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현 기자 hyon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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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로 보는 세상]  대구 중소기업 일·생활균형 성적표 '낙제점'

    [데이터로 보는 세상] 대구 중소기업 일·생활균형 성적표 '낙제점'

    대구지역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일·생활균형 성적표가 '낙제점'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화융합학회가 발행한 '중소기업 근로자의 일·생활균형 수준과 촉진 요인'에 따르면 대구 중소기업 근로자의 전체 일·생활균형 점수는 100점 만점에 49.2점으로, 중간 기준(50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연구진은 기존의 가족 돌봄 중심 정책을 넘어 근로자 개인의 '성장'을 지원하고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조직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이직을 줄이고 직장 만족도를 높이는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 일에 파묻힌 '성장' 근로자들이 가장 크게 균형이 깨졌다고 느끼는 영역은 '성장'이었다. '일·성장균형' 점수는 42.9점으로 전체 영역 중 가장 낮았고, 만족도 역시 5점 만점에 2.90점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는 과도한 업무로 인해 개인의 목표를 잊거나 자기계발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성별에 따른 차이도 나타났다. 여성 근로자는 '여가'와 '성장' 영역에서, 남성 근로자는 '가정'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균형도를 보였다. 이는 대구 지역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 구조와도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 상사 눈치 가로막힌 워라밸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장벽은 '리더십'이었다. 일·생활균형을 지원하는 기업문화 요소 가운데 리더십 만족도는 5점 만점에 2.77점으로, 의사소통(2.94점)과 업무문화(2.89점) 등 모든 항목을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상사가 직원의 여가와 가정생활을 얼마나 배려하는지를 묻는 항목 점수는 100점 만점에 48.2점에 그쳤다. 이는 휴가나 유연근무를 신청할 때 '상사의 눈치'를 보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상황은 더 열악했다. 1~4인 규모 초소형 기업의 경우 리더십 수준은 41.4점, 만족도는 2.47점으로 전체 평균보다 크게 낮았다. 인사관리 체계가 부족한 소규모 기업에서는 대표의 인식과 판단이 곧 조직 문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실제로 활용하기 어려운 '그림의 떡'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 일·가정 양립 넘어 '일·성장'으로 연구진은 정책 방향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존의 '일·가정 양립'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기계발과 자아실현까지 포함하는 '일·성장 균형'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의 성장 기회는 직장 만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중소기업의 인력 유출을 막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 차원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분석 결과 직장 만족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었다. 상사와 직원이 성장과 업무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제도를 눈치 보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실질적인 워라밸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기업 특성에 맞는 맞춤형 컨설팅과 관리자 인식 개선 지원을 강화해, 중소기업이 자율적으로 일·생활균형 문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그래픽〉 ▶일·생활균형 수준 (100점 만점) 전체 일·생활균형: 49.2점일·가정균형: 61.2점일·여가균형: 43.5점일·성장균형: 42.9점 ▶기업문화 수준 (100점 만점) 전체 기업문화: 51.2점업무문화: 54.2점의사소통: 51.1점리더십: 48.2점

    2026-04-17 13:30:00

  • [백년대구 아카이브]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 칠성과 고성 업무 단지

    [백년대구 아카이브]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 칠성과 고성 업무 단지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3부는 근대 산업의 태동부터 공업 단지 조성, 상업 중심지의 변화, 그리고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까지 경제 활동의 공간적 변천사를 다룬다. (편집자 주) 대구는 야금야금 덩치를 불렸다.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구 도심부가 많은 인구를 전부 수용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거주 조건을 갖추지 못한 불량 주택에 지내는 이들도 크게 늘어났다. 땅도, 주택도, 사무실도, 교통망도 모두 부족해지는 때였다. 새로운 요구에 따라 도시의 구조도 재개편된다. 이 가운데 토지를 개발하며 개인이 과도한 이익을 남기거나, 제대로 된 계획 없이 토지가 난개발 되는 걸 막기 위해 '공영개발'의 개념을 도입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할 수 있고, 불량한 지구를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었다. 1980년대 이후 대구장기종합개발계획에 공영개발의 개념이 포함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다. 대상지는 안심과 월배, 불로, 지산, 송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에 몰려있던 대구시의 중심이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형태로 개편 된다.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공업단지의 효능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히려 2, 3차 산업을 키우기 위해 업무단지가 더욱 필요해지는 시점이었다. 이곳 역시 재개발의 대상으로 점찍혔다. 1993년 대구시는 북구 침산동과 고성동 일대 15만5천평 일대를 업무단지로 개발하기로 한다. 제일모직이 5만2천평, 대한방직이 6만평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다. 용도를 변경해 사무실과 전문상가, 호텔, 백화점과 공원, 주차장 등 업무지원 시설을 입지시키려 했다. 이에 발맞춰 대한방직은 비산동 염색산업단지로 공장을 이전하고, 제일모직은 구미로 이전했다. 제일모직 자리에는 2000년대 초 오페라 하우스가 들어오고, 2015년 창조경제 혁신센터 및 삼성창조캠퍼스가 세워진다.

