학생이었다. 리나 씨는 현재 경북대 대학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한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도 그는 서울 대신 대구를 택했다. "사투리와 지역 문화까지 직접 배우고 싶었어요. 요즘은 '아이가~'를 자주 써요." 미스춘향 보다 대구 생활 이야기를 더 신나게 꺼낸 리나 씨를 18일 오후 경북대학교에서 만났다. ◆서울보다 대구! 왜? 그녀와 대구의 인연은 에스토니아 탈린대학교 학부 시절이던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환학생으로 6개월간 대구 생활을 경험한 그는 이후 정부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돼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두 번째 유학지 역시 주저 없이 대구를 선택했다. 대구는 그에게 단순한 유학 도시가 아니다. 북유럽 생활이 길었던 그는 "한국에서는 조금 더 따뜻한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었다"며 "무엇보다 산(山) 풍경을 정말 좋아하는데 대구는 도시와 자연이 잘 어우러져 있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벌써 후끈해진 날씨에도 그는 웃으며 "대프리카도 견디는데 이 정도는 시원한 편이죠"라며 농담을 던졌다. 특히 그는 대구 사람들의 '정(情)'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경상도 사람들은 무뚝뚝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는 정말 따뜻한 분들이 많았다. 낯선 사람의 작은 도움이나 짧은 친절 속에서도 한국의 정을 많이 느꼈다." ◆받은 정 다시 돌려주고 싶어 대구에서 받은 따뜻함은 자연스럽게 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리나 씨는 현재 대구 파티마병원 국제진료센터에서 의료통역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 환자들의 병원 이용을 돕는 일이다. 그는 "환자분들이 '다음 주에도 꼭 와달라'고 말씀해주실 때 정말 보람을 느낀다"며 "누군가의 불안한 병원 방문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책을 읽어주는 봉사도 하고 있다.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이 "선생님 다음 주에도 또 와요?"라고 손을 잡아줄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더 큰 힘을 얻는다고 했다. SNS를 통해서는 한국 생활과 유학 정보도 꾸준히 공유하고 있다. 그는"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한국의 매력과 전통문화를 알리고 싶다"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마음을 밝힐 수 있는 '춘향'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2026-05-23 17:00:00
"필름카메라 사용법 좀 알려주실 분 계실까요?" 지역 커뮤니티 앱에 올라온 짧은 글이었다. 사례금을 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답장이 도착했다. 직접 만나 알려주겠다는 사람부터 채팅으로 설명해주겠다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글을 올린 이영현(24) 씨는 "솔직히 답장이 올 줄 몰랐다"며 웃었다. "다들 지나칠 줄 알았는데 연락이 정말 많이 왔다. 특히 기억나는 분은 필름카메라 수집이 취미인 분이었는데, '젊은 사람이 이런 걸 좋아하는 게 기특해서 도움 주고 싶었다'고 하시더라." 당근이나 지역 맘카페, 동네 오픈채팅방, 대학 커뮤니티, 네이버 카페 등 지역 기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단순한 거래나 정보 공유를 넘어 느슨한 도움과 연결이 함께 이뤄지고 있다. "노트북이 갑자기 안 되는데 혹시 봐주실 수 있나요",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데 도와주실 분 계실까요" 같은 다소 난감한 글에도 댓글과 메시지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자신의 시간을 써가며 낯선 이를 도와주는 걸까. 거창한 이유를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은 짧았다. "동네 사람들이잖아요." ◆ 돈도 안 받고 나눔, 왜? 가까이 사는 누군가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 온라인 공간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은 단순한 '도움 요청'을 넘어 물건 나눔과 재능기부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김은주(38) 씨는 임신 당시 사용했던 바디필로우와 임산부용 안전벨트 등을 무료로 나눴다. 충분히 중고로 판매할 수도 있었지만, 같은 임산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고 했다. 김 씨는 "깨끗하게 사용한 물건이라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었지만, 같은 임산부 입장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걸 아니까 자연스럽게 나눔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졸업생이 후배들에게 깨끗하게 사용한 전공책을 무료로 넘기고, 캠핑·등산·바이크 같은 취미를 먼저 시작한 이들이 갓 입문한 사람들에게 간단한 장비를 나누기도 한다. 꼭 직접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더라도, 비슷한 경험과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 안에서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나눠 쓰고 있는 셈이다. 특히 김 씨는 나눔에 적극적인 이유에 대해 "나도 육아하면서 주변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나눔은 또 다른 나눔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되기도 한다. 과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다시 다른 이에게 손을 내미는 식이다. 평소 나눔을 자주 한다는 김동수(59) 씨 또한 "나 역시 정말 필요한 물건을 나눔 받고, 또 어떤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응답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며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 재능기부·봉사모임…형태도 다양 재능기부도 이어진다. "집안 형편이 어렵거나 복지시설 아동 대상으로 악기를 무료로 가르쳐주고 싶어요." 