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로 보는 세상] "의리 지킨데이" 경북 청년 사투리 자부심
"와이카노, 뭐 잘못 묵었나(왜 이러냐,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친구가 서울말을 쓰면, 경상도 남성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실제 대구 남성들이 서울로 이주한 뒤 말투를 빠르게 바꾸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같은 정서는 영주어문학회가 올해 발행한 '경북 지역 청년층의 방언 태도와 표준어 사용'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경북 20대의 방언 사용량 자가 평가 점수는 70.4점으로, 전북 지역 20대 37.8점에 비해 두 배 가량 높았다. 연구진은 "전국적으로 표준어 사용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경북지역 20대는 다른 흐름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 표준어 써도 다 티나! 경북 청년들에게 사투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 언어다. 그렇기에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그 양상은 제한적이다. 연구진은 "보통 방언이 표준어로 바뀔 때 단어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난다. 경북 청년들도 그랬다"고 설명했다. 실제 경북 청년들은 부모 세대와의 차이로 '단어'(37.9%)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하지만 단어가 표준어로 바뀌더라도, 억양과 음높이는 끝까지 남았다. 경북 방언의 독특한 음높이 체계가 청년층에서 유지되며,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2'와 'e'를 구분하는 억양 역시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경북 청년들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언 요소로 억양(24.6%)과 음높이(18.9%)를 꼽았다. 이 때문에 경북 청년들은 "내가 쓰는 표준어는 서울말과 다르다"고 인식했다. 경북 방언 특유의 역동적인 억양 때문에, 실제 말 속도와 관계없이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더 빠르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을 두고도 "이 역시 나의 말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특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에 따라 경북 청년들은 스스로를 '표준어 화자'라고 부르는 데 어색함을 느꼈다. 대다수는 자신을 '경북 방언 화자'로 규정했다. ◆ 상황별, 성별따라 '언어 스위치' 그렇다고 이들이 사투리를 무조건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언어 스위치'를 켠다. 부모나 고향 친구와 있을 때는 방언 사용이 각각 41.3%로 크게 늘어나지만, 교수(0%)나 아르바이트(2.7%) 등 격식 있는 자리에서는 방언 사용이 압도적으로 낮아졌다. 사투리가 관계를 확인하고 분위기를 조절하는, 상황 맞춤형 '언어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성별에 따라서도 차이가 뚜렷했다. 남성은 방언에 대한 '의리'가 강했다. 20년 뒤에도 지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방언을 사용할 것이라는 응답이 73.2점에 달했다. 방언이 단순한 말투를 넘어, 집단 내 유대감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향후 방언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응답이 42.7점으로 나타났다. 취업이나 수도권 이동 등 사회적 환경을 고려해 언어를 조정하려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여성들은 자신의 말투와 수도권 표준어 사이의 차이를 더 민감하게 인식하며, 사회적 평가에 대한 부담 역시 더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경북 청년들에게 사투리는 사라져야 할 언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꺼내 쓰는 '선택 가능한 정체성'에 가깝다. 억양과 말투는 쉽게 바뀌지 않는 뿌리로 남아 있고, 필요할 때는 표준어로 스위치를 전환한다.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다. 실제 경북 20대의 83.6%가 방언 보존의 필요성에 찬성한 것도 이 같은 인식을 보여준다. 사투리는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또 하나의 언어로 자리하고 있다. -----------------------------------------------------------------------------------------------------표1) 부모 세대와 다른 사투리 요소 단어 37.8%어미 18.2%억양 18.2%발음 15.2%음높이 7.6% 표2) 청년층이 많이 사용하는 사투리 억양 24.6%어미 23.8%음높이 18.9%말 빠르기 16.4%단어 12.2%발음 4.1%
2026-04-03 12:00:00
[백년대구 아카이브] 공업 도시를 향한 집념… 공단 조성의 역사
대구가 산업도시로 불렸던 배경에는 건실한 공업단지가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공업단지를 조성할 정도로 대구는 공장에 '진심'인 도시였다. 언제부터 거대한 규모의 공장이 자리 잡게 됐을까. 시계를 1930년대로 돌려보자. 조선총독부는 대구의 북부 지역을 '공업단지'로 꾸미고자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그 계획을 연기했다. 당장 공장을 짓지는 못했지만, 1942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사업의 밑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인 1945년 조선이 해방되면서, 공업단지가 들어설 곳을 닦는 일은 점점 미뤄진다. 시간은 흘러 1950년대에 이른다. 제일모직, 지금의 삼성이 보유하던 공장이 '거대 공단'의 출발점이었다. 제일모직은 북구 침산동에 약 7만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했다. 그 이후로 대한 방직, 조선 방직 등 유사 업종의 공장이 하나 둘 들어서며 대단지가 형성된다. 이들은 근처 신천을 공업용수로 활용하며 덩치를 불렸다. 성서산업단지라고 불리는 제2공단의 역사 역시 길고 방대하다. 고시는 1965년 2월 이뤄졌지만, 본격적으로 계획이 추진된 건 1984년이었다. 총 사업은 5차로 나눠 진행됐는데, 마지막 사업이 마무리된 건 2012년이었다. 공업도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겠다는 집념은 2010년대까지 이어진 셈이다. 일명 '3공단' 제3공업단지는 이름과 달리 제2공단보다 앞서 조성됐다. 1967년, 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경공업 제조업체를 도심 외곽으로 모으고자 기획됐다. 이를 통해 도심 지역으로 공해를 유입시키지 않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3공단은 역설되게도 도심부 중앙 쪽에 위치한다. 조성 당시에는 3공단이 위치한 노원동과 침산동이 도시 외곽이었지만, 도시가 확장하면서 중심부가 된 탓이다. 또 도심부로 지위가 바뀌면서, 지대가 상승해 기존 경공업 업체들은 설 곳을 잃게 됐다. 그 이후로 핵심 산업이 된 건 안경테, 로봇산업이다. 제일모직이 이전하는 등의 영향으로 제1공단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제3공단은 주력산업을 바꾸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6-04-03 11:30:00
[커버스토리] 백사자 가족의 '또 다른 가족'… 달라진 동물원 역할
"벌써 낮잠에서 깼네요" CCTV 화면을 보며 사육사가 밥 준비에 나선다. 홈캠으로 아이를 살피듯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눈을 떼지 못한다. 밥을 먹지 않고 장난을 치는 아기 백사자에게는 "밥 먹어야지" 하며 엉덩이를 두드린다. 지난해 8월 태어난 아기 백사자 루카와 루나에게 사육사들은 부모와 다름없는 존재다. 전근배(45), 정상용(32), 김서우(30) 사육사의 '밀착 육아'는 아기 백사자에 앞서 부모 개체인 백사자 부부를 돌보던 때로 거슬로 올라간다. "백사자 부부에 이어 아기들까지, 이 가족들 돌보다 등골 휘겠다"며 웃으며 건넨 말이지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던 지하 공간에서 7년을 보내야 했던 백사자 부부를 돌보는 일 역시 이들 사육사의 몫이었다. 동물원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이 생명들이 이어질 수 있었을까. 이들은 백사자 가족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줬다. 그리고 이러한 돌봄은 한 생명을 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네이처파크에는 이들 외에도 당시 구조된 55종 234마리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1시간마다 분유…아기 백사자 육아 일기 백사자 부부가 네이처파크로 온 지 1년 여가 지난 어느 날, 사육사들은 암사자의 배가 부른 것을 눈치챘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고, 영양 상태도 나빠 조금만 움직여도 쓰러지곤 했다. 그런 사자가 몸을 회복해 새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은 사육사들에게도 '경사'였다. 사육사들은 이후 과거 사육 이력도 뒤늦게 알게 됐다. "실내동물원에 있을 당시에도 출산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사산했고, 또 한 번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새끼를 잃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번 출산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2024년 8월 18일 오후 1시쯤, 야외 방사장에서 새끼 세 마리가 태어났다. 그러나 어미는 새끼를 품지 않았다. 비가 내리던 날, 새끼들은 진흙에 뒤덮인 채 방치됐고 저체온 위험에까지 놓였다. 결국 사육사들은 세 마리를 모두 데려와 인공 포육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한 마리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루카와 루나, 두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인공 포육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상용 사육사는 "딸을 키우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혼자 맡았는데, 1시간마다 깨서 분유를 먹여야 했다. 24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후 정상용·김서우 사육사가 팀을 이뤄 돌봄을 이어갔다. 포육실이 준비되지 않았던 첫날의 기억도 선명하다. 사육사들은 호텔 객실을 급히 빌려 새끼들과 밤을 보냈다. 그러나 어린 사자들의 울음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다른 투숙객들을 고려해 다음날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고, 한켠에 모기장을 치고 임시 공간을 만들어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인공 포육실이 마련되면서 돌봄은 더 체계적으로 이어졌다. 분유를 뗀 뒤에는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고, 지루해할까 봐 장난감도 하나씩 바꿔줬다. 처음엔 고무공을 줬다가 발톱과 이빨에 금세 터져버리자 물에 띄울 수 있는 부표를 구해왔다. 나무도 직접 베어와 긁고 놀 수 있게 해줬다. 인공 포육실 곳곳에는 사육사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어릴 때는 같이 자면 팔베개를 하고 올라와 자곤 했다. 지금은 장난으로 툭 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웃음) 아기 사자들은 세 사육사를 또렷하게 알아본다. 얼굴을 비비는 '헤드 번팅'으로 친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새끼 때부터 키워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듯하다. "어미가 키워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라도 건강하게 자라줘서 다행이다. 올여름쯤이면 인공 포육실을 떠나 사육장에서 생활하게 될 텐데, 그때가 오면 섭섭할 것 같다. 그래도 결국 독립해야 하는 게 이 아이들의 삶이라 생각한다." 아기 백사자들은 부모 개체와 가까운 공간에서 지내게 되지만, 함께 생활하는 '합사'는 어렵다. 사람 손에서 자란 개체인 만큼 한동안은 사육사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새로 마련될 사육장은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조성될 예정이다. 햇빛과 바람이 통하고, 나무 그늘과 물 웅덩이까지 갖춰질 계획이다. 시민들의 관심도 뜨겁다. 아기 백사자 공개 프로그램 '아기 백사자 산책'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백사자 부부가 구조될 당시부터 지켜봤다는 류제광(35) 씨는 "잘 지내길 응원했던 백사자 부부가 아기 사자를 낳았다는 소식에 정말 기쁘고 가슴이 뭉클했다"며 "백사자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구조된 동물들 모두에게 '새 삶' 아기 백사자만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아니다. 백사자 부부와 함께 구조됐던 긴팔원숭이 부부도 올해 2월 새끼를 낳았다. 과거 이들은 좁은 유리장 안에 갇혀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한자리에 앉아 있거나, 관람객들이 먹이를 넣어주는 구멍만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넓은 사육장에서 나무를 타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새끼 역시 아직은 어미 품에 안겨 있지만, 머지않아 부모를 따라 나무를 오르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변화는 다른 구조 동물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구조된 55종 234마리가 네이처파크에서 살아가고 있다. 화장실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지내던 미니돼지는 흙바닥 위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90cm 남짓한 수조에 갇혀 있던 사막여우는 넓은 공간에서 다른 개체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굴을 팔 수조차 없던 시멘트 바닥 위의 미어캣은 흙을 밟고 직접 굴을 파며 본래의 습성을 되찾았고, 좁은 사육장에 흩어져 지내던 알락꼬리여우원숭이들은 숲 형태의 공간에서 무리를 이루며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 이후의 삶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다. 사육사들은 "갈 곳 없고 상태가 좋지 않은 동물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점은 의미 있지만, 적응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구조된 동물들은 대부분 과거 환경에서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상태다. 먹이부터 하나씩 다시 맞춰야 한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개체는 서서히 먹이량을 늘려야 하고, 종에 맞는 먹이를 세심하게 조절한다.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치료 역시 필수다. 관절이나 피부 질환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백사자 부부 중 수컷 역시 관절이 약해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다. 이처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만큼 치료비 부담도 적지 않다. 기존 개체와의 '합사'도 또 다른 과제다. 구조 당시 나무 상자에 갇혀 있던 하이에나 두 마리는 1년 넘게 쌓인 배설물 때문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도 들기 힘들 정도였다. 현재는 기존 개체들과의 합사를 시도 중이지만, 과정은 쉽지 않다. "하이에나는 원래 무리가 아니면 잘 섞이지 않는 종이다. 두 무리로 나눠 기존 개체들과 단계적으로 합사를 시도하고 있다."합사가 원활하지 않을 경우 싸움이나 치명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어, 현재는 교차 방사를 통해 서로의 냄새에 적응시키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같은 어려움은 공간 문제로도 이어진다. 구조된 동물들을 위한 사육 공간을 마련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다. 부천의 한 실내동물원에서 온 반달가슴곰의 경우, 사육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여우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 동물원, '보는 곳'에서 '살리는 곳'으로 치료비 부담부터 합사의 어려움, 공간 확보 문제까지. 구조된 동물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구조를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설 기업이라 이윤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손님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동물들이 최대한 동물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이다. 사람 손에서 자라고 동물원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 더 자유롭게, 동물답게 지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이 같은 고민은 최근 동물원 전반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단순히 동물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보호와 치료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청주동물원이 국내 1호 '국가거점동물원'으로 지정된 사례도 이를 보여준다. 이곳에는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인기 동물 대신, 부리가 부러진 독수리나 노쇠한 사자, 웅담 채취 농장에서 구조된 곰들이 있다. 내실로 향하는 문이 항상 열려 있어 동물은 원할 때만 방사장에 나온다. 관람객이 동물을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물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환경이 제공된다. 보호소이자 재활치료소로서 동물원의 정체성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복지 전담 인력의 역할도 점차 주목받고 있다. '사육사'라는 명칭을 넘어 '동물복지사'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동물의 복지와 환경 개선, 행동 문제 해결까지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동물을 단순한 '볼거리'로 소비하는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동물의 삶을 돌보고 함께하는 이들 역시 분명히 늘고 있다. 동물원이 '보는 곳'을 넘어 '살리는 곳'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 역시 달라져야 할 때다.