    2026-04-17 13:00:00

  • [창간 80년,격동 80년] 거리 나온 대구 고등학생…민주주의 출발점

    [창간 80년,격동 80년] 거리 나온 대구 고등학생…민주주의 출발점

    1960년 2월 28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학교에 갈 이유가 없는 주말, 대구 시내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령'이 내려졌다. "토끼 사냥을 간다", "영화를 단체 관람한다"는 등의 명분이 내세워졌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선거를 앞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통제였던 것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이에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첫 거대한 외침이었다. 이후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며,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됐다. ◆ 1960년, 거리로 나온 학생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은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각종 불법과 부정이 동원됐다. 특히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은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 가운데 대구는 선거 판세를 가를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1956년 선거에서 장면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야도(野都)'였기 때문. 2월 28일 예정된 장면의 대구 수성천 유세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이에 당국은 2월 28일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대상은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대구여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등이었다. 학생들은 일요 등교 방침이 알려지자 각 학교별로 긴급회의를 열었다. 부당함을 지적하며 학교 측에 철회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2월 27일 오후, 경북고 이대우 학생부위원장의 집에 경북고·대구고·경북대사대부속고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상호 연락망을 구축하고 결의문을 작성하며 행동에 나섰다. 결의문 낭독은 격앙되어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일제히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횃불이 타오른 것이다. ◆ 시민들 움직인 학생들 외침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들은 불의를 규탄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봉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도 움직였다.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고, 상점 주인들은 물을 건넸다. 일부 시민들은 경찰의 탄압을 피해 학생들을 숨겨주며 시위에 동참했다. 나머지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까지 합세하면서 시위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날 약 2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체포됐고, 교사들 역시 책임을 추궁받았다. 이승만 정권 아래 움츠려 있던 대구 지역 언론도 학생들의 용기에 힘입어 2·28 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60년 2월 28일자 매일신문은 당시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정견 발표회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의 모습을 1면에 배치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정권 교체에 대한 기대를 생생하게 전했다. 이어 1960년 3월 2일자 대구매일신문 지면에는 2·28 대구 학생 의거 이후의 시위 상황이 비중 있게 다뤘다. 다가오는 3·15 부정선거를 앞둔 정치적 긴장 속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와 여야 간 치열한 선거 구도가 신문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당시 한국 사회를 뒤흔든 격변기의 분위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A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 주요 외신과 미국 등 세계 주요 일간지들도 2·28 민주운동을 잇따라 보도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이 국제사회에서도 주목받았음을 보여준다. 2·28 민주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자발적 저항이었다. 외부의 지시가 아닌 스스로의 결단으로 거리로 나선 이들의 행동은, 미래 세대가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 운동은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됐다. 2·28 대구 학생들의 저항은 이후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며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현재 2월 2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있으며, 2·28민주운동기념회관 등을 통해 그 의미가 이어지고 있다.

    2026-04-10 12:30:00

  • [백년대구 아카이브] 유통과 상업의 심장... 대형 상업 시설과 유통단지

    [백년대구 아카이브] 유통과 상업의 심장... 대형 상업 시설과 유통단지

    대구시가 기획·제작한 책 〈지상대구〉는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을 통해 대구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의 도시가 됐는지를 따라간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4부에 걸쳐 풀어낸다. 3부는 근대 산업의 태동부터 공업 단지 조성, 상업 중심지의 변화, 그리고 주거와 산업의 재배치까지 경제 활동의 공간적 변천사를 다룬다. (편집자 주) 지금도 동성로 한복판에서 불을 밝히는 대구한일극장. 한때 이곳은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라, 약속 장소였고 만남의 기준점이었으며 '문화' 그 자체였다.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 체계에 편입돼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지만, 한일극장이 처음부터 거대한 자본에 기대 성장한 것은 아니다. 이 극장은 대구 시민들의 발걸음과 취향, 그리고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동성로 문화의 중심인 '한일극장'의 시작으로 거슬러가보자. 점차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서며 도시의 형태를 갖추던 때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키네마 구락부, 1950년대는 국립 극장으로 불리다가 1967년에야 한일극장이 됐다. 한일극장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이 상당해, 대구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한일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인기에 힘입어, 1969년 아케이드로 증축하기로 했다. 기존 한일극장 건물은 유지하고, 그 주변부에 'ㄱ자' 건물을 짓는 계획이었다. 도면상으로는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중앙부 사각형이 기존 한일극장 건물이다. 도면 중앙에 '관람석 920석, 종전과 동일'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극장은 동성로 방향으로 큰 출입구를 추가로 신설해, 두 건물을 쉽게 오갈 수 있게 했다. 아케이드 건물은 상가로 활용돼, 극장에 방문한 이들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주로 파는 건 외제품이나 다수의 할인상품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시설이 아닌 '종합유통단지'가 등장한다. 도매를 전문으로 하는 대형 업체의 공간이 필요해져서다.자리가 마련되면서 전자상가뿐만 아니라 섬유, 전기재료 등을 취급하는 업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엑스코와 대구종합무역센터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설이 계획돼, 대구 지역에 있는 상공업 업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서울에 편중돼 있던 무역 기능을 지역 독자적으로 갖춰,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하려는 의도였다.