지역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김근수 씨는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악기를 활용해 동네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학원을 다니기 어렵거나 혼자 공부하면서 막막함을 느끼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굳이 지역 커뮤니티가 아니라 정식 봉사활동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지역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이유는 오히려 '가벼움'에 있었다. "예전 동네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서로 도와주던 느낌이 좋다. 거창한 봉사활동이라는 이름보다는 그냥 옆에서 뭐 하나 봐주고, 도움 필요한 순간 한번 손 내미는 정도다." 이러한 연결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모임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동네 사람끼리 모여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모임'부터 급식 봉사, 도시락 나눔 활동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대학생 유여진 씨(21)는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직접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었다. 술 마시고 노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주말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보통 봉사활동이라고 하면 꾸준히 해야 할 것 같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며 "그런데 이런 모임은 그냥 동네 사람들끼리 '이거 한번 같이 도와주러 갈까?' 하는 느낌이라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물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기반 만남인 만큼 사기나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례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용자들은 "생각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자주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거창한 단체도, 정해진 봉사 시간도 없었다. 다만 누군가의 "혹시 가능하실까요?"라는 짧은 글에, 동네 사람들이 "제가 한번 볼게요"라고 답했을 뿐이다.
2026-05-22 14:30:00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숫자 '2'와 '1'을 붙여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1995년 민간단체 행사로 시작돼, 2007년 법정기념일로 지정됐으니 역사가 꽤 깊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의미는 여전할까. 요즘의 '둘'과 '하나'는 어떤 모습일까. "'둘(2)'의 모습 자체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임아현(30)·최진아(30) 씨의 말이다. 두 사람은 동성 연인이자 서로를 부부라고 부르는 관계다. 지난 3월 대구 남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며 스스로의 관계를 사회 안에서 드러냈다. 과거 '표준 부부'라는 틀 안에 담기지 못했던 관계들이 사회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하나(1)'가 되는 방식 역시 예전과 달라졌다. 김다현(32)·이승우(34) 씨 부부는 생활비와 가사, 육아 시간을 엑셀에 기록한다. 누가 어떤 지출을 했는지, 집안일과 육아를 얼마나 맡았는지까지 정리하며 서로에게 가장 합리적인 관계의 형태를 찾는다. "억지로 하나가 되기보단, 행복한 둘을 유지하는 부부가 더 나은걸요." 숫자는 여전히 '2'와 '1'이지만, 그 안의 의미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바야흐로 '둘'의 범위도, '하나'가 되는 방식도 달라진 시대. 부부는 이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간매일은 5월 21일 부부의 날을 맞아 달라진 시대 속 '요즘 부부'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 넓어진 둘(2)의 범위 임아현(30)·최진아(30) 씨의 집에는 불수리통지서가 액자에 걸려 있다. 지난 3월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민원실 직원에게 되돌려 받은 서류다. 해당 문서에는 '헌법 제36조 제1항 및 민법 제812조·제826조 등에 따라 수리할 수 없는 동성 간 혼인'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동성 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 불수리 통지서를 받은 이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단순한 신고 절차를 넘어, 동성혼 법제화를 바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임 씨는 "동성 연인의 혼인신고 '접수' 자체가 가능해진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22년 3월부터 가능해졌다"며 "이런 시도들이 계속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제도 변화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가정법원에 혼인신고 불수리 통지에 대한 불복 이의신청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혼인신고 불수리 불복 신청은 동성부부의 혼인신고를 수리하지 않는 처분에 불복하는 사건으로, 이른바 '혼인평등소송'으로 불린다. 대구 지역에서 혼인평등소송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람에게 '부부'란 특별한 개념이 아니다. 함께 눈을 뜨고, 집을 청소하고, 하루를 나누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 가깝다. 임 씨는 "마음 맞는 사람과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라며 "누구에게나 가족이 따뜻함과 안정감을 주는 존재이듯, 우리에게도 가족은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했다. 이어 "행복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도 더 행복해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 결혼·시선 보다 '관계' 자체에 의미 과거에는 결혼과 혈연을 중심으로 가족과 부부의 형태가 정의됐다. 