2026-03-27 13:00:00
[YES KIDS ZONE] 도서관·책모임·책상담… 진화하는 '책육아'
요즘 육아의 핵심 키워드인 '책육아'. 하지만 이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유명하다는 전집 수백 권을 책장에 들여놓고, 부모들은 할부로 카드 값을 갚아가던 시절도 있었다. 비싸게 들여온 만큼 읽히고는 싶지만, 아이는 좀처럼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책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전문가들 역시 스마트폰과 영상 콘텐츠, 입시 중심 환경 속에서 "책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책육아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 주말마다 도서관 찾아 삼만리 24개월 아들을 키우고 있는 도혜민(35) 씨는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찾는다. 과거 도서관이 '조용히 책을 읽는 공간'에 머물렀다면, 최근에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면서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아이가 뛰놀고,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다. 도 씨의 아들은 특히 대구 뉴평리도서관 어린이자료실을 좋아한다. 집 모양으로 꾸며진 작은 공간에 들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야기방'이 있어, 아이가 편안하게 머물며 책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색다른 특징이다. 이 밖에도 도서관의 변화는 다양하다. 일부 도서관에서는 공동육아나눔터를 함께 운영하며 장난감이나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도 씨는 "지난 주에는 대구도서관에 다녀왔고, 수성구 그림책도서관도 자주 간다"며 "빈백에 누워 책을 읽는 아이들도 많아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자연과 결합한 공간도 눈에 띈다. 앞산 숲속책쉼터는 소규모 비용으로 방갈로 형태의 공간을 빌려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달성어린이숲도서관은 '요정들의 오두막'을 중심으로 다양한 열람실과 체험 공간이 조성돼 있다. 도 씨는 "도서관 안에 미끄럼틀이나 놀이터도 있고, 숲이나 캠핑장을 연상시키는 공간에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책을 접한다"며 "아직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도서관은 단순한 독서 공간을 넘어 체험과 놀이, 휴식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콘텐츠와 체험형 프로그램, 다양한 테마 공간까지 더해지면서 '딱딱한 도서관'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평가다. 또 일부 지자체는 육아 지원 정책의 일환으로 도서관과 협력해 책 지원이나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책육아 환경 조성에도 나서고 있다. ◆ 책 모임도 활성화 "책 육아 공유" 도서관을 찾지 않더라도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는 '책 모임'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엄마들끼리 모여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부터, 아이와 함께 참여하는 형태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출판사나 기관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비슷한 관심을 가진 부모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임을 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년생 자매를 키우고 있는 이윤수(44) 씨는 "첫째 때부터 책 모임에 참여했으니 벌써 7년 정도 됐다"며 "책육아를 하고 싶어도 막막할 때 다른 부모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모임 형태도 다양하다. 책을 서로 공유하는 가벼운 모임부터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를 인증하는 활동, 연령이 높은 아이들의 경우 독후활동을 함께 진행하는 방식까지. 이 같은 변화는 과거 '좋다는 전집을 사서 읽히는' 방식에서 벗어나, 부모가 직접 공부하고 아이의 연령과 성향에 맞는 책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에 지자체도 책육아 지원에 나서는 분위기다. 두류도서관과 수성도서관 등에서는 부모 대상 책육아 교육과 강연이 운영되고 있으며, 대구시교육청 역시 가정 연계 독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실질적인 책육아 지원에 힘을 보태고 있다. ◆ 아이에게 맞는 책육아 필요 책육아 방식이 다양해지고 세분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에 매달리는 경향도 있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많이'가 아니라 '아이에게 맞게'라고 말한다. 대구에서 해피책방어린이서점을 운영하는 장주미(44) 씨는 그 변화를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 전직 교사이자 두 아이를 키운 엄마이기도 한 그는 "예전에는 유명하다는 전집을 통째로 들이는 식의 책육아가 많았다면, 요즘은 우리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보는 부모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실제 책방을 찾는 부모들의 질문도 훨씬 구체적이다. '몇 개월인데 무슨 책을 보여줘야 하느냐'는 질문에서 나아가, 한글은 알지만 읽기 독립이 안 되는 아이, 책은 좋아하지만 교과 이해력이 부족한 아이, 독서 습관은 잡혔지만 사고력을 키워주고 싶은 아이 등 고민이 세분화됐다는 것이다. 장 씨는 "지금은 '좋다는 책'보다 '우리 아이에게 맞는 책'을 찾는 분위기"라며 "같은 개월 수여도 아이마다 성향과 독서 습관, 책을 좋아하는 포인트가 전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책 추천에 앞서 부모에게 여러 질문부터 던진다고 했다. 아이 개월 수는 물론,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 하루 중 아이가 책을 꺼내오는 빈도는 어떤지, 주로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책을 읽을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이나 유독 반응하는 부분이 있는지 등을 먼저 묻는다. 이를 통해 아이가 책이라는 매체 자체를 좋아하는지, 이야기의 흐름을 즐기는지, 아니면 부모와 집중하는 시간을 좋아하는지를 가늠한다는 설명이다. 장 씨는 "책 상담을 4천700가정 넘게 해오면서 느낀 건, 부모가 인터넷 정보만 믿고 '이 시기엔 이 책' 식으로 접근할수록 오히려 더 흔들린다는 점"이라며 "아이의 성향과 현재 독서 상태를 보고 골라야 실패가 적다"고 말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이런 관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두 남매를 키울 때만 해도 연령별 발달표에 맞춰 '이 시기엔 이런 책을 읽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아이들을 키우면서, 또 수천 건의 상담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장 씨는 독서가 사교육 불안과 입시 불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탕이 된다고 믿는다. 다만 그 출발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즐겁게 책과 친해지게 하느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육아가 너무 숙제처럼 되면 부모도 힘들고 아이도 책을 싫어하게 된다. 책은 결국 읽어주는 사람과 아이가 함께 즐겨야 한다"
2026-03-27 12:30:00
[커버스토리] 2년 뒤 2만 마리 보호 대상… 인프라 넘어 구조 문제
시계를 2024년으로 되돌려보자. 실내동물원에 방치됐던 백사자 부부. 만약 이들을 받아줄 곳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동물단체들이 나서 구조를 시도했을 것이고, 보호시설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받아줄 곳이 없었다면, 그때는 어땠을까. 결국 아기 백사자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이들은 2.5평 남짓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가정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동물원 허가제를 통과하지 못한 시설이 2028년 유예기간 이후 폐업할 경우, 최대 2만 마리에 달하는 동물들이 한꺼번에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들을 받아줄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 우선일까,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먼저일까. 동물단체들은 이를 단기적·장기적 과제로 나눠 함께 개선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다. ◆구조 이후, 감당 못하는 현실 동물원 허가제는 일정 기준을 갖춘 시설만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기존 시설에는 개선을 위한 유예기간을 두는 제도다. 정부는 2023년 관련 법을 개정해 허가제를 도입하고, 기존 동물원에 대해서는 2028년까지 계도기간을 부여한 상태다. 이 같은 제도 도입은 국내 동물복지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구조 이후를 감당할 공공 인프라와 책임 체계는 여전히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동물원 동물 대부분은 '전시 동물'로 분류돼 구조 이후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상이 아닌 만큼, 보호와 수용은 결국 민간 동물원이나 시민단체에 맡겨지는 구조다. 동물 구조에 참여하고 있는 한 민간 동물원 관계자는 "국립생태원이나 야생동물구조센터처럼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 인프라가 더 확충될 필요가 있다"며 "민간 동물원도 구조된 동물을 더 많이 수용하고 싶지만, 공간과 비용 등 여러 여건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려움을 감수하고 데려오더라도 이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데 부담이 큰 경우도 적지 않다"며 "구조 동물을 데려올 때 사육 공간 조성이나 관리에 대한 지원이 이뤄진다면 동물복지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보호시설 확충과 수용 능력 확대가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정부 주도의 보호시설 확대와 함께 거점 동물원, 민간 동물원, 수의 인력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해 단기적인 수용 인프라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동물자유연대 강재원 사회변화팀장은 "정부가 보호시설 조성과 거점 동물원 제도를 도입하는 등 방향성은 긍정적"이라며 "남은 개체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산 확대와 다양한 수용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근본적 해결 없다면 개선 어려워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상황은 복잡하다. 반려동물은 물론 대형 야생동물까지 모든 개체를 보호시설에서 장기간 수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정부 역시 거점 동물원 등을 중심으로 긴급 보호 방안을 마련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모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결국 인력과 예산, 공간이라는 물리적 제약 속에서 모든 개체를 무한정 보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유입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과거 수익을 목적으로 누구나 비교적 쉽게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환경이 현재의 문제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2022년 동물원수족관법이 개정되면서 동물원 허가제가 도입됐지만 이 역시 보다 강화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동물을 들여온 이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역량과 자본을 갖춘 곳만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는 반려동물 문제와도 닮아 있다. 동물자유연대 강재원 사회변화팀장은 "매년 10만 마리 이상의 유기·유실 동물이 발생하는 것 역시 동물을 쉽게 사고팔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롯된다"며 "근본적인 유입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구조 이후의 문제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실적으로 모든 개체를 장기간 보호시설에서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향후에는 안락사 문제까지 사회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안락사는 생명의 책임성 측면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 외에 현실적인 대안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보호 인프라를 확충해 구조된 동물을 감당하고, 장기적으로는 동물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구조 자체를 개선하는 이중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구조 이후를 감당하는 일과, 구조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더 이상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2026-03-27 12:00:00
[아름다운 동행] 성수기 수익 대신… 어르신 여름을 바꾸는 손길