    2026-04-10 12:30:00

  • [데이터로 보는 세상] 같은 '부족' 다른 이유… 대구경북 문화생활 격차

    [데이터로 보는 세상] 같은 '부족' 다른 이유… 대구경북 문화생활 격차

    사람은 일하고 먹고 자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삶의 균형과 만족을 위해서는 적당한 문화생활이 필수다. 국가는 이를 보장하기 위해 '문화가 있는 날'을 운영하고, 공연장과 문화시설을 확충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노력에 힘입어, 대구·경북지역 시·도민들은 충분한 문화생활을 누리게 됐을까. 국가통계포털(KOSIS)에 공개된 2025 문화여가활동, 문화여가자원 통계를 바탕으로 그 실태를 들여다봤다. ◆ 낮은 문화 경험 비율 조사 결과, 지난 2025년 평균 문화예술·스포츠 관람 경험률은 57.7%로 나타났다. 관람 경험이 있는 국민은 연간 평균 7.1회를 관람했다. 대구는 관람 경험률은 51.9%로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 다만 평균 관람 횟수는 7.3회로 오히려 전국 평균을 웃돌았다. 관람하는 사람들의 '충성도'가 높은 구조다. 경상북도는 관람 경험률은 48.5%, 평균 관람 횟수 6.1회로 모두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관람 횟수는 전국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 영화·스포츠 강세, 콘텐츠 편중 뚜렷 대구·경북 지역민이 가장 많이 찾은 문화 콘텐츠는 영화였다. 대구는 관람 경험률 73%, 연평균 4.0회였고, 경북은 76.8%, 연평균 3.7회로 나타났다. 특히 경북은 영화 비중이 높아 문화 소비가 특정 분야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비교적 대구는 스포츠 경기 관람에서 강세를 보였다. 관람률이 35.2%로 전국 평균(28.5%)을 크게 웃돌았고, 특히 남성의 경우 47.7%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은 박물관 관람률이 29.0%로 전국 평균(27.2%)보다 높았다. 전통·전시 중심의 문화 향유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것으로 해석된다. ◆ 공연예술은 여전히 문턱 높아 반면 공연예술 분야에서는 대구·경북 모두 약세를 보였다. 무용 관람률은 전국 평균 2.4%에 비해 대구 1.5%, 경북 1.3%에 그쳤다. 연극·뮤지컬 역시 대구는 16.5%로 전국 평균(20.8%)보다 낮았고, 서울(27.8%)이나 세종(24.5%)과 비교하면 격차가 뚜렷했다. 음악회·콘서트 관람률도 대구는 26.3%로 전국 평균(30.4%)보다 낮았다. 경북은 스포츠 경기 관람에서도 약세를 보였다. 관람률 21.2%로 전국 평균에 못 미쳤고, 인접한 대구와 비교해도 14%p 이상 차이를 보였다. ◆ 만족도 낮은 이유는 달라 비교적 낮은 평균 관람 경험률과 마찬가지로, 대구경북의 여가생활 만족도 역시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매우 만족' 응답률은 전국 평균이 11.5%인 반면, 대구는 8.3%, 경북은 6.9%에 그치며 모두 하위권에 머물렀다. 특히 대구는 '불만족' 응답률도 19.1%로 전국 평균(15.9%)보다 높게 나타났다. 그 이유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지난 2024년 기준 대구의 인구 10만 명당 문화기반시설 수는 4.5개로 전국 평균(6.5개)에 크게 못 미친다. 실제로 '여가시설 부족'을 불만족 이유로 꼽은 비율도 3.1%로 전국 평균(2.1%)보다 높았다. 경북은 상황이 다르다. 인구 10만 명당 문화기반시설 수가 9.0개로 전국 평균을 웃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시설 부족으로 인한 불만족도는 2.6%로 전국 평균(2.1%)보다 높았다. 시설의 수는 충분하더라도, 시설의 지리적 접근성이나 공연 콘텐츠의 질적 수준이 시민들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경북은 여가 불만족 이유로 '건강 및 체력 부족'을 꼽은 비율이 24.9%에 달했다. 전국(16.3%)과 대구(17.0%)보다 크게 높은 수치다. 고령화 등 지역적 특성이 문화 향유 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수치만 놓고 보면, 대구와 경북 모두 문화생활의 관람률과 만족도가 낮은 지역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달랐다. 이제 필요한 건 획일적인 확충이 아니라, 데이터가 보여준 차이를 바탕으로 한 맞춤형 대책이다. 더 가까운 곳에, 더 다양한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이 부담없이 누릴 수 있도록 세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화생활이 일부가 아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일상'이 될 때, 비로소 살기 좋은 도시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2026-04-10 12:30:00