하지만 이제는 법적 관계 밖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둘'이 등장하고 있다. 과거 '표준 부부'의 범위 밖에 있던 관계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흐름이다. 10년째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는 문모 씨(47)는 "관계는 중요하지만 혼인 제도 자체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법적 부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족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함께 살되 각자의 독립성도 유지하고 있다. 주변에 우리 같은 비친족 가구가 꽤 많다"고 덧붙였다. 비친족가구는 8촌 이내 친족이 아닌 사람들끼리 함께 사는 5인 이하 가구를 뜻한다. 결혼하지 않은 연인, 친구, 동료 등과 함께 거주하는 형태가 대표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비친족가구는 2020년 약 42만 가구에서 2024년 58만 가구를 넘어섰다. 이러한 '둘'의 변화는 젊은 세대만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는 사회적 시선과 역할에 맞춰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원하는 관계를 선택하려는 흐름도 나타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65세 이상 재혼 건수는 6천326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남성은 6.4%, 여성은 15.1%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재혼 건수가 남성 1.0%, 여성 2.6%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결혼정보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노년 재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자녀 문제 등을 많이 고려했다면, 최근에는 외로움과 정서적 안정, 삶의 동반자에 대한 필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라며 "특히 여성들도 노년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 N빵! 합리적 부부 생활 '둘'의 모습이 달라진 만큼, '하나'가 되는 방식 역시 변하고 있다. 과거 부부가 '무조건 하나 되는 관계'에 가까웠다면, 요즘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맞는 방식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생활비부터 가사, 육아까지 역할과 기준을 직접 정하고 기록하는 부부들의 등장이다. 김다현(38) 씨 부부의 '합리적 결혼생활'은 연애 시절 만든 데이트 통장에서 시작됐다. 지금은 토스 공동계좌로 가계부를 공유하고, 집안일은 엑셀로 정리한다. 아이가 태어난 작년부터는 야간수유 교대표와 육아 분담표도 추가됐다. 김 씨는 "10원 단위까지 더치페이 하는 시대인데 부부라고 예외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예전에는 '내가 더 하는 것 같은데'라는 억울함이 마음속에 쌓였다면, 지금은 기준을 정하고 기록하다 보니 오히려 덜 싸우고 만족도도 높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대 사회에서 중요해진 '공정 감수성'이 부부 관계까지 확장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2000년대 후반 등장한 이른바 'N분의 1 문화'의 마지막 성역은 "가족끼리 네 것 내 것이 어딨냐"는 인식이 강했던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 안에서도 '공정한 분담'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와 경제적 불안, 각자생존의 분위기 속. 과거 희생과 배려가 미덕으로 여겨졌다면 지금 세대는 관계 안에서도 '억울하지 않은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전업주부들 사이에서도 엑셀 활용은 낯선 일이 아니다. 과거 '당연한 역할'로 여겨졌던 육아와 집안일 역시 하나의 노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다. 실제 국가데이터처가 최근 발표한 '무급 가사노동 가치'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연간 582조4천억원 규모로 추산됐다. 1인당 평균으로 환산하면 월 약 93만7천원 수준이다. 주부 정은수 씨(29)는 "집안일도 밖에서 돈 버는 것만큼 중요한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부부는 남편의 경제적 기여와 제 가사노동 기여를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집안일과 육아 시간을 시간 단위로 계산해 가사 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따져보며 부부간 역할을 다시 조율하는 것이다. ◆ "부부가 꼭 함께해야하나요"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집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는 '부부니까 함께해야 한다'고 여겨졌던 시간에 대한 인식 역시 달라지고 있다. 이대호(31) 씨 부부는 명절이면 양가 어른들을 함께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만, 잠은 각자 본가에서 잔다. 명절 스트레스와 이동 피로를 줄이기 위해 내린 나름의 '합리적 선택'이다. 이 씨는 "처음에는 부모님도 조금 당황하셨지만 지금은 '너희가 편한 대로 하라'고 하신다"며 "예전에는 부부면 무조건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지금은 서로 편한 방식을 조율하는 쪽에 가깝다"고 말했다. 남편은 캠핑을 가고 아내는 집에서 혼자 쉬는 식으로 주말을 따로 보내기도 한다. 친구들과의 여행이나 동창 모임에도 각자 참석하고, 경조사 역시 상황에 따라 한 사람만 다녀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각방 생활이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는 이른바 '각집 살이' 형태도 등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늘 함께 있는 것'이 좋은 부부의 기준처럼 여겨졌다면, 지금은 서로의 시간과 취향을 존중하는 방식 역시 관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하면 남성과 여성의 역할 자체가 뒤바뀌기도 한다. 밖에서 일하는 엄마와 집에서 살림·육아를 맡는 전업 아빠의 모습이다. 