여름을 앞둔 요즘, 전화가 불통되는 사람들이 있다. 에어컨 청소 업체들이다. 더위가 오기 전 미리 청소와 점검을 해두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고객의 집을 오가는 일정이 쉴 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병수(33) 씨의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강 씨는 퇴근 후 저녁 시간이나 주말 등 틈나는 시간을 쪼개 무상으로 에어컨을 살피는 '재능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조금 덜 바쁠 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비수기 때 하면 제 몸은 편하겠지만, 어르신들께는 지금이 더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더워지면 바로 쓰실 수 있죠" ◆어르신 댁 에어컨 무상 청소 지난 18일 찾은 한 어르신의 집. 에어컨 청소가 시작되자 어르신은 옆에서 지켜보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이번 여름도 그냥 참고 지나가야 하나 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에어컨을 분해하자 내부에는 곰팡이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장기간 청소가 이뤄지지 않으면 냉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떤 어르신 댁에서는 실내 흡연으로 에어컨 내부까지 담배 냄새가 깊게 밴 경우도 있었다. 분해하는 순간 벌레가 쏟아진 적도 있다" 강 씨는 이러한 상황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건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과 직결된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순 청소를 넘어, 어르신들의 생활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드리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에어컨 청소 비용은 기종에 따라 7만~15만 원 수준이다. 누군가에겐 부담이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여름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비용이 되기도 한다. 이에 강 씨는 장비와 세척제, 이동 비용, 인건비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부담하며 재능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 청소보다 오래 남는건, 대화 청소가 한창인 시간, 어르신이 한쪽에 서서 연신 말을 건넨다. 걸레를 들고 따라다니며 도와주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그거 무거워요. 제가 할게요. 대신 재밌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강 씨가 웃으며 말하자, 어르신도 따라 웃는다. "아이고, 늙은 할매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다 있네." 강 씨는 청소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대화'라고 말한다. 청소로 묵은 때를 닦아내듯,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쌓인 외로움도 함께 덜어내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자식 이야기, 살아온 시간, 혼자 지내며 느끼는 외로움까지. 짧은 시간 속에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어르신들께는 누군가 잠시라도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어르신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에어컨도 깨끗해졌지만, 사람을 만나서 더 좋았다." 그 말을 들으며 강 씨는 생각했다. "내가 청소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온 거구나." 그 순간, 이 활동을 계속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은 일을 시작한 지 1년쯤 됐을 때 생겨났다고. "2017년부터 에어컨 청소와 보수 일을 해왔는데, 그때 대구 남구의 한 고아원에서 세탁기 청소를 해본 적이 있다. 이후 같은 해 에어컨 청소 재능기부를 시작으로, 수성구 고아원 등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며 "봉사라고 해서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일을 매일매일 꾸준히 하듯 가능한 범위에서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선한 영향력, 다양한 분야로 확장 강 씨의 재능기부는 주변으로도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다. 팀원들에게 이 같은 활동을 이야기했을 때, "취지가 좋다", "필요하면 언제든 함께하겠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실제로 한 번은 강 씨가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로 방문이 어려워지자, 팀원이 대신 어르신 댁을 찾아 2가구의 청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역시 별도의 보수 없이 자발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강 씨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재능기부를 더 넓은 형태로 확장해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사업자들과 협업해, 보다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들어가고 싶다." 현재 그는 도배, 주거 청소, 커튼·블라인드 설치, LED 조명 교체, 요리 등 여러 업종 종사자들과의 협업을 구상 중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특성을 고려해 외부 활동보다는 주거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집을 정비하고, 따뜻한 식사를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작은 재능에서 시작된 이 활동은 이제 '통합형 재능기부'로의 확장을 앞두고 있다.
2026-03-27 12:00:00
객관성을 유지하며 살아온 나에게, 그 객관성을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한태서. "아이고~ 태서 천재~" 태서가 태어나고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다. 태서의 별명은 '천재'. 가족들이 모인 날이면 '한태서 천재설'은 가설을 넘어 거의 정설처럼 통용된다. 나도 신이 나서 태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총동원한다. 짧은 혀로 할 수 있는 말들을 줄줄이 시키고, 지시를 따르게 하고, 재롱도 부리고, 춤도 시킨다. 그럴때면 가족들 반응은 항상 같다. "태서 진짜 똑똑하네" "머리 큰 게 이유가 있었네" "돌잡이 때도 판사봉 잡았잖아!" "서울대가 뭐야 하버드도 가겠다" 때로는 과도한 '천재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약 설명서를 들고 중얼거리면 "영어도 읽나보네, 발음이 좋은데?"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누르면 "기계도 다루네, 공대 보내야겠네"피아노를 두드리면 "두손으로 치는건 어떻게 알았지? 조성진 같다" 물론 가족 말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한태서 천재설'을 전파하지는 않는다.대신 조용히 확인해보는 곳이 있다. AI다. "태서가 요즘 이런 행동을 하는데, 이거 좀 천재 아닌가요?" 돌아오는 답변은 늘 같다. "정상 발달입니다." 단호하다. 그리고 정확하다. 괜히 물어본 내가 더 머쓱해진다. 그래, 대부분 아이들이 다 이렇게 크는 거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한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애는… 진짜 좀 다른 것 같기도…"그렇게 오늘도 '한태서 천재설'은 조용히 유지된다.
2026-03-26 12:0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남성은 실직, 여성은 폭력"… 홈리스도 '성별 차이'
3월이지만 아직도 바람은 매섭다. 봄이 오는 듯하다가도 다시 찬 공기가 밀려온다. 계절이 짧아지며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날씨는 점점 '춥거나 덥거나'로 양극화되는 모습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유난히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들이다. 그런데 홈리스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이유로 거리로 내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2025년 〈대구경북연구〉에 발표된 '대구지역 남녀 홈리스 분석'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 홈리스가 거리로 내몰리는 이유와 자립 과정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은 실직이나 부채 등 경제적 요인이 큰 반면, 여성은 가정폭력과 돌봄 부담, 정신질환 등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차이를 고려한 성별 맞춤형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남성은 '실직', 여성은 '폭력' 남성과 여성 홈리스는 거리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남성 홈리스의 경우 실직이나 부채 등 경제적 문제가 주요 원인으로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주거를 잃고 노숙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여성 홈리스는 가정폭력, 돌봄 부담, 정신질환 등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성 홈리스의 노숙 원인이 남성보다 훨씬 복합적인 구조를 보이며, 남성이 약 12개의 요인으로 설명되는 반면 여성은 최대 34개의 요인이 얽혀 있는 경우도 확인됐다. 정신건강 문제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났다. 여성 홈리스의 정신질환 진단 비율은 55.4%로 남성(27.3%)의 두 배 이상이었다. 장애 진단 역시 여성(47.6%)이 남성(22.9%)보다 높게 나타났다. 홈리스들이 생각하는 '집'의 의미에서도 성별 차이가 나타났다. 남성은 집을 '개인적인 독립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정적인 주거를 확보하고 스스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자립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반면 여성은 집을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정서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차이는 자립 방식에서도 나타났다. 남성의 자립 유형은 스스로 자립을 추진하는 주도형과 시설 종사자의 권유에 따르는 순응형 두 가지로 구분됐다. 반면 여성은 보다 다양한 형태를 보였다.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자치형,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하는 가족형, 시설에서 만난 사람들과 협력하는 협력형, 종교적 믿음을 기반으로 삶을 재건하는 신앙형 등 네 가지 유형이다. ◆ 자립 성공 사례 살펴보니 연구진은 노숙인 지원 정책 역시 성별에 따른 차이를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남성과 여성 홈리스가 거리로 내몰리는 원인과 자립 과정이 서로 다른 만큼, 획일적인 지원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자립을 돕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자립에 성공한 사례들은 주거 지원뿐 아니라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와 지원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 남성 홈리스는 쉼터 생활과 자활 근로를 통해 저축한 돈으로 원룸을 계약하며 자립에 성공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고시원과 쉼터를 거친 뒤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면서 안정적인 주거를 확보했다. 여성 홈리스의 경우 시설에서 만난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며 자립을 준비하거나,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주거를 마련하는 사례가 많았다. ◆ 성별 차이 고려한 지원책 필요 연구에서는 특히 정신질환 대응을 위한 정신보건 전문요원 확대 배치와 함께, 개인 상황에 맞춘 다양한 형태의 주거 지원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단독 주거 형태뿐 아니라 공동 이용주택이나 체험형 주거 등 다양한 방식의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주거 제공 이후에도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례 관리와 통합 돌봄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 관계 회복을 지원하는 가족형 쉼터나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체험홈 등 기능별 시설 확충도 중요한 과제로 제시됐다. 대구시는 2019년 「대구광역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조례」를 시행하며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2026년 시행 예정인 지역 통합돌봄 체계 구축을 앞두고 관련 정책 준비도 진행 중이다. 연구진은 "노숙인 지원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개인의 삶의 맥락과 성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지역사회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성별 노숙 진입 원인 분포〉 ■ 남성 홈리스 집(Home)을 잃어버림 : 50% (부모 사망, 가족 해체 등)선택하지 않은 병 및 회피로 얻은 병 : 30% (조현병 발병, 알코올 중독 등)신용을 잃어버림 : 10% (보증 문제, 채무 등 경제적 파산) ■ 여성 홈리스 선택하지 않은 장애 및 정신질환 : 70%여성이기에 감당함 : 40% (가정폭력, 독박 가사·돌봄 노동 등)집을 잃어버림 : 30%신용을 잃어버림 : 10%
2026-03-19 11:30:00
3월. 새 학기. 아기들에게도 첫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입소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어린이집은 역시 3월이 가장 붐빈다. 주변을 봐도 "이번에 어린이집 보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어른들만 동기 있는 게 아니다.아기들에게도 어느새 '24년생 동기', '23년생 선배'가 생긴다. 하지만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듯, 시작은 쉽지 않다.보통 어린이집은 2주 정도의 '적응 기간'을 둔다. 긴 곳은 4주까지도 간다. 첫 단계는 엄마와 함께 등원하기. 다음 단계는 엄마가 잠깐 사라지기. 그리고 1시간 혼자 버텨 보기. 현관에서 엄마와 헤어져 보기. 점심 먹기. 낮잠 자기. 낮잠까지 성공하면, 사실상 수습기간 통과다. 물론 아이마다 적응 속도는 제각각이다. 어떤 아이는 며칠 만에 적응하고, 어떤 아이는 몇 주 동안 눈물로 출퇴근(?)을 한다. 태서는 나의 복직 때문에 12개월에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작년 9월이었다. 첫 등원 날은 지금도 또렷하다. 다행히 태서는 적응이 빠른 편이었고, 미션들을 빠르게 클리어했다. 처음 현관에서 헤어지던 날에는 선생님 손을 잡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뒤에서 바라보던 엄마만 조금 서운했다."이렇게 쿨하게 간다고?" 첫 점심을 먹은 날엔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태서가 부족했는지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손짓하더라고요."역시 먹는 일에는 진심이었다.어쩌면 어린이집 적응이 빠른 이유도 간단했을지 모른다. 맛있는 밥이 나오니까. 처음 낮잠을 잔 날 받아본 사진은 아직도 가끔 들여다본다.낯선 공간에서도 쿨쿨 잘 자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런 태서가 이제 만 1세반이다. 만 0세반 동생들이 생긴, 어엿한 형님인 셈이다.그리고 어린이집에서 들려오는 태서의 사회생활 이야기는 종종 엄마를 웃게 만든다. 새로 적응하느라 울고 있는 친구를 꽉 안아 준다거나. (힘 조절이 안 돼 선생님이 떼어놓긴 하지만)최애 간식 딸기를 선생님 입에 쏙 넣어 준다던가 (엄마에게는 죽어도 안 주면서)장난감을 친구에게 건네주며 인심을 쓴다거나 (잠시 후 다시 회수하지만)이쯤 되면 태서는 어린이집 사회생활 만렙이다.엄마보다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은 태서.이쯤 되면 엄마도 배워야 할 것 같다."태서야! 엄마에게도 비법 좀 전수해 주라."