  • [아름다운 동행] 쓰레기집을 치우자, 새 삶이 시작됐다

    [아름다운 동행] 쓰레기집을 치우자, 새 삶이 시작됐다

    경북 의성의 한 주택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쥐떼가 튀어 올랐다. 집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방마다 치킨 봉투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남매가 함께 사는 집이었다. 가족들은 지원금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직업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은 집 안에서 흘러갔고, 그 시간은 점점 사회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있었다. "청소야 하면 되죠. 그런데 그걸로 끝날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당시 청소 작업을 맡았던 황상문(35) 씨는 단순한 정리를 넘어 지자체에 심리치료와 직업훈련 연계를 요청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무기력했던 가족이 취업해 일상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때야 비로소 '진짜 청소'가 끝났다고 느꼈다. 물건을 치우는 일을 넘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 그의 청소는 그렇게 '사회로 돌아가는 마중물'이 되고 있었다. ◆ 새로운 삶을 여는 청소 황 씨는 경북 안동에서 유품정리 기업 천국박스를 운영하는 청년 예비사회적기업 대표다. 유품 정리를 넘어 은둔형 외톨이의 방, 취약계층의 주거환경, 무연고 사망자의 집까지 그의 손이 닿는다. "쓰레기집을 치워 햇빛이 드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시 시작을 돕는 일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현장은 때로 한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 고독사 현장에서였다. 집 안 곳곳에는 가전제품마다 쪽지가 붙어 있었다. 냉장고, 혈압계, 의료기기. 쪽지에는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글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혈압이 높네. 항상 고맙다.' 처음에는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쪽지가 하나둘 늘어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서랍 속에서 발견한 파스 한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많이 쑤실 때 내게 붙어 있어라. 시원하게 해주고 쑤시지 않게 해주렴.' 누군가와의 대화가 절실했던 삶이었다. "그걸 보면서 느꼈다. 이건 단순히 치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끝까지 버티며 살아낸 흔적이구나.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겨진 가족에게는 마주하기 어려운 시간을 대신 견디며, 이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기도 하다. "'손대기 두려운 막막함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가장 많이 받는다. 모든 걸 버려달라던 분들도 부모님의 수의나 오래된 사진 앞에서는 결국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눈물이야말로 후련함과 그리움이 섞인, 비로소 시작되는 진짜 이별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 보이지 않는 노동, 길게는 5일 꼬박 현장은 길게는 5일이 걸리기도 한다. 수십 년간 쌓인 쓰레기가 마당까지 가득 찬 집도 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현장을 다녀오면 며칠간 잔상이 남는다. 공간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느껴질 때가 있다."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그 공간에 남아 있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이다. 노동 강도에 비해 수익성은 낮다. 그럼에도 황 씨가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직접 겪었던 그 막막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작은 자신의 고향집이었다. 인도네시아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오랜 기간 방치돼 쓰레기장처럼 변해 있었다.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 직접 치우기 시작한 것이 출발이었다. 이후 수도권 업체에서 일을 배우며 현장을 익혔다. 민속학을 전공하며 쌓아온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유품 속 삶을 읽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집을 정리하고 나니 가족 간 묵혀 있던 감정도 풀리고, 이웃과도 다시 연결됐다. 그래서 이 일은 돈만 보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남겨진 과제들 유품정리 현장은 지역소멸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초고령화가 진행된 경북에서는 빈집 증가 속도가 곧 유품정리 의뢰 증가로 이어진다. 특히 소멸 위험 지역일수록 그 비율은 더 높다. 대도시에서는 특수청소와 유품정리가 절반 수준이지만, 지방에서는 빈집 유품정리가 70%를 넘는다. 문제는 정리가 끝난 이후다. 빈집은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황 씨는 안동 태화동에서 진행 중인 '하우스 태화' 프로젝트처럼, 정리된 공간을 스테이·워케이션 공간으로 재생하는 모델을 꿈꾼다. 그는 "죽음의 공간을 다시 삶의 공간으로 바꾸는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선순환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는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돌봄 정책은 예방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유품정리 비용이 대부분 개인에게 전가되고, 이는 다시 빈집 방치로 이어지는 구조다. 그는 "일본처럼 유품정리를 제도화하고 생전 정리 서비스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빈집 정리에 대한 공공 지원과 데이터 활용을 통해 방치된 공간을 청년 주거 등으로 순환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빈집이 흉물이 되기 전에 다시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일은 결국 '정리'에 머물지 않는다. 마지막을 맞은 누군가의 곁을 정리하고,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을 대신 견디며, 비워진 공간이 다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잇는 일이다.