실제 국가데이터처의 신혼부부통계를 보면 결혼 5년 이내 외벌이 가정에서 아내가 버는 비중은 2019년 16.1%에서 2024년 19.0%로 증가했다. 전통적인 '남편 생계·아내 돌봄' 공식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전업아빠 김정현 씨(34)는 "'가족에게 가장 합리적인 형태가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며 "아내가 일하고 내가 아이를 돌보는 방식이 당시 우리 가족에게 더 잘 맞았다"고 말했다. 이어 "계획했던 삶은 아니었지만 부부가 충분히 상의해 함께 내린 결정이라는 점에서 후회는 없다"고 덧붙였다. 가부장이 아닌 가모장을 선택했다는 김보라(39) 씨 역시 "지금은 내가 벌고 있지만 또 달라질 수도 있다"며 "성별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역할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변화를 '정답형 부부'의 해체로 해석한다. 과거에는 사회가 정해둔 역할과 방식에 관계를 맞춰야 했다면, 이제는 각자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가장 적합한 형태를 조율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부부가 사회가 정해둔 역할에 스스로를 맞춰야 했다면, 이제는 각자의 삶에 맞는 관계를 함께 설계해가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2026-05-22 14:30:00
병원 보호자 칸 앞에서 멈칫하는 동성 커플. 함께 살아도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는 연인. "부부끼리 너무 계산적이다"라는 말을 듣는 엑셀부부. 문화센터에서 "엄마는 어디 갔냐"는 질문을 받는 전업아빠. "이 나이에 무슨 재혼이냐"는 주변 시선을 견뎌야 하는 노년의 커플까지. 기자가 이번 취재를 위해 만난 6쌍의 부부와 연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회가 기대하는 '정답형 부부'의 틀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부부의 세계'는 달라지고 있지만, 이를 바라보는 법·제도와 사회적 시선은 아직 과거의 기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전형적 가구 맞춤형 제도 필요 함께 살아도 법적으로는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현행 주거 정책과 복지 제도 상당수는 여전히 혼인 관계나 직계가족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이 때문에 비친족가구는 수술 동의, 임차권 승계, 유족 자격 등 여러 제도적 권리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 역시 민법상 부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신혼부부 특별공급이나 배우자 공제 같은 제도적 혜택에서도 제외된다. 주민등록등본상에도 단순 '동거인'으로만 표시돼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도 반복된다. 동성 커플 임아현·최진아 씨 역시 이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아직은 비교적 젊은 편이라 병원에서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은 많지 않았지만, 가장 가까운 사이임에도 서로의 의사를 대신 결정할 수 없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며 "함께 살아도 가족관계등록부상 가족이 아니다 보니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안(2021~2025년)'에서 비혼·동거 등 다양한 형태의 관계 역시 가족으로 포용하는 방향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실제 제도화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비전형적 가구가 이미 우리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만큼, 제도 역시 변화 속도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영란 연구원은 "기존의 혼인·혈연 중심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상호 돌봄과 친밀성 같은 관계의 기능을 중심으로 가족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비친족 가구 역시 서로 돌보고 의지하며 보호자 역할을 기대하는 등 단순한 타인을 넘어선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비친족 가구는 단순한 주거 공유를 넘어, 대안적 친밀성을 기반으로 가족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김 연구원은 "비친족 가구는 구성 인원이나 성별, 함께 사는 이유 등에 따라 필요한 정책 지원이 모두 다르다"며 "각 집단의 특성과 수요를 세분화해 맞춤형 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다양한 관계, 사회적 시선 여전 달라진 것은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부부와 가족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역시 아직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업아빠 김정현 씨는 "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나 병원을 가면 아직도 '엄마는 어디 갔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며 "육아를 하는 아빠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어 "동네 부모 모임도 대부분 엄마들 중심으로 이뤄져 있어 아빠 혼자 들어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며 "비슷한 처지의 아빠들과 소통하기 위해 직접 육아 블로그를 운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생활비와 가사노동을 엑셀로 기록하는 이른바 '계산형 부부'를 향한 시선 역시 엇갈린다. 온라인에서는 "정이 없다" "부부 사이에 너무 계산적인 것 아니냐"는 반응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 세대 간 인식 변화도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혼 전문 변호사 김모 씨는 "과거에는 희생과 배려가 부부 관계의 미덕으로 여겨졌다면, 지금 세대는 관계 안에서도 '억울하지 않은 균형'과 공정한 분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예전처럼 한 사람이 참고 감당하는 방식보다, 역할과 책임을 서로 조율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황혼 재혼이나 비혼 동거 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나이에 무슨 재혼이냐"거나 "왜 굳이 결혼하지 않느냐"는 반응처럼 관계의 형태보다 '정상적인 가족'을 요구하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가족과 부부의 형태가 이미 다양해진 만큼, 사회 역시 변화된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2026-05-22 14:30:00