2026-03-12 11:45:00
[아름다운 동행] 전세사기 절망 속…피해자가 피해자의 손을 잡다
2022년 10월, 정태운 씨(35)는 전세사기를 당했다. 일반적인 전세사기와는 다른 '신탁 사기'였다.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살고 있던 집에서는 퇴거해야 했다. 1억 원의 보증금은 한순간에 0원이 됐고, 손에 쥔 채권은 종이 쪼가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LH가 해당 주택을 매입하면서 정 씨는 보증금 6천500만 원을 회복했다. 정 씨의 인생으로만 보면 불행은 일단락된 셈이다. 이 사건은 전국 첫 'LH 매입'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한숨 돌릴 법도 했다. 그러나 정 씨는 멈추지 않았다. "내 사건이 해결된 것뿐이지, 전세사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후 정 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는 민간단체인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의 공동위원장이 됐다. 전세사기를 겪은 사람이 다시 전세사기 피해자 곁에 선 것이다. ◆ 피해자가 돕는 피해자 6일 오전 만난 정태운 씨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그중 한 메시지를 보여주며 정 씨는 미소를 지었다. 카카오톡 대화창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구에서 '1일 상담소'를 운영할 때 만난 분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 신청을 네 번이나 했다가 모두 불인정됐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길에도 다섯 번째 신청을 하고 온 상태였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인정'은 사실상 마지막 동아줄과 같다. 피해자로 인정되면 국가가 해당 주택을 매입하거나, 매입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 무상 거주가 가능하다. 또 채권 매입을 통해 전세대출 상환 부담을 줄이고, 최대 20년간 무이자로 원금만 분할 상환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하지만 인정 절차는 쉽지 않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임대인의 기망 의도가 입증되거나 형사 고소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는 등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단순히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정만으로는 사기로 인정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수차례 신청 끝에 불인정을 통보받는다.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할을 한다. 피해자의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중개대상물 확인서 등 관련 서류를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며 법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낸다. 계약 당시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있었는지, 고의로 사실을 숨긴 정황은 없는지 등을 함께 따져보는 것이다. 정 씨는 이를 두고 "피해자들이 놓친 단서를 함께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피해자 역시 '꼼꼼'의 상담 과정에서 등기부와 계약 서류 속 허점을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형사 고소가 진행됐다. 결국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피해자에서 활동가로 그렇다면 왜 민간단체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전세사기를 당한 뒤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경찰이다. 그러나 계약서상 명확한 사기 정황이나 임대인의 기망 의도가 입증되지 않으면 사건은 대부분 불송치나 불기소로 끝난다. 변호사를 찾아가면 형사소송은 어렵고 민사로 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오지만, 수임료 부담도 만만치 않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피해지원센터 역시 행정 절차 안내에 집중돼 있어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도움은 제한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러 번 문을 두드리다 결국 좌절하는 피해자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정 씨는 그 좌절의 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직접 목격했다. "2024년 5월 대구에서도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에서 여덟 번째였다. 대책위에서 함께 활동하던 분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생각이 확고해졌다. '전문성이 필요하겠다. 아무것도 모르면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날 이후 정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세사기 대응 활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피해를 입은 건물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시민단체들과 함께 대구 전세사기 대책위를 구성했고, 피해자 250여 명이 참여하는 카카오톡 상담방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전국 대책위 활동에도 합류하면서 제도 개선 논의에도 참여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 과정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하지만 정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 상담을 이어가다 보니 법과 부동산 구조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16시간씩 책을 붙잡았고 그렇게 5개월 만에 시험에 합격했다. 정 씨는 "전세사기를 파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법과 제도를 공부하게 됐다"며 "피해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니 '이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25년 12월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이 발족했다. ◆ 상담 끝나면 사흘은 몸살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는 구미에서 정기 상담소를 연다. 피해자들이 예약을 통해 찾아오면 상담사들이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등을 함께 살펴보며 대응 방법을 안내한다. 특정 지역에서 집단 피해가 확인될 경우에는 '일일 상담소'를 운영한다. 피해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설명을 듣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찾아가는 방식이다. 첫 상담소는 오피스텔 전세사기 피해가 컸던 대구 중구에서 열렸고, 두 번째 상담소는 다가구 주택 100여 채에서 피해가 발생한 구미 진평동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 씨는 상담 방식도 피해자 상황에 맞춰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상당수가 생계 때문에 평일 낮 시간을 내기 어렵다 보니 두 번째 상담소부터는 주말 운영도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인력이다. 전문 상담원은 정 씨를 포함해 두 명뿐이고, 보조 상담사 두 명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상담은 대부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진다. 한 사람당 한 시간씩 시간을 나눠 최대 40명까지 상담을 진행한다. 피해자의 계약 내용과 보증금 규모, 근저당 상황이 모두 달라 상담 과정에서는 빠르게 계산하고 판단해야 할 내용도 많다. 정 씨는 "상담이 끝나면 진이 빠진다. 점심시간만 지나도 머리가 아플 정도"라며 "하루 상담을 마치면 이틀, 사흘은 몸져눕는다"고 말했다. ◆ 모두 함께 걸으니 가능한 일 그럼에도 그들이 상담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도 피해자들이 '도움이 됐다'고 말해주면 버틸 힘이 생긴다." 정 씨는 이 활동이 여러 사람의 힘이 모였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꼼꼼'의 중심은 전세사기 피해 당사자들이지만, 여기에 법률·노동·의료 등 각 분야 전문가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변호사들은 형사 고소와 민사 소송 등 복잡한 법적 절차를 돕고, 노무사들은 피해로 생계가 위태로워진 이들의 경제적 회복 방안을 함께 고민한다. 정신적 충격이 큰 피해자들을 위해 의료진이 심리 상담과 트라우마 치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정 씨는 "전세사기 사건의 경우 변호사 수임료만 해도 수백만 원이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함께하는 변호사들은 최소 비용으로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며 "이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여 피해자들에게 닿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상담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토대로 같은 임대인이나 중개사에게 피해를 입은 사례가 확인되면, 개별 대응보다 공동 고소를 권하기도 한다. 여러 피해자가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사건의 실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 씨는 "그럴 때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정 씨는 "처음에는 도움을 받으러 왔다가 나중에는 다른 피해자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며 "그분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고 전문 상담 인력으로 키워가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 〈소박스 - 전세사기 예방 체크리스트〉 집을 보러 가면 보통 햇빛이 잘 드는지, 물이 잘 나오는지, 벌레는 없는지부터 확인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다음은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 공동위원장이 강조한 전세사기 예방 체크리스트다. ▶ 등기부등본 먼저 확인하기 집을 보러 가기 전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근저당 설정 여부와 채권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세보증보험 가입 가능 여부 확인하기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주택인지 확인하면 위험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 공인중개사 등록 여부 확인하기 계약 전 공인중개사 자격과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중개사무소 정보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 임대인의 재산 상황 살펴보기 임대인이 보유한 주택 수와 채무 상황에 따라 보증금 반환 위험이 커질 수 있다. ▶ 피해가 의심되면 혼자 고민하지 않기 전세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정 씨는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은 매우 치밀하게 접근한다"며 "피해를 인지했다면 혼자 버티기보다 가능한 한 빨리 상담을 통해 대응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26-03-12 11:45:00
[YES KIDS ZONE] "우리 애는 왜 이럴까"… 영유아 기질검사 찾는 부모들
"우리 애는 왜 이럴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질문. 아직 의사소통이 어른만큼 완전하지 않은 영유아 시기에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기 어렵다. 어른이라면 MBTI라도 물어보면 될 텐데, 아이에게는 그럴 수도 없다. 그런 답답함이 쌓일 즈음 부모들은 '기질검사(TCI)'라는 문을 두드린다. TCI는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 특성을 함께 살펴보는 성격 검사다. ◆ 아이 기질검사 수요 폭증, 왜? 성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영유아 시기에는 후천적인 성격보다 타고난 기질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기질검사는 아이의 행동과 반응을 이해하는 하나의 참고 도구로 활용된다. 이경은 씨(42)도 그랬다. 최근 아들 재은 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아이가 흥분하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훈육도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자 혹시 ADHD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결국 상담센터를 찾았고, 전문가로부터 '기질검사(TCI)'를 권유받았다. 검사는 놀이 관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상담사가 아이와 함께 놀며 행동을 살피고 부모와 상호작용하는 모습도 관찰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보호자인 이 씨는 아이의 기질과 관련된 질문지에 응답했다. 검사 결과 재은 군은 자극추구 성향이 높고 위험회피는 낮은, 충동성과 흥분도가 높은 기질로 나타났다. 활동적이고 자극에 민감한 유형이다. 하지만 이 씨의 양육 방식은 아이의 기질을 더 자극하는 방향에 가까웠다. 이 씨는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새로운 걸 찾아다녔다"며 "공룡을 좋아한다고 하면 공룡박물관을 찾고, 곤충에 빠지면 곤충박물관으로. 주말이면 키즈카페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의 기질을 자극하는 활동은 많이 했지만, 흥분했을 때 스스로 진정하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 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띈 항목은 '예기불안'이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높은 기질이다. 이 씨는 "아이가 불안해할 때마다 '괜찮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며 "그런데 이런 기질의 아이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은 말이라는 설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이러한 기질의 아이의 경우 불안해할 때 막연한 위로보다 선택지를 제시해 상황의 확실성을 높여주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 부모 양육 방향 알려줘 이렇듯 아이의 기질검사는 아이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는 동시에 부모가 어떤 방향으로 양육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씨 역시 기질검사와 함께 부모 양육태도 검사를 진행했다. 부모가 평소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이 씨는 아이의 행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기질 자체가 흥분도가 높은 아이다 보니 쉽게 흥분하고, 진정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고 하더라"며 "부모 모두 이성적인 성향이 강해 감정을 충분히 읽어주지 못한 점도 아이의 불안을 키웠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 방식대로 아이를 양육해 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6개월 전 기질검사를 받았다는 유혜지 씨(34) 역시 만족감을 나타냈다. 