    2026-04-10 12:00:00

  • [YES KIDS ZONE]

    [YES KIDS ZONE] "치료보다 먼저, 아이 생활을 보세요"

    "키를 더 키우고 싶다"는 미용적 이유로 병원을 찾는 경우는 적지 않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더라도 성장호르몬 주사를 선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사실 병원 입장에서는 이런 수요가 반갑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현장의 전문의는 오히려 한 발 물러선다. 꿈키우다 성장클리닉 이지민 소아내분비 전문의는 "기질적인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정상 범위 안에 있다면 치료보다 생활환경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치료보다 생활 점검부터" 아이 키 성장은 병원 치료보다 일상에서의 관리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주의해야 할 요소는 비만이다. 최근 아이들은 영양 과잉 상태인 경우가 많아, 체중이 늘면서 성장판이 더 빨리 닫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성조숙증이 아니더라도 성장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결과적으로 키 성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환경호르몬이다. 플라스틱 용기나 배달 음식 용기, 일부 장난감 등에 포함된 내분비 교란물질은 성장판을 조기에 닫히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 전문의는 "이 같은 환경적 영향도 이제는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아이 키 성장을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보다 기본적인 생활습관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 꾸준히 실천하기 어려운 요소들이다. 이 전문의가 강조한 '바른생활 5계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루 8시간 이상 충분한 수면. 둘째. 하루 30분 이상 꾸준한 운동. 셋째. 스마트폰·컴퓨터·TV 사용 줄이기. 넷째. 하루 30분 이상 햇볕 쬐기. 다섯째. 균형 잡힌 식단과 규칙적인 세 끼 식사 ◆ 비타민 D 부족 흔해… '먹는 방식'도 중요 그렇다면 아이 키 성장을 위해 영양적으로 따로 챙겨야 할 부분은 없을까. 아이 키 성장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으로는 비타민 D 부족이 꼽힌다. 이 전문의는 "진료를 해보면 10명 중 8~9명은 부족한 상태라고 봐도 될 정도"라며 "야외 활동이 줄어든 생활환경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비타민 D는 뼈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일정 수준은 보충이 필요하다. 특히 과거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그 중요성을 체감했다는 설명이다. 다만 단순히 영양제를 '챙겨주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이 전문의는 "아무리 좋은 영양제라도 아이가 먹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실제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복용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아이들이 부담 없이 섭취할 수 있도록 작은 캡슐 안에 액상을 넣어 씹어 먹을 수 있는 형태를 적용하고, 알레르기 가능성을 고려한 맛을 반영한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2026-04-10 11:30:00