[임터뷰] 외국인이 웬 춘향?…한국다움에 정답은 없었다
상상 속에서만 그려왔던 춘향의 얼굴을 복원한 그림을 두고 한바탕 시끌했던 일이 떠오른다. 중성적인 외모에 나이 들어 보인다는 반응부터 "내가 상상한 춘향과 다르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애초에 춘향은 실존 인물이 아닌 소설 속 인물이다. 이도령이 처음 춘향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작가는 "옥처럼 깨끗한 모습에 붉은 입술, 복숭아꽃 같은 고운 얼굴" 정도만 묘사했을 뿐이다. 결국 사람마다 마음속에 그리는 춘향의 모습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올해 미스춘향 선발대회에서 사상 첫 외국인 본상 수상자가 나오자 이번에는 "외국인이 웬 미스춘향이냐"는 반응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우크라이나 출신 안젤리나 게라시멘코(23·리나). 하지만 리나 씨에게 춘향은 낯선 옛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다. 긴 시간을 버티며 자신의 마음을 지켜낸 춘향의 모습에서, 그는 한국을 향해 걸어온 자신의 시간을 떠올렸다. "10년 넘게 한국을 꿈꾸며 버텨온 시간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춘향의 모습이다." -한국을 향한 지고지순한 마음이 정말 춘향이를 닮았다. 왜 그렇게 오래 한국을 꿈꿨나. ▶처음에는 작은 호기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걸 좋아했는데, 우연히 들은 한국어 소리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살던 곳에는 대한민국 대사관도, 대학 수준의 한국학 과정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공부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참여할 수 있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체험을 이어갔다. 한국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세 가지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며 버텼다. -결국 한국까지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그 시간들을 버텨온 끝에 대한민국 정부초청장학생(GKS)으로 선발돼 한국에 오게 됐다. 한국어를 꾸준히 공부해 TOPIK 6급을 취득했고, 세종학당 한국어 교원 과정도 이수했다.어릴 때 막연히 꿈꾸던 나라에서 직접 배우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게 한국을 좋아하던 사람이, 결국 한국에서 가장 전통적인 상징 중 하나인 '미스춘향'이 됐다. 스스로도 놀랐을 것 같다. ▶아직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를 좋아했고, 혼자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언젠가 꼭 한국에 가고 싶다'는 꿈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한국에 오는 것을 넘어, 한국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무대에서 '미'로 불리게 됐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고 감사하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품어온 진심과 노력을 한국 분들이 알아봐 주신 것 같아 더 뜻 깊었다. -우크라이나 가족들에게 '춘향'을 어떻게 설명했나. ▶처음에는 단순한 미인대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 먼저 '춘향전' 이야기부터 설명했다. 춘향이 왜 한국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 받아왔는지, 단순히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긴 시간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지켜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또 미스춘향이 단순한 외모 경쟁이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와 정신을 함께 알리는 문화적인 의미를 가진 무대라는 점도 설명했다. --합숙이나 대회 준비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 외국인 참가자라 더 새롭게 느껴졌던 장면도 궁금하다. ▶합숙 기간 동안 참가자들과 함께 한복을 입고 전통 예절과 춘향의 정신에 대해 배우던 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외국인인 저에게는 모든 과정이 새롭고 신기했지만, 다른 참가자분들이 먼저 다가와 도와주고 함께 이야기해 준 덕분에 금방 편안해질 수 있었다. 특히 서로의 메이크업을 도와주거나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응원해주던 순간들이 가장 따뜻하게 남아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가 '전통'이나 '한국다움'을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나. ▶전통 역시 하나의 고정된 형태라기보다 다양한 시선과 해석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름다움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듯, 한국다움 역시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한국 전통문화도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길 때 더 넓게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춘향'으로 기억되고 싶나 ▶정체성과 국적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춘향으로 기억되고 싶다. 또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마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과 진심으로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6-05-22 13:27:00