예전에는 아이가 실수 후 위축되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회피 점수가 높다는 결과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유 씨는 "다른 아이들은 괜찮은데 우리 아이만 왜 이럴까 하며 아이를 탓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며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양육 방식을 바꾸니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 하나의 도구로 잘 활용해야 25년간 놀이치료 현장에서 활동해 온 윤경민 체인지아동발달연구소장은 최근 영유아 기질검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윤 소장은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예전보다 기질검사를 문의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했다. 이어 "양육의 어려움이나 어린이집·유치원에서의 사회성, 주의집중 문제 등을 계기로 상담을 찾는 부모들이 많다"며 "아이의 행동이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문제인지 궁금해 검사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심리검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검사 결과를 맹신하기보다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어떻게 조절하며 살아갈지를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TCI 검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질은 타고난 성향을 의미하지만 성격은 그 기질을 얼마나 잘 조절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설명이다. 윤 소장은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운전자가 그것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드러날 수 있다"며 "기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다루는 힘을 기르는 것이 검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또한 영유아 기질검사의 경우 대부분 부모 보고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해석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부모가 생각하는 아이의 기질과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부모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함께 갈 때 더 정확해진다"고 말했다. 윤 소장은 "양육은 아이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의 기질이 만나 상호작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아이의 행동이 힘들게 느껴질 때 그것은 부모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두 사람의 기질이 충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의 말도 덧붙였다.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라면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2026-03-12 11:45:00
[YES KIDS ZONE] "우리 애는 왜 이럴까"… 영유아 기질검사 찾는 부모들
"우리 애는 왜 이럴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질문. 아직 의사소통이 어른만큼 완전하지 않은 영유아 시기에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기 어렵다. 어른이라면 MBTI라도 물어보면 될 텐데, 아이에게는 그럴 수도 없다. 그런 답답함이 쌓일 즈음 부모들은 '기질검사(TCI)'라는 문을 두드린다. TCI는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 특성을 함께 살펴보는 성격 검사다. ◆ 아이 기질검사 수요 폭증, 왜? 성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영유아 시기에는 후천적인 성격보다 타고난 기질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기질검사는 아이의 행동과 반응을 이해하는 하나의 참고 도구로 활용된다. 이경은 씨(42)도 그랬다. 최근 아들 재은 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아이가 흥분하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훈육도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자 혹시 ADHD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결국 상담센터를 찾았고, 전문가로부터 '기질검사(TCI)'를 권유받았다. 검사는 놀이 관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상담사가 아이와 함께 놀며 행동을 살피고 부모와 상호작용하는 모습도 관찰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보호자인 이 씨는 아이의 기질과 관련된 질문지에 응답했다. 검사 결과 재은 군은 자극추구 성향이 높고 위험회피는 낮은, 충동성과 흥분도가 높은 기질로 나타났다. 활동적이고 자극에 민감한 유형이다. 하지만 이 씨의 양육 방식은 아이의 기질을 더 자극하는 방향에 가까웠다. 이 씨는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새로운 걸 찾아다녔다"며 "공룡을 좋아한다고 하면 공룡박물관을 찾고, 곤충에 빠지면 곤충박물관으로. 주말이면 키즈카페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의 기질을 자극하는 활동은 많이 했지만, 흥분했을 때 스스로 진정하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 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띈 항목은 '예기불안'이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높은 기질이다. 이 씨는 "아이가 불안해할 때마다 '괜찮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며 "그런데 이런 기질의 아이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은 말이라는 설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이러한 기질의 아이의 경우 불안해할 때 막연한 위로보다 선택지를 제시해 상황의 확실성을 높여주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 부모 양육 방향 알려줘 이렇듯 아이의 기질검사는 아이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는 동시에 부모가 어떤 방향으로 양육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씨 역시 기질검사와 함께 부모 양육태도 검사를 진행했다. 부모가 평소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이 씨는 아이의 행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기질 자체가 흥분도가 높은 아이다 보니 쉽게 흥분하고, 진정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고 하더라"며 "부모 모두 이성적인 성향이 강해 감정을 충분히 읽어주지 못한 점도 아이의 불안을 키웠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 방식대로 아이를 양육해 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6개월 전 기질검사를 받았다는 유혜지 씨(34) 역시 만족감을 나타냈다. 예전에는 아이가 실수 후 위축되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회피 점수가 높다는 결과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유 씨는 "다른 아이들은 괜찮은데 우리 아이만 왜 이럴까 하며 아이를 탓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며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양육 방식을 바꾸니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 하나의 도구로 잘 활용해야 25년간 놀이치료 현장에서 활동해 온 윤경민 체인지아동발달연구소장은 최근 영유아 기질검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윤 소장은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예전보다 기질검사를 문의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했다. 이어 "양육의 어려움이나 어린이집·유치원에서의 사회성, 주의집중 문제 등을 계기로 상담을 찾는 부모들이 많다"며 "아이의 행동이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문제인지 궁금해 검사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심리검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검사 결과를 맹신하기보다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어떻게 조절하며 살아갈지를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TCI 검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질은 타고난 성향을 의미하지만 성격은 그 기질을 얼마나 잘 조절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설명이다. 윤 소장은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운전자가 그것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드러날 수 있다"며 "기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다루는 힘을 기르는 것이 검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또한 영유아 기질검사의 경우 대부분 부모 보고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해석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부모가 생각하는 아이의 기질과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부모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함께 갈 때 더 정확해진다"고 말했다. 윤 소장은 "양육은 아이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의 기질이 만나 상호작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아이의 행동이 힘들게 느껴질 때 그것은 부모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두 사람의 기질이 충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의 말도 덧붙였다.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라면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2026-03-12 11:45:00
[창간 80년,격동 80년] 압승 뒤에 숨은 균열…1956년 대선이 남긴 경고
겉으로는 압도적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의 이면에는 균열이 자라고 있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재확인처럼 보였지만, 민심의 변화가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균열은 4년 뒤 4·19 혁명으로도 이어진다. ◆ 대통령 자리 지켜낸 이승만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의 길을 연 자유당의 이승만은 70.0%의 득표율로 대통령 자리를 지켜냈다. 수치만 놓고 보면 흔들림 없는 승리였다. 그러나 내용은 달랐다. 유력 야당 후보였던 민주당 신익희가 선거를 열흘 앞두고 급서했음에도, 진보당 조봉암은 216만 표(약 30%)를 얻었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 민심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전체 투표수의 20%를 넘는 무효표 역시 눈길을 끌었다. 900만 표 가운데 185만 표가 무효 처리됐는데, 상당수는 선거 직전 별세한 신익희 후보를 추모하는 표로 분석됐다. 당시 민주당의 구호도 지금까지 회자된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어린아이들까지 따라 외칠 정도로 이 구호는 빠르게 확산됐다. 이에 맞서 자유당은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봤자 별수 없다",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구호로 대응했지만, 변화 요구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더 큰 충격은 '부통령 선거' 같은 날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은 민주당 장면에게 패했다. 대통령은 자유당, 부통령은 민주당. 권력의 축이 엇갈린 것이다. 이는 이승만 정권에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었다. 당시 헌법상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 시 권한을 승계하는 위치였다. 야당 인사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장기집권 체제에 구조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선거를 통해 드러난 민심의 변화는 정권에 분명한 경고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택한 길은 타협이나 개혁이 아니었다. 통제의 강화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 과정에서는 야당 후보에 대한 압박과 선거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개표 부정 의혹이 제기됐다. 1959년에는 1956년 대선에서 200만 표 넘는 지지를 받았던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다. 이는 단순한 사법 판단을 넘어 비판적 정치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언론과 야당 활동에 대한 제약도 한층 강화됐다. ◆ 1956년과 4·19의 연결 그렇다면 이 흐름은 어디로 이어졌을까.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였다.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조직적인 부정을 자행했고,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국적 항쟁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역사의 출발점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장기집권 체제에 드리운 첫 균열이었다. 민심의 변화가 처음으로 확인된 해였고, 권력이 불안을 체감한 시점이었으며, 그 불안이 점차 통제와 탄압으로 기울기 시작한 분기점이었다. 정치사 연구자들은 1956년 대선을 "이승만 체제의 균열이 가시화된 선거"로 평가한다. 조봉암의 30% 득표와 부통령 선거 결과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장기집권 체제의 불안을 드러낸 지표였다는 분석이다. 겉으로는 재선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해 봄, 권력의 토대에는 이미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그 균열은 해를 거듭하며 커졌고, 결국 4년 뒤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열로 이어졌다.