  • [YES KIDS ZONE] 또래보다 작아도 괜찮을까?…키 성장 진짜 기준은

    [YES KIDS ZONE] 또래보다 작아도 괜찮을까?…키 성장 진짜 기준은

    "우리 애, 또래보다 작은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질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성장은 남과의 비교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또래보다 조금 작아 보여도 정상 범위 안에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치료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작아 보이느냐'가 아니라 성장곡선과 성장 속도, 사춘기 진행 여부 같은 객관적인 기준이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을 믿고, 어디까지 걱정해야 할까. 지난 1일 꿈키우다 성장클리닉 이지민 소아내분비 전문의를 만나 부모들의 궁금증을 들어봤다. -"또래보다 작다"는 이유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의학적으로는 어떤 기준에서 검사가 필요하다고 보나. ▶의학적으로는 단순 비교보다 명확한 기준이 중요하다. 키가 또래 대비 하위 3% 미만(저신장증)이거나, 1년에 4cm 이상 자라지 않는 등 성장 속도가 떨어지는 경우. 출생 시부터 작은 자궁 내 성장지연(IUGR) 이력이 있는 경우. 그리고 여아 8세 이전·남아 9세 이전에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성조숙증이 의심될 때는 반드시 전문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부모 키가 작으니까 '원래 작은 체질이겠지'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은데, 유전과 별개로성장호르몬 결핍이나 내분비 질환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기준 이하라면 검사를 통해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대로 또래보다 조금 작아 보여도 성장곡선을 꾸준히 잘 따라가고 있다면 급하게 치료까지 진행할 필요는 없는 경우도 많다. 결국 중요한 건 '작아 보이느냐'가 아니라 성장곡선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다. -저신장증이 의심돼 내원을 한다면 어떤 검사를 진행하는가 ▶저신장 기준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성장호르몬 결핍 여부다. 다만 이 검사는 단순 혈액검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약물을 투여해 호르몬 분비를 유도한 뒤 여러 차례 채혈을 하는 방식이라 검사 과정이 비교적 복잡하다. 이 때문에 보통은 만 4세 이후 이틀에 걸쳐 성장호르몬 유발검사를 진행하게 된다. 검사 결과 성장호르몬 결핍으로 확인되면, 그때부터는 정부 지원을 받아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치료는 성장호르몬 주사가 투여되는 방식이다. 다만 현재 기준은 '호르몬이 분비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분비 자체가 부족한 경우만 급여 대상이 된다. 호르몬이 분비되긴 하지만 충분히 작용하지 않거나, 정상보다 적게 분비되는 경우에는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급여 적용이 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비급여로 치료를 진행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비용 부담이 커지는 것이 현실이다. -앞서 성조숙증도 검사 기준으로 언급했는데, 키 성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 ▶성조숙증은 쉽게 말해 또래보다 사춘기 진행이 빠른 상태다. 의학적으로는 여아는 만 8세 이전, 남아는 만 9세 이전에 2차 성징이 나타나는 경우를 의미한다. 즉, 정상보다 약 1년 이상 빠르게 성호르몬이 분비되는 상태다. 이 경우 성장판이 닫히는 시기도 앞당겨지기 때문에, 이를 늦추기 위한 성조숙증 억제 치료가 시행된다. 성장호르몬 주사가 성장을 촉진하는 치료라면, 성조숙증 억제 치료는 사춘기 진행 속도를 늦춰 성장 기간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두 치료법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종 키 성장을 돕는다는 점에서 목표는 같다. -결국 치료 시기, 이른바 '골든타임'이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맞다. 성장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시기다. 같은 치료라도 언제 시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다르다. 현장에서 보면 생각보다 늦게 오는 경우가 많다. 부모 키가 정상이라 '크겠지' 하고 기다리거나, 운동을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다. 하지만 성장 치료는 성장판이 열려 있을 때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장호르몬 결핍이 맞더라도 성장판이 많이 닫힌 이후라면 키를 크게 늘리기는 어렵다. -병원 선택할때 팁도 따로 있을까. 현실적인 조언이 될 것 같다. ▶가능하다면 소아 내분비 세부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소아 내분비 전문의는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뒤 추가로 2년 이상 소아 내분비 분야를 집중적으로 수련하고 별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후에도 일정 기간마다 자격을 갱신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성과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성장과 성조숙증은 단순한 키 문제가 아닌 호르몬과 대사, 유전 질환 등 다양한 원인이 얽혀 있는 분야라 경험과 전문성이 치료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세부 전문의 수는 많지 않다. 대구의 경우에도 등록된 전문의 수가 제한적이며, 대학병원에 집중된 경우가 많다.

    2026-04-10 10:30:00

  • [데이터로 보는 세상]