스승의날을 맞아 어린이집 알림장에 짧은 감사 인사를 남겼다. "우리 아이를 예뻐해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복직 후에도 안심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쓰고 나니 마음이 조금 뭉클했다. 누군가 우리 아이를 함께 돌봐 주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안심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잘 지내고 있겠지"라고 믿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평범한 부모들의 일상은 그런 믿음 위에서 굴러가는지도 모르겠다. 감사 인사를 적고 나니 문득, 그런 안심을 쉽게 누리지 못하는 부모들이 떠올랐다.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장애 아동 부모들이다. 장애 아동 부모들 역시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 돌봄 기관에 맡긴다. 다만 그 과정은 훨씬 어렵고 절박하다. 특수학교는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고, 일반학교 특수학급 역시 과밀 상태다. 자리가 없어 일반학급에 먼저 배치된 채 특수학급 자리를 기다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부담은 가족의 삶 자체를 바꿔 놓기도 한다. 부모들은 아이에게 맞는 교육 환경을 찾아 삶의 터전을 옮긴다. 실제 한 가족은 특수학급과 돌봄 자리를 따라 범어동에서 칠곡으로, 다시 중구와 남구로 이사를 반복했다. 어렵게 학교를 보내고 나서도 마음을 놓기는 어렵다. 새 학기마다 어떤 인력이 배치될지, 아이가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마음을 졸인다. 인력이 부족할 때면 부모가 직접 학교를 오가며 아이의 이동과 화장실 이용을 돕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어머니는 결국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수업 중 돌발 상황이 생기거나 아이의 이동, 안전 문제로 부모가 직접 와야 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언제 학교에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직장 생활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늘 상시 대기 상태 같았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물론 현장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은 존재했다. 특수교사와 실무 인력은 충분하지 않고, 학교 역시 제한된 인력 안에서 운영된다. 통합교육이 확대되고 있지만 학생별 특성과 지원 수준은 모두 다르다. 교사와 실무사, 부모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 현장에서는 "누가 더 지원을 받아야 하는가"를 두고 서로의 자리를 걱정하는 일도 벌어진다. 구조가 감당해야 할 문제들이 종종 개인 사이의 갈등처럼 흘러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변화의 움직임은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학교 단위 통합 지원 체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대구에서도 통합교육지원단 운영과 수준별 특수학급 확대 같은 변화가 진행 중이다. 해외처럼 학교 안에서 교사 지원과 학부모 상담, 외부 기관 연계를 함께 조정하는 체계의 필요성 역시 꾸준히 제기된다. 결국 중요한 건 부모 개인의 희생만으로 버티는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함께 웃고 여행을 떠나고, 아이 손을 잡고 추억을 만드는 가족의 풍경이 넘쳐 난다. 하지만 어떤 가족에게 하루는 여전히 긴장과 대기, 미안함 속에서 흘러간다. 알림장에 남겼던 편지를 다시 읽어 봤다. "덕분에 안심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이 문장이, 언젠가는 어떤 가족에게도 당연한 말이 되면 좋겠다.
2026-05-17 12:40:44
[데이터로 보는 세상] 썰렁한 아빠 농담의 반전… 아이 '회복탄력성' 키웠다
주말 저녁, 뜬금없는 농담으로 가족들을 웃기려는 아버지가 있다. "아빠 또 시작이네"라는 아이들의 핀잔이 쏟아지지만, 그 어설픈 '아재 개그'가 사실은 아이 마음속에 평생을 버틸 '행복의 근육'을 키우고 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북대학교 아동가족학과가 발표한 〈아버지의 유머스타일이 아동의 행복감에 미치는 영향〉 은 아버지의 유머가 자녀 발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데이터를 통해 분석했다. 연구진은 대구·경북 지역 초등학교 4~6학년 아동과 아버지 460쌍을 대상으로 심층 조사를 진행했다. ◆ 개그맨 아빠가 아니더라도 이번 연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결과는 의외로 '직접효과의 부재'였다. 연구진은 아버지의 유머를 타인과 유쾌하게 관계를 맺는 '사회적 유머',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긍정성을 유지하는 '자기확장 유머', 스스로를 낮추거나 망가뜨려 웃음을 유발하는 '자기패배 유머' 세 가지로 나눠 분석했다. 하지만 세 가지 유머 모두, 아동의 행복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아빠가 개그맨처럼 아이를 크게 웃긴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아이의 근본적인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아빠의 농담은 '즉효성 행복 버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아빠의 유머는 무의미할까. 데이터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아빠의 유머는 아이에게 직접 행복을 주입하기보다, 아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두 가지 능력인 '사회적 유능감'과 '자아탄력성'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사용하는 아버지의 '사회적 유머'는 아이의 사회적 유능감을 높이는 데 가장 큰 간접효과를 보였다. 아빠가 사람들과 유쾌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 역시 관계 맺기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자기확장 유머' 역시 아이의 사회적 유능감과 자아탄력성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빠의 농담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몸으로 가르치는 일종의 생활 교육이었던 것이다. ◆ 자학개그? 아빠가 하면 좋아! 