2026-03-12 11:30:00
[아름다운동행] 어르신 곁 딸처럼 친구처럼…집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명절 연휴가 지나가면 집은 더 고요하다. 며칠간 오가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고, 식탁 위에 남은 반찬 몇 가지가 시간을 말해준다. 그 적막을 깨는 건 전화 한 통이다. "식사는 하셨어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따뜻한 목소리에 어르신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자녀가 멀리 살거나 왕래가 끊겼다면 고립감은 더 심해진다" 정연휘(45) 사회복지사는 명절 직후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족이 북적이던 시간이 끝나면, 더 깊은 침묵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정 씨는 그 침묵을 확인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지난 27일, 그의 하루를 따라 가봤다. ◆ 은행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이른 아침, 재가복지센터 사무실에 출근한 정 씨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방문 일정과 어르신 상태를 점검하고, 밤사이 특이사항은 없었는지 요양보호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재가요양은 일반적으로 요양보호사가 정기적으로 어르신 댁을 방문해 식사·청소·신체활동 등을 지원하는 구조다. 사회복지사는 어르신의 욕구를 파악하고 서비스 계획을 수립하며, 상태 변화를 점검하고 보호자 상담과 위기 대응을 맡는다. 사례를 총괄 관리하는 이른바 '사례 관리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정 씨의 업무는 행정 관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현장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서류로 보는 어르신과 직접 뵙는 어르신은 다르다. 작은 표정 변화 하나가 건강의 신호일 수 있고, 한마디 푸념이 외로움의 경고일 수 있다" 그가 '재가'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그는 은행원이었다. 은행 창구에서 고객들을 만나며 자연스레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 큰 건 '외로움'이었다. 그때부터 사람을 직접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이 쌓여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결국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재가는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일이다. 냉장고 안 사정, 방 안의 온기, 약 봉투가 쌓인 서랍까지 모두 삶의 흔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세심해야 하고, 더 인간적이어야 한다" ◆ 현장에서 마주한 순간들 "어르신이 아프시다고 하네요." 요양보호사의 전화를 받은 정 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르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병원에 가자고 해도 "괜찮다"고만 한다는 내용이다. 정 씨는 곧장 차에 올라 어르신 집으로 향했다. 손사래를 치는 어르신을 차분히 설득해 결국 병원으로 모셨다. 이처럼 재가 현장은 예고 없이 움직인다. 낙상 사고도 잦다. 실제 한 어르신은 이른 아침 소파에서 넘어졌다. 요양보호사의 연락을 받은 정 씨는 119에 신고하고 보호자에게 상황을 알렸다. 구급대 도착 전까지 의식을 확인하며 대응했고, 병원 이송과 입원 절차까지 챙겼다. "보호자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땐 의료기관과 동 행정복지센터와 협력 체계를 가동한다. 재가요양은 단순 방문 서비스가 아니라 지역 돌봄망의 한 축이다." 그래서 그는 '괜찮다'는 말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늘 괜찮다고만 하시던 분이 있었다. 어느 날 방문했는데 밥솥이 며칠째 그대로더라. 그날 이후 더 자주 찾아뵙게 됐다." 어르신에게 그는 사회복지사이지만, 때로는 딸이고 친구다. 손을 잡아드리고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시간. 정 씨는 그 시간이야말로 가장 큰 돌봄일지 모른다고 했다. ◆ 관계는 시간에서 자란다 위기의 순간을 넘기는 일만이 돌봄은 아니다. 때로는 문을 열지 않는 시간도 견뎌야 한다. "처음에는 문을 열어주지 않던 어르신도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말로 거리를 두시더라." 정 씨는 서두르지 않았다. 방문할 때마다 짧게 안부만 묻고 돌아섰다. "어느 날 제가 은행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분이 젊은 시절 통장 이야기를 하더라. 그날은 30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자꾸 오니까 이제는 기다려진다." 정 씨가 재작년 재가복지센터를 개소한 이유 역시 현장에서 비롯됐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니 조금 더 따뜻한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행정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기관, 어르신과 요양보호사가 모두 존중받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집을 방문하는 일은 번거롭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어르신 대부분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한다. 익숙한 공간, 평생 살아온 자리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소망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것이 어르신을 가장 배려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어르신이 '와줘서 고맙다'고 손을 꼭 잡아주실 때, 사실은 내가 더 배우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 순간들이 나를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다.."
2026-03-05 11:5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대구 평생학습 참여율 28.8%… 정보 닿으면 참여 58.1%
3월 신학기를 맞아 교실마다 새 출발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성인들의 배움은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과 달리 대구 지역 성인의 평생학습 참여율은 전국 평균을 밑돌며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대구광역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이 발표한 〈2025 대구 성인 평생학습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대구 성인 평생학습 참여율은 28.8%로 집계됐다. 전국 평균(33.1%)보다 4.3%포인트(p) 낮은 수치다. 전년(32.2%)과 비교해도 하락했다. ◆ 정보 닿으면 참여율 58.1% 평생학습에 참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직장 업무로 인한 시간 부족'(43.8%)이었다. 장시간 노동 구조 속에서 학습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의미다. 주목할 점은 '동기나 자신감 부족'을 이유로 꼽은 비율이 전년 8.7%에서 19.4%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문제를 넘어, 스스로를 '배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는 심리적 장벽도 커지고 있는 셈이다. 소득 수준에 따른 참여율 격차도 컸다. 월 소득 500만 원 이상 가구의 참여율은 38.2%였지만, 150만 원 미만 가구는 18.7%에 그쳤다. 경제적 자원이 학습 기회를 좌우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보 접근성 역시 한계로 지적된다. 대구의 평생학습 정보접근율은 31.6%로 전국 평균(33.5%)보다 낮았다. 특히 지자체 소식지를 통한 정보 획득률은 14.1%로 전국 평균(25.7%)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정보가 닿았을 때 참여율은 매우 높았다. 대구 시민의 평생학습 정보 접촉 후 실제 참여로 이어진 비율은 58.1%로, 전국 평균(48.3%)보다 약 10%p 높았다. 이는 시민들의 학습 의지가 낮은 것이 아니라, 정보와 기회가 충분히 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배우면 달라져"… 행복감 83.6점 연령별로는 30~40대 참여율이 가장 높았고, 70대는 19.1%로 가장 낮았다. 디지털 접근성, 정보 획득 능력, 신체적 제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성별 차이도 나타났다. 남성은 직업능력 향상 중심의 실용형 학습에, 여성은 문화·예술 등 생활형 학습에 상대적으로 많이 참여하는 경향을 보였다. 평생학습의 효과는 분명했다. 학습 참여자의 삶의 질 향상 기여도는 70.3점으로 전국 평균 68.7점 보다 높았다. 특히 '심리적 만족 및 행복감 증대'는 83.6점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업자 집단의 경우 학습 참여 여부에 따른 생활 만족도 격차가 10.8점에 달해, 학습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사회적 고립 완화와 자존감 회복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대구 평생학습 정책의 초점을 단순한 참여율 제고에서 '기회 접근성 강화'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통합형 학습 플랫폼 구축과 소외계층 대상 평생학습 바우처 확대, 생활권 중심 거점 학습 공간 확충 등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아울러 고령층과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맞춤형 정보 제공 체계 마련도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대구의 경우 평생학습 정보를 접한 시민이 실제 참여로 이어지는 전환율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편이라는 점을 들며 "홍보 체계 정비와 학습 기회 확장이 병행된다면, 대구가 '참여와 혁신이 공존하는 평생학습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그래픽〉 ▶ 대구 성인 평생학습 참여율 28.8% 대구(2024년) : 28.8%전국 평균(2024년) : 33.1%전년 대구(2023년) : 32.2% ▶배움을 가로막는 3대 장벽 1위. 직장 업무로 인한 시간 부족 : 43.8%2위. 비싼 학습비 : 20.1%3위. 동기 및 자신감 부족 : 19.4%
2026-03-05 11:30:00
"차키를 못 찾아서 10분 늦을 것 같습니다." 지각자의 핑계라고 욕해도 좋다. 핑계치고 성의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사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도 잠깐 멍해졌다. '이건 나라도 안 믿겠다.'소파 밑, 신발장, 세탁기 위, 심지어 냉장고까지 열어봤다.아기가 숨긴 차키를 찾다 찾다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무용담을 풀어냈고, 여기저기서 공감의 목소리가 나왔다. "신발장 안은 봤어?""우리 애는 지갑이었는데, 한 달 뒤에 찾았어.""음식이 아닌 게 어디야. 그건 썩은내 나야 발견하지."육아 동지들의 경험담 앞에서 차키는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했다. 차키에 달린 강아지 키링을 진작에 떼어버렸어야 했다.키링을 보며 "멍멍!" 하고 환하게 웃던 아기가 떠오른다.아기에게 이건 자동차 열쇠가 아니라, 작고 반짝이는 보물이었다.숨기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어디 한 번 찾아봐.' 하지만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자, 내 일은 그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친구의 아기는 속옷을 어린이집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고 한다.등원 후 한참 지나 도착한 어린이집 선생님의 문자."어머님.. 가방에서 브라자가 나왔어요."차키는 건전한 애교였다. 웃음이 터졌다. 퇴근 후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16개월 아기에게 물었다."차키 어쨌어?"대답은 당연히 없다.대신 태서는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범인은 항상 평온한 법이다. 천만다행으로 차키는 휴지통 기저귀 뭉탱이 사이에서 발견됐다.요즘 휴지통을 열고 닫는 재미에 빠진 태서를 떠올리다 얻은 힌트였다.오래 묵었는지 똥냄새는 덤으로 얻었다.남편이 휴지통을 비웠다면 차키는 지금쯤 어디쯤일까.아마도 쓰레기 소각장 어딘가에서멍멍 울고 있을 테지.아찔한 상상이다.