    [데이터로 보는 세상] "의리 지킨데이" 경북 청년 사투리 자부심

    "와이카노, 뭐 잘못 묵었나(왜 이러냐,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친구가 서울말을 쓰면, 경상도 남성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실제 대구 남성들이 서울로 이주한 뒤 말투를 빠르게 바꾸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 같은 정서는 영주어문학회가 올해 발행한 '경북 지역 청년층의 방언 태도와 표준어 사용'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경북 20대의 방언 사용량 자가 평가 점수는 70.4점으로, 전북 지역 20대 37.8점에 비해 두 배 가량 높았다. 연구진은 "전국적으로 표준어 사용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경북지역 20대는 다른 흐름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 표준어 써도 다 티나! 경북 청년들에게 사투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 언어다. 그렇기에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그 양상은 제한적이다. 연구진은 "보통 방언이 표준어로 바뀔 때 단어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난다. 경북 청년들도 그랬다"고 설명했다. 실제 경북 청년들은 부모 세대와의 차이로 '단어'(37.9%)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하지만 단어가 표준어로 바뀌더라도, 억양과 음높이는 끝까지 남았다. 경북 방언의 독특한 음높이 체계가 청년층에서 유지되며,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2'와 'e'를 구분하는 억양 역시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경북 청년들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언 요소로 억양(24.6%)과 음높이(18.9%)를 꼽았다. 이 때문에 경북 청년들은 "내가 쓰는 표준어는 서울말과 다르다"고 인식했다. 경북 방언 특유의 역동적인 억양 때문에, 실제 말 속도와 관계없이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더 빠르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을 두고도 "이 역시 나의 말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특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에 따라 경북 청년들은 스스로를 '표준어 화자'라고 부르는 데 어색함을 느꼈다. 대다수는 자신을 '경북 방언 화자'로 규정했다. ◆ 상황별, 성별따라 '언어 스위치' 그렇다고 이들이 사투리를 무조건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언어 스위치'를 켠다. 부모나 고향 친구와 있을 때는 방언 사용이 각각 41.3%로 크게 늘어나지만, 교수(0%)나 아르바이트(2.7%) 등 격식 있는 자리에서는 방언 사용이 압도적으로 낮아졌다. 사투리가 관계를 확인하고 분위기를 조절하는, 상황 맞춤형 '언어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성별에 따라서도 차이가 뚜렷했다. 남성은 방언에 대한 '의리'가 강했다. 20년 뒤에도 지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방언을 사용할 것이라는 응답이 73.2점에 달했다. 방언이 단순한 말투를 넘어, 집단 내 유대감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향후 방언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응답이 42.7점으로 나타났다. 취업이나 수도권 이동 등 사회적 환경을 고려해 언어를 조정하려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여성들은 자신의 말투와 수도권 표준어 사이의 차이를 더 민감하게 인식하며, 사회적 평가에 대한 부담 역시 더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경북 청년들에게 사투리는 사라져야 할 언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꺼내 쓰는 '선택 가능한 정체성'에 가깝다. 억양과 말투는 쉽게 바뀌지 않는 뿌리로 남아 있고, 필요할 때는 표준어로 스위치를 전환한다.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다. 실제 경북 20대의 83.6%가 방언 보존의 필요성에 찬성한 것도 이 같은 인식을 보여준다. 사투리는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또 하나의 언어로 자리하고 있다. -----------------------------------------------------------------------------------------------------표1) 부모 세대와 다른 사투리 요소 단어 37.8%어미 18.2%억양 18.2%발음 15.2%음높이 7.6% 표2) 청년층이 많이 사용하는 사투리 억양 24.6%어미 23.8%음높이 18.9%말 빠르기 16.4%단어 12.2%발음 4.1%

    2026-04-03 12:00:00

  • [백년대구 아카이브] 공업 도시를 향한 집념… 공단 조성의 역사

    [백년대구 아카이브] 공업 도시를 향한 집념… 공단 조성의 역사

    대구가 산업도시로 불렸던 배경에는 건실한 공업단지가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공업단지를 조성할 정도로 대구는 공장에 '진심'인 도시였다. 언제부터 거대한 규모의 공장이 자리 잡게 됐을까. 시계를 1930년대로 돌려보자. 조선총독부는 대구의 북부 지역을 '공업단지'로 꾸미고자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그 계획을 연기했다. 당장 공장을 짓지는 못했지만, 1942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사업의 밑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인 1945년 조선이 해방되면서, 공업단지가 들어설 곳을 닦는 일은 점점 미뤄진다. 시간은 흘러 1950년대에 이른다. 제일모직, 지금의 삼성이 보유하던 공장이 '거대 공단'의 출발점이었다. 제일모직은 북구 침산동에 약 7만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했다. 그 이후로 대한 방직, 조선 방직 등 유사 업종의 공장이 하나 둘 들어서며 대단지가 형성된다. 이들은 근처 신천을 공업용수로 활용하며 덩치를 불렸다. 성서산업단지라고 불리는 제2공단의 역사 역시 길고 방대하다. 고시는 1965년 2월 이뤄졌지만, 본격적으로 계획이 추진된 건 1984년이었다. 총 사업은 5차로 나눠 진행됐는데, 마지막 사업이 마무리된 건 2012년이었다. 공업도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겠다는 집념은 2010년대까지 이어진 셈이다. 일명 '3공단' 제3공업단지는 이름과 달리 제2공단보다 앞서 조성됐다. 1967년, 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경공업 제조업체를 도심 외곽으로 모으고자 기획됐다. 이를 통해 도심 지역으로 공해를 유입시키지 않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3공단은 역설되게도 도심부 중앙 쪽에 위치한다. 조성 당시에는 3공단이 위치한 노원동과 침산동이 도시 외곽이었지만, 도시가 확장하면서 중심부가 된 탓이다. 또 도심부로 지위가 바뀌면서, 지대가 상승해 기존 경공업 업체들은 설 곳을 잃게 됐다. 그 이후로 핵심 산업이 된 건 안경테, 로봇산업이다. 제일모직이 이전하는 등의 영향으로 제1공단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제3공단은 주력산업을 바꾸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6-04-03 11:30:00