흔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자기패배 유머'가 의외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보통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바보처럼 행동해 웃음을 만드는 방식은 자존감을 낮추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보여주는 자기패배 유머는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아버지의 자기패배 유머는 아동의 사회적 유능감을 매개로 행복감을 높이는 간접효과를 보였고, 자아탄력성을 통한 효과 역시 확인됐다.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 대신, 일부러 망가지고 실수하며 웃음을 만드는 아빠의 모습은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아빠도 완벽하지 않구나", "실수해도 괜찮구나"라는 메시지가 아이 마음속 불안을 낮추고, 결국 세상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에 대해 "아버지의 유머는 아동의 사회적 관계 형성, 정서적 자기조절, 긍정적 자아개념, 삶의 만족도 등 다양한 발달 영역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더 많은 정보와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데 몰두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 연구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조금 다르다. 아이를 행복하고 단단하게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은 거창한 비법이 아니라, 저녁 식탁에서 오가는 사소한 농담과 웃음, 그리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편안한 관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재미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 순간에도, 아빠의 '썰렁한 농담'은 조용히 아이 마음속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6-05-15 14:20:00
"고쳐주세요" 한마디에 뚝딱! 장난감 병원 13명 의사들
5살 남자아이가 쭈뼛쭈뼛 문을 연다. 손에는 낡은 자동차 장난감 하나가 꼭 쥐어져 있다. "고쳐주세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얼룩지고 닳은 장난감 곳곳에는 아이가 얼마나 오래 이 물건과 함께했는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곳은 대구에서 유일한 '장난감 병원'이다. 장난감을 받아 뚝딱 고쳐내는 13명의 의사 선생님이 있다. 아이의 동심의 곁에 선 어른들이 있는 곳. 지난 30일 기자는 달서아이꿈센터에서 운영·지원하는 장난감 병원을 방문했다. ◆ 고장난 장난감의 '응급실' 드라이버, 건전지, 크고 작은 나사들이 어지럽게 놓인 작업대. 고장난 장난감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이곳에서 연신 다급한 목소리가 오간다. "정쌤, 이거 안되겠는데요." "권쌤, 저걸로 한번 뚫어보죠."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기 한 시간여. 장난감에서는 마침내 불빛이 켜지고 소리가 흘러나온다. "딱 고쳤을 때 희열이 정말 크다. 아이가 고쳐진 장난감을 안고 펄쩍펄쩍 뛸 때는 더 그렇다." 장난감 병원 기술 고문 김영석 씨(63)의 말이다. 철로 정비 일을 하던 그는 은퇴 후 이곳에서 '기술 고문' 역할을 맡고 있다. 장난감 고장의 대부분은 비교적 단순하다. 끊어진 전선, 녹슨 건전지 단자, 느슨해진 스위치, 먼지가 낀 전기기판 등이 주요 원인다. 다만 전자기판이 복잡한 장난감은 수리가 쉽지 않다. 건반 악기나 학습용 전자 장난감이 대표적이다. 김 씨는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하지만 안 될 때도 있다"며 "그럴 때면 아이들이 실망할까봐 더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수리가 어려우면 '상급 병원(?)'으로 보내기도 한다. 달서아이꿈센터 유창우 관장이 직접 손보는 단계다. 김 씨는 "장난감 병원의 아이디어도 유 관장의 관심에서 시작됐다"며 "쉬는 날에도 나와 수리를 할 만큼 진심이다. 장난감 병원 원장님답다"고 웃었다. ◆ 배워서 고친다… 기술 문외한 이곳이 더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장난감을 고치는 13명의 '의사' 대부분이 원래는 공구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고쳐주고싶다' 는 일념 하나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다. 권혁환 씨(67)는 "처음엔 드라이버 이름도 몰랐다"며 "지금은 고장 진단부터 수리, 테스트까지 혼자 해낸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 부산의 한 장난감 업체 전문가에게 한 달간 집중 교육을 받으며 기술을 익혔다. 공구 사용법부터 스위치 작동 원리, 기본적인 전기 지식까지 차근차근 배웠다.드라이버와 인두기, 전압·전류 측정기, 전선 피복기, 납땜 도구 등 장난감 수리에 필요한 장비도 생각보다 다양했다. 기본 공구조차 낯설던 이들은 직접 도구를 다뤄보고, 고장난 장난감을 분해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수리 기술을 몸으로 익혀갔다. 갈수록 손에 익는 노하우도 쌓이고 있다. 정현희 씨(47)는 "처음에는 하나씩 뜯어보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여러 종류를 다뤄보니까 이제는 어느 부분이 고장났는지 감이 온다"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수리 시간도 많이 줄었다. 예전에 고쳐봤던 장난감은 원인을 금방 파악해서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단순 수리 넘어 '자원순환'까지 장난감 병원의 역할은 단순한 수리에 그치지 않는다. 쉽게 사고 쉽게 버려지는 장난감은 대부분 플라스틱 폐기물로 남는다. 이곳에서는 고장난 장난감을 고쳐 다시 기부하거나 저렴하게 판매하기도 한다. 수리가 불가능한 장난감은 부품을 분리해 재사용하고, 캐릭터는 키링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한다. 버려질 뻔한 장난감이 또 다른 형태로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달서아이꿈센터 관계자는 이를 두고 "아동복지를 넘어 자원순환까지 함께 고민한 결과"라며 "달서구청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구 유일의 장난감 병원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경산 등 타 지역에서도 일부러 찾아오고, 출장 수리 요청도 들어온다. 이종윤 씨(73)는 "북구에 고장난 장난감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직접 가서 고친 적도 있다"며 "힘들어도 보람이 더 크다"고 말했다. ◆ 무보수로 왜? "추억 잇는 의미있는 일" 이곳의 장난감 의사들은 대부분 자녀를 다 키운 세대다. 