2026-02-26 12:00:00
아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하원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장을 보고, 집안일을 한다. 놀이터에서 땀을 흘리며 함께 뛰고, 병원 대기실에서 아이를 안고 달랜다. 잠들기 전 책을 읽어주고, 밤중 울음에도 깬다. 과거, 육아와 가사는 엄마의 몫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아빠의 역할에도 분명한 변화가 일고 있다.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를 돌보는 아빠, '돕는' 수준을 넘어 양육을 함께 책임지는 아빠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 아빠 육아, 낯설지 않은 풍경 2년 전 육아휴직을 사용한 소방공무원 김준영 씨(39)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아내가 산후 우울증이 크게 왔었다. 그래서 빨리 복직하고 싶어 하더라. 그래서 내가 육아휴직을 썼다" 주양육자가 아내였던터라 걱정도 컸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낳은 아내보다 체력적으로는 내가 더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 하나로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김 씨는 아이와 애착 형성을 하는 시기 아빠가 함께여서 좋았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김 씨는 "주변에 보면 '엄마 껌딱지' 아기들이 많다. 그래서 아빠들은 육아에서 해방됐다며 좋아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아이에게 아빠의 역할이 큰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리고 말했다. 실제로 아버지의 적극적인 양육 참여는 아이의 정서 안정, 사회성 발달, 자존감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아빠 육아'는 선택이 아니라 아이 성장에 필요한 요소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아빠들끼리 배우고 나누고 이 같은 변화는 민간 모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인구보건복지협회 대구경북지회가 운영하는 '대구 100인의 아빠단'은 육아에 관심 있는 아빠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참여자 김지수 씨(39)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몰랐는데 많이 배울수 있어 좋다"며 "남자들의 특성상 이런 공동체 형성 및 소통이 어려운데 이러한 활동이 그런 부분을 없애줬다"고 말했다. 이어 "아내에게 자유시간과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는 것 또한 기쁘다"고 덧붙였다.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에서 시작해 남편들끼리 자발적 육아 모임을 꾸리는 사례도 늘고 있다. '아빠 육아'는 더 이상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각 시·군 가족센터에서도 '아빠 육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자녀와 소통하는 방법부터 몸으로 놀아주는 놀이법, 체험 행사까지 내용도 다양하다. 아빠 교육 전문 강사 김성재 씨는 "영유아 시기 아빠와의 놀이 경험은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며 "놀이 과정에서 스킨십과 따뜻한 언어가 아이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설명했다. ◆인프라·정보 여전히 엄마 중심 그러나 현장에서 아빠들은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힌다. 대표적인 사례가 화장실이다.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한다는 한재옥 씨(36) 씨는 "남자 화장실에는 기저귀 교환대가 없는 경우가 많다"며 "마땅한 공간이 없어 대변기 칸에서 처리하거나 차로 이동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이나 마트, 키즈카페 등에는 수유실이나 가족 휴게실이 마련돼 있지만, 여성 이용자가 주를 이루는 공간에 들어가기 부담스럽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실제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진행한 '내가 생각하는 요즘 아빠' 조사에서 '아빠 육아 시 가장 불편했던 점' 3위로 수유실 이용 문제가 꼽혔다. 응답자들은 '남자 화장실 내 기저귀 교환대 설치'와 '남성의 수유실 출입 제한'을 주요 불편 사항으로 지적했다. 정보 접근 역시 쉽지 않다. 지역 맘카페와 육아 오픈채팅방은 대부분 여성 중심으로 운영된다. 여성 인증을 요구하는 커뮤니티도 적지 않다. 남성 양육자는 정보 공유와 고민 나눔의 통로에서 배제되는 구조다. 육아용품 광고와 부모 교육 프로그램 역시 '엄마'를 전제로 기획되는 경우가 많다. 아빠는 여전히 '보조자'로 상정되는 셈이다. ◆ 개인 결단 못 따르는 제도 변화 제도는 열려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더디다. 국가데이터처 자료에 따르면 2024년 대구지역 남성 육아휴직자는 2,245명으로 전년보다 350명(18.5%) 증가했다. 수치만 보면 증가세다. 그러나 비율로 보면 상황은 다르다. 지난해 대구의 남성 육아휴직률은 8.4%로 전국 17개 시·도 중 16위 수준이다. 전국 평균(10.2%)보다 1.8%p 낮고, 가장 높은 제주와는 6.6%p 차이가 난다. 휴직 이후 복귀 부담도 여전하다. 포항의 한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최모(37) 씨는 육아휴직 의사를 밝히자 "그럼 자네 일은 누가 하나"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휴직은 사용했지만, 회사에 '첫 남성 육아휴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이직 준비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법이 보장한 권리이지만, 현장에서는 '권리'보다 '민폐'라는 인식이 더 빠르게 퍼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아빠 육아 참여가 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변화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인프라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가정 안에서의 역할 인식은 달라졌지만, 직장 문화와 공공시설, 정보 구조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육아하는 아빠'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결단을 넘어 제도와 문화의 변화가 함께 뒤따라 한다는 지적이다.
2026-02-26 12:00:00
장애 아동은 법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헌법 제31조는 모든 국민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3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역시 교육기관의 '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를 규정한다. 그러나 권리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구조는 아니다. 병원 진단과 각종 검사, 서류 준비, 취학 유예 결정, 인력 공백 문제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대부분 부모가 직접 감당해야 한다. 행정 절차에 대한 안내는 제공되지만, 실제 준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적·경제적 부담과 대기, 기관 간 정보 단절 문제는 고스란히 가정의 몫이 된다. ◆ 개인에 부담 집중 "변화 필요" 홍정숙 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는 통합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책임이 개인에게 집중되는 구조를 꼽았다. "지금은 교사나 부모 등 개인에게 부담이 집중돼 있다"며 "통합교육을 개인의 역량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학교 차원의 구조적 지원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교사 소진과 학급 운영의 한계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홍 교수가 연구 중인 영국과 일본 사례에서는 학교 단위에서 통합교육을 총괄하는 '특수교육 코디네이터'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교사 지원, 학부모 상담, 외부 의료·복지기관 연계, 학생 실태 파악, 교내 협의체 운영 등을 담당한다. 통합교육의 부담을 개인이 아닌 학교 차원에서 조정하는 구조다. 교육부 산하 국립특수교육원이 정기 발간하는 간행물에서도 해외 통합교육 지원 체계와 학교 단위 조정 기능의 필요성은 언급된 바 있다. 국립특수교육원은 "영국의 경우 모든 학교에 특수교육 코디네이터(SENCO) 배치를 의무화하고, 학교 경영진과 협력해 통합교육 계획을 수립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홍 교수는 이를 "개인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완충지대를 두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일본 역시 학급 붕괴와 교사 소진 문제를 겪으며 학교 단위 위원회와 코디네이터 체계를 강화해왔다고 덧붙였다. 이에 국내 일부 지역에서도 유사한 전담 조직을 운영 중이다. 명칭과 운영 방식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통합교육지원단'이나 '통합교육지원실' 형태로 학교 현장을 지원하는 구조다. 대구 역시 이러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특수교육 영역에 한정되지는 않지만, '학생맞춤통합지원' 체계를 통해 학교 단위 통합지원 모델도 전국 최초로 운영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직이 물리적 공간이나 행정 단위에 머물 경우 실질적 변화를 이끌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홍 교수는 "통합교육지원실이 단순한 공간 개념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학생의 교육·치료·상담·가족 지원까지 아우르는 '서비스 개념'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수교육지원센터의 기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의 진단·선정 중심 역할에서 나아가, 학교 현장에 대한 지속적 컨설팅과 통합교육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발성 행정을 넘어, 학생의 전 교육 과정을 지원하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 제도 보완 움직임… 대구 잰걸음 학령기 진입 과정에서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교육청도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다. 대구교육청 특수교육 관계자는 "장애 등록과 특수교육대상자 등록이 서로 다른 법·부처 체계를 따르다 보니 혼란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특수교육 관련 행정 절차와 학교·학급 운영 현황은 교육청과 지원청,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수학교·특수학급 부족 속 나름의 해법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특수학교 부족과 특수학급 과밀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구조적 과제로 꼽힌다. 그럼에도 대구는 최근 10년 사이 특수학교 2곳을 개교하며 인프라 확충에 나섰다. 학령인구 감소로 통폐합되는 일반학교 부지를 활용해 '병설특수학교'를 설치하자는 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심의 중이다. 현행 법령상 특수학교를 병설 형태로 설치할 수 있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어, 인가 절차가 쉽지 않았지만 개정안이 통과되면 유휴 학교 부지를 특수교육 인프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대구·경북 행정통합 논의와 맞물려 지역 차원의 선제적 도입 가능성도 거론된다. 현장 차원의 변화도 이어지고 있다. 2026학년도부터 대구 한 초등학교는 특수학급을 기존 1개에서 5개로 늘려 '수준별 특수학급'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할 예정이다. 중증도가 높은 학생을 보다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도, 행정적으로는 일반학교 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교육청 관계자는 "경기도의 복합특수학급처럼 일반학교 내 전일제 특수학급을 두는 모델과 유사하다"며 "경기도는 학생 4명당 교사 2명과 실무사를 배치하는 등 밀도 높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6-02-26 12:00:00
입학식이 끝난 뒤 한 어머니가 복도 끝에 서 있다. 다른 부모들이 설렘과 기대로 아이의 첫 교실을 사진에 담는 동안, 그는 조용히 특수교사를 기다린다. "○○○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가 화장실을 혼자 못 가요. 그리고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많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수년간 쌓인 긴장이 배어 있다. 누군가에게 3월은 설렘의 시작이다. 새 교실, 새 친구, 새 시간표가 펼쳐지는 계절. 하지만 장애 아동을 둔 가정에서 3월은 또 하나의 관문에 가깝다. 담임은 누구인지, 보조 인력은 배치되는지, 교실 이동은 안전한지. 몇 해를 거친 준비 끝에야 '입학'이라는 문턱에 섰지만 마음 한켠의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에게 3월은 출발이 아니라 버텨내야 하는 시간에 가깝다. 아이가 오늘도 무사히 교실에 머물길, 지원은 약속대로 이뤄지길, 한 해가 흔들림 없이 이어지길 바라고 또 바란다. 그들의 3월에도 설렘이 찾아올 수 있을까. 주간매일이 그 물음 곁에 섰다. 앞으로의 신학기가, 조금은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 학령기 장애아동, 준비부터 관문 장애 아동이 학령기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특수교육대상자' 신청이다. 보호자가 관할 특수교육지원센터에 신청하면 제출 서류 검토와 아동 관찰, 보호자 상담 등을 거쳐 대상 여부가 결정된다. 문제는 준비 과정부터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발달 지연을 입증할 각종 검사 자료를 갖춰야하기 때문이다. 발달장애 아동을 키우는 김하은(36) 씨는 아이가 네 살이던 9월 특수교육지원센터를 찾았다. 서류 준비에만 약 70만 원이 들었다. 김 씨는 "특수교육청에서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받는 발달검사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안내하지만, 추가 서류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인다"며 "결국 대학병원을 돌며 유전자 검사, 정신과 검사, MRI까지 진행했다"고 말했다. 동네 소아과에서 '발달지연 의심' 소견서를 받아 제출했다가 탈락했다는 사례도 적지 않다. 