그래서인지 장난감을 고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과거가 떠오른다. "아이들 어릴 때가 많이 생각난다. 동요 나오는 장난감 을 고칠 때면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 보수도 없이 시간을 쪼개 이어가는 봉사지만, 이들에게 이 일은 단순한 수리가 아니다. 고장난 장난감을 고치며 아이들과의 추억까지 함께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고쳐줘서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우리가 더 하고 싶다." 버려질 뻔한 장난감이 다시 움직이고, 아이의 웃음이 되살아난다. 장난감을 고친다는 것은 단순한 수리가 아니다. 아이의 기억을 이어주고, 어른의 추억을 다시 꺼내는 일이다. 이 작은 병원에서는 오늘도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2026-05-08 14:30:00
[창간 80년,격동 80년] "경제냐, 자존심이냐"…6월 거리로 쏟아진 분노
"민족적 민주주의를 확립하자." "굴욕 외교 반대!" 1964년 6월 3일, 서울 도심은 학생들의 외침으로 뒤덮였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들의 분노는 곧 시민들로 번졌다. 단순한 학생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적 저항으로 확산됐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경찰과 학생이 충돌하는 와중에도,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방패와 곤봉에 맞서며 학생들은 끝까지 구호를 외쳤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하나둘 거리로 나왔다. 그날의 거리는 '경제 성장'과 '민족 자존심'이 정면으로 부딪힌 현장이었다. ◆ '돈이 필요했던 나라' 배경에는 냉혹한 현실이 있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경제성장'을 정통성으로 내세웠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수준의 빈곤에 놓여 있었다. 산업화를 추진할 자금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했고,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경제권 형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국·일본·대만·베트남 등을 묶는 '반공 경제 블록'이다. 이 흐름 속에서 정권이 주목한 카드는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김종필은 1962년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과 협상을 통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도출하며 청구권 자금 문제를 정리했다. 이후 평화선·어로 문제까지 타결되며 국교 정상화는 급물살을 탔다. 정부에게 한일회담은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에 가까웠다. ◆ "굴욕이다" 국민들은 반대 문제는 과정과 내용이었다. 회담은 국민 눈에 '납득하기 어려운 협상'으로 비쳤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이어진 강제 동원과 자원 약탈 등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은 가장 큰 반발을 불러왔다.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명확히 묻기보다 '청구권 자금'이라는 경제적 보상 형태로 정리되면서, 역사적 정의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컸다. 독도 문제 역시 국민 정서를 자극한 대목이었다. 영유권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정부가 일본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됐다. 여기에 협상 과정 전반이 국민에게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도 논란을 키웠다. 주요 내용이 비공개로 진행되면서 '밀실 외교'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국민적 공감대 없이 중요한 국가 간 합의가 추진되고 있다는 불신이 커졌다. ◆6월 3일, 분노가 거리에서 터지다. 정부가 내세운 것은 '선(先) 경제 발전, 후(後) 민주화'였다. 하지만 학생들과 시민들은 달랐다. 경제보다 역사와 자존심을 먼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간극은 결국 거리에서 폭발한다. 시위는 빠르게 확산됐다. 학생들의 행동에 공감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학생 운동'은 '국민 저항'으로 번졌다. 이에 정부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수많은 학생이 체포·구금됐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도심 곳곳이 통제됐고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시위는 꺾이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민족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외침은, 억압 속에서도 계속됐다. 6.3 항쟁은 한일회담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남긴 흔적은 컸다. "정부 정책에 대해 시민이 저항 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느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민주화 운동의 토대가 됐다. 4.19 혁명 이후 주춤했던 학생운동은 다시 살아났고, 이는 훗날 유신체제 저항과 민주화 요구로 이어졌다. 또한 정부 역시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이후 외교 정책에서 '국민 감정'은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는다. 6·3 항쟁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큰 사건이었다. 경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 자존심 사이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선택을 고민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2026-05-08 12: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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