부모들 사이에서는 "될 수 있는 건 다 해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늘어나는 수요, 부족한 자리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되더라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학교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애 아동이 선택할 수 있는 교육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특수학교에 진학하거나,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에 배치되는 방식이다. 국립특수교육원에 따르면 2025년 4월 기준 대구 지역 특수학교는 11곳(346학급·학생 2천56명)이다. 특수학급이 설치된 일반학교는 351곳으로, 519학급에서 2천601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적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수요 대비 공급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특히 시설과 전문 인력, 치료·재활 연계, 개별화교육 운영 등의 이유로 특수학교를 선호하는 가정이 많다. 수요가 한쪽으로 몰리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특수학교 입학을 두고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렇다면 일반학교 특수학급은 사정이 나을까. 김 씨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유치원 인근 초등학교 특수학급에 보내기 위해 이사까지 했지만 "과밀로 수용이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결국 아들 임유(7) 군은 집에서 도보 1분 거리 학교를 두고 차량으로 15분 이동해야 하는 학교에 배정됐다. 현행 기준에 따르면 특수학급의 적정 정원은 유치원 4명, 초·중학교 6명, 고등학교 7명으로 정해져 있으나, 시·도교육청 대부분이 과밀 특수학급 문제를 겪고 있다. 여기에 특수학교 신설을 추진할 때마다 이를 지역 혐오시설로 인식하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설립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특수학교와 특수학급 모두 자리가 없을 경우, 선택지는 더욱 제한적이다. 학부모는 거주지를 옮기거나 취학을 유예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일단 일반학급에 배치한 뒤 특수학급 자리를 기다리는 방식을 택한다. 대구 중구의 한 초교에는 이 같은 '대기성 일반학급 배치' 학생이 12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학부모는 "일단 일반학급으로 신청해 두면 자리가 날 때 우선 배정된다고 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을 매 년, 매 학기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가 아니라, 영유아 시기부터다. 김 씨는 "일반 어린이집이나 공립 유치원 특수학급 입소를 문의하면 장애전담 어린이집을 권유받는 일이 반복됐다"며 "그렇다고 장애전담 어린이집이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유이는 기관을 다섯 곳이나 옮겨야 했다. ◆ 장애 경중 상관없이 장벽 존재 그렇다면 장애 정도가 심하면 상황은 조금 나을까. 경증 장애 아동을 둔 부모들은 "상태가 애매하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자조 기능이 조금이라도 가능하면 더 도움이 필요한 아이에게 자리가 돌아간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자조 기능이란 스스로 식사하거나 옷을 입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등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능력을 뜻한다. 그러나 중증 장애의 경우에도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권 군보다 장애 정도가 심한 자폐 아동을 둔 한 부모는 "우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특수학교 자리가 없어 일반학교 특수학급에 다니며 2년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중증 아동의 경우 통합학급 수업을 온전히 따라가기에는 제약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는 "행동 조절이 어려운 날이면 학교에서 '데려가 달라'는 연락이 온다"고 털어놨다. 중복장애가 많은 지체장애 아동 가정도 사정은 비슷하다. 장혜연(43) 씨의 아들 이수(16) 군은 뇌병변 중증과 지적장애를 동반한 중복장애가 있다. 자조 기능이 매우 낮아 일상생활의 상당 부분을 보호자가 도와야 한다. 이동은 기어 다니는 수준이고, 식사도 숟가락을 쥐여주면 스스로 입으로 가져가는 정도다. 이처럼 장애 정도가 중증임에도,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에 안정적으로 배치되는 일은 쉽지 않다. 거주지와 무관하게 '자리가 있는 곳'을 따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 씨는 이를 두고 "떠돌이 생활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처음엔 범어동에서 살았지만, 장애전담 어린이집이 칠곡 경대병원 인근에 있어 그쪽으로 이사했다. 유치원은 중구에 자리가 나 다시 옮겼고, 초등학교는 명덕 쪽으로 배정돼 남구로 또 이사했다"며 아이의 교육을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녔다. 주소는 바뀌었지만, 자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특수학교와 특수학급 배정에는 거리 기준이 적용된다. 아이의 장애 특성에 맞는 학교를 찾더라도 거리 기준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 이사를 고민해야 하는 부담은 부모에게 돌아간다. 다행히 수민 군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특수학교에 자리가 나 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아이에게 특수교육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그때 마침 자리가 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가 아니라 '운'에 따라 교육 환경이 결정되는 현실. 부모들이 체감하는 또 다른 장벽이다. ◆ 학교 보내도 노심초사 '가혹한 3월' 이영화(50) 씨는 매일 3교시마다 학교를 찾는다. 딸 전미진(14) 양의 화장실 이용을 돕기 위해서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실무원(보조인력) 지원을 받고 있지만, 화장실 보조까지는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다. 결국 그 역할은 부모의 몫이 됐다.중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여러 학교에 문의했을 때 기존 학생이 실무원 지원을 받고 있어 추가 배치가 어렵다는 답을 들은 것이다. 여학생의 경우 남성 공익요원 배치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 씨는 "학교에 보내지만 등교부터 하교까지 늘 초조하다. 직장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부모들은 사실상 '상시 대기 상태'에 놓인다. 수업 중 돌발 상황이나 교실 이동, 쉬는 시간 사고 가능성 때문에 먼 거리로 통학을 시키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학교 주변을 맴도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언제 걸려올지 모를 학교 연락에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일도 일상이 됐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문제는 학ㄹ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걸까. 왜 수민 군도, 미진 양도 여전히 부모의 도움에 의존해야 할까. 현장은 결국 '인력 문제'를 지목한다. ◆ 부모가 메우는 교실의 인력 공백 특수교사 김화정(47) 씨는 "보조 인력은 학교별 수요 신청을 받아 교육청에서 배치한다"며 "정기 인사 체계에 따라 연 1회 배치가 이뤄지기 때문에 수시로 발생하는 요구를 즉각 반영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수학급에는 대체로 학급당 1명의 특수교육 실무원이 배치된다. 이외에도 학교 상황에 따라 사회복무요원(공익요원), 기간제 교사, 협력 강사 등이 추가로 지원될 수 있다. 그러나 총원제와 예산 제약 탓에 현장의 인력은 늘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특수학급에 소속된 학생들도 교과에 따라 일반학급(통합학급) 수업을 병행한다. 상황에 따라 하루에도 여러 교실을 오가야 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보조 인력 1명이 여러 학생을 동시에 지원하기는 쉽지 않다. 학년과 교과에 따라 수업 방식이 달라지고, 학생별 지원 수준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치'는 돼 있지만, 실제 교실 안에서 체감하는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교사는 "통합교육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특수교사와 일반교사의 협력 구조, 충분한 보조 인력, 유연한 수업 시간 배분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수학교는 전문 인력과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증설이 쉽지 않다"며 "그렇다면 지역 거점형 소규모 특수학교를 확대하거나, 통합학교 안에서도 장애학생 중심 교육과정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학부모들의 인식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중증 장애 아동의 경우 '순회교육' 형태로 교사가 가정을 방문해 수업을 진행하는 데 그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의료기기를 착용한 채로라도 집 밖으로 나와 학교 안에서 또래와 함께 배우길 바라는 부모가 늘고 있다. 교육의 공간을 가정이 아닌 학교로, 보호가 아닌 참여로 옮겨 달라는 요구다. 문제는 제도가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고 있는지다. 통합교육 확대라는 정책 방향과 달리, 현장에서는 여전히 부모의 돌봄과 희생에 기대는 구조가 반복된다. 지원 인력의 공백은 가정이 메우고, 학교 배치의 한계는 부모의 이동과 대기로 감당된다. 정책과 현실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더 이상 그 무게를 부모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2026-02-26 12:00:00
[데이터로 보는 세상] 대구 학교급식 후식의 '당 경고'
새 학기를 앞두고 학교급식이 본격적으로 재개되는 가운데, 대구 지역 학교급식 후식의 당 함량이 타 지역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가공식품 의존도가 심화되고, 과일보다는 당 함량이 높은 음료와 유제품이 더 자주 제공되는 것으로 나타나 우려를 낳고 있다.◆ 후식 3개 중 2개는 가공식품 지난해 대구가톨릭대학교 연구진이 발간한 〈대구지역 학교급식에서 제공되는 후식의 당 함량 분석〉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대구 지역 48개 초·중·고등학교의 급식 후식 1개당 평균 당 함량은 8.2g으로 조사됐다. 이는 대전·충청 지역(5.13g)이나 인천·춘천 지역(7.21g)보다 높은 수준이다. 후식 구성도 가공식품에 편중돼 있었다. 전체 후식 메뉴 중 과일 등 비가공 식품은 32.4%에 그친 반면, 가공식품은 67.6%로 두 배 이상 많았다. 가공식품 가운데서는 음료류가 21.8%로 가장 많았고, 유제품류(17.9%), 빵류(14.7%) 순이었다. 학교급이 높아질수록 후식을 통한 당 섭취량도 뚜렷하게 늘어났다. 초등학교 후식의 평균 당 함량은 6.48g이었으나, 중학교는 8.77g, 고등학교는 9.41g으로 조사됐다. 초등학교의 과일 제공 비율은 44.1%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25.3%까지 감소했다. 반면 중·고등학교에서는 당 함량이 높은 음료류 제공 비율이 각각 23.7%, 27.2%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러한 경향이 학생들의 선호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여름철엔 '당 음료' 주의보구체적인 메뉴를 살펴보면 후식의 당 함량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1회 제공량당 당 함량이 가장 높은 메뉴는 청포도 에이드, 망고스틴 주스, 젤리로, 각각 36g의 당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아이스크림(32g)이나 딸기라떼(30g)보다도 높은 수치다. 당 농도 측면에서는 솜사탕이 90브릭스(Brix)로 가장 높았고, 초코볼(67브릭스), 젤리(62브릭스), 마카롱(56브릭스) 등이 뒤를 이었다. 연구진은 이처럼 고농도 당 식품의 경우 적은 양으로도 과도한 당 섭취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계절에 따라 후식 구성에도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연구진에 따르면 6월에는 과일 제공 비율이 줄어드는 대신 음료류 제공 비율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P〈0.001). 앞서 음료류가 1회 제공량이 가장 많고, 당 함량 역시 가장 높은 후식군으로 분석된 점을 감안하면, 기온이 높아지는 여름철 시원한 음료 제공 시 당 함량 관리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만족도·편의성 뒤 가려진 건강 대구시교육청의 식품구성기준에는 학교급식 식단은 과일 섭취를 늘리고, 당과 나트륨을 줄이는 방향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가공음료 사용은 지양하며, 불가피하게 음료를 제공할 경우에도 당 함량 10% 이하 제품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보조식 구성 시에도 고열량·저영양 식품은 배제하고, 당이 많이 함유된 식품 제공은 최대한 자제하도록 명시돼 있다. 2020 한국인영양소섭취기준 역시 총당류 섭취량을 총 에너지 섭취량의 10~20% 이내로 제한하고, 특히 조리·가공 과정에서 첨가되는 첨가당 섭취는 10% 이내로 관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과 달리, 학교 현장에서는 가공식품 형태의 후식이 여전히 자주 선택되고 있다. 영양사들은 학생들의 급식 만족도를 높이고 조리 시간을 단축하는 한편,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과일은 껍질 제거 등 손이 많이 가고, 폐기물 발생 부담이 크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한다. 문제는 이 같은 선택이 장기적으로 학생 건강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첨가당 섭취가 비만, 당뇨, 고혈압 등 만성질환 위험을 높일 뿐 아니라 세포 노화를 촉진하고 기억력·인지능력 저하, 공격성 증가 등 정서적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연구진은 "학교급식에서 가공 음료 대신 생과일이나 생과일주스를 제공하고, 당도가 높은 단 과자류 제공을 줄이는 등 체계적인 당 저감 노력이 필요하다"며 "급식 관리자들이 학생 건강을 고려한 후식 선택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그래픽〉 ▶대구 지역 학교급식 후식 구성 비가공식품(과일 등): 32.4%가공식품: 67.6%음료류 21.8%유제품 17.9%빵류 14.7%푸딩류 2.0%기타 3.7% ▶학교급별 후식 평균 당 함량·과일 제공 비율 학교급별 평균 당 함량: 초등(6.48g) → 중등(8.77g) → 고등(9.41g)학교급별 과일(비가공 식품) 제공 비율의 하락: 초등(44.1%) → 중등(27.9%) → 고등(25.3%)
2026-02-19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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