  • [커버스토리] 백사자 가족의 '또 다른 가족'… 달라진 동물원 역할

    [커버스토리] 백사자 가족의 '또 다른 가족'… 달라진 동물원 역할

    "벌써 낮잠에서 깼네요" CCTV 화면을 보며 사육사가 밥 준비에 나선다. 홈캠으로 아이를 살피듯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눈을 떼지 못한다. 밥을 먹지 않고 장난을 치는 아기 백사자에게는 "밥 먹어야지" 하며 엉덩이를 두드린다. 지난해 8월 태어난 아기 백사자 루카와 루나에게 사육사들은 부모와 다름없는 존재다. 전근배(45), 정상용(32), 김서우(30) 사육사의 '밀착 육아'는 아기 백사자에 앞서 부모 개체인 백사자 부부를 돌보던 때로 거슬로 올라간다. "백사자 부부에 이어 아기들까지, 이 가족들 돌보다 등골 휘겠다"며 웃으며 건넨 말이지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던 지하 공간에서 7년을 보내야 했던 백사자 부부를 돌보는 일 역시 이들 사육사의 몫이었다. 동물원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이 생명들이 이어질 수 있었을까. 이들은 백사자 가족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줬다. 그리고 이러한 돌봄은 한 생명을 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네이처파크에는 이들 외에도 당시 구조된 55종 234마리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1시간마다 분유…아기 백사자 육아 일기 백사자 부부가 네이처파크로 온 지 1년 여가 지난 어느 날, 사육사들은 암사자의 배가 부른 것을 눈치챘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고, 영양 상태도 나빠 조금만 움직여도 쓰러지곤 했다. 그런 사자가 몸을 회복해 새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은 사육사들에게도 '경사'였다. 사육사들은 이후 과거 사육 이력도 뒤늦게 알게 됐다. "실내동물원에 있을 당시에도 출산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사산했고, 또 한 번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새끼를 잃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번 출산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2024년 8월 18일 오후 1시쯤, 야외 방사장에서 새끼 세 마리가 태어났다. 그러나 어미는 새끼를 품지 않았다. 비가 내리던 날, 새끼들은 진흙에 뒤덮인 채 방치됐고 저체온 위험에까지 놓였다. 결국 사육사들은 세 마리를 모두 데려와 인공 포육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한 마리는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 이후 루카와 루나, 두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인공 포육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상용 사육사는 "딸을 키우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혼자 맡았는데, 1시간마다 깨서 분유를 먹여야 했다. 24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후 정상용·김서우 사육사가 팀을 이뤄 돌봄을 이어갔다. 포육실이 준비되지 않았던 첫날의 기억도 선명하다. 사육사들은 호텔 객실을 급히 빌려 새끼들과 밤을 보냈다. 그러나 어린 사자들의 울음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다른 투숙객들을 고려해 다음날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고, 한켠에 모기장을 치고 임시 공간을 만들어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인공 포육실이 마련되면서 돌봄은 더 체계적으로 이어졌다. 분유를 뗀 뒤에는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고, 지루해할까 봐 장난감도 하나씩 바꿔줬다. 처음엔 고무공을 줬다가 발톱과 이빨에 금세 터져버리자 물에 띄울 수 있는 부표를 구해왔다. 나무도 직접 베어와 긁고 놀 수 있게 해줬다. 인공 포육실 곳곳에는 사육사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어릴 때는 같이 자면 팔베개를 하고 올라와 자곤 했다. 지금은 장난으로 툭 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웃음) 아기 사자들은 세 사육사를 또렷하게 알아본다. 얼굴을 비비는 '헤드 번팅'으로 친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새끼 때부터 키워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듯하다. "어미가 키워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라도 건강하게 자라줘서 다행이다. 올여름쯤이면 인공 포육실을 떠나 사육장에서 생활하게 될 텐데, 그때가 오면 섭섭할 것 같다. 그래도 결국 독립해야 하는 게 이 아이들의 삶이라 생각한다." 아기 백사자들은 부모 개체와 가까운 공간에서 지내게 되지만, 함께 생활하는 '합사'는 어렵다. 사람 손에서 자란 개체인 만큼 한동안은 사육사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새로 마련될 사육장은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조성될 예정이다. 햇빛과 바람이 통하고, 나무 그늘과 물 웅덩이까지 갖춰질 계획이다. 시민들의 관심도 뜨겁다. 아기 백사자 공개 프로그램 '아기 백사자 산책'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백사자 부부가 구조될 당시부터 지켜봤다는 류제광(35) 씨는 "잘 지내길 응원했던 백사자 부부가 아기 사자를 낳았다는 소식에 정말 기쁘고 가슴이 뭉클했다"며 "백사자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구조된 동물들 모두에게 '새 삶' 아기 백사자만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아니다. 백사자 부부와 함께 구조됐던 긴팔원숭이 부부도 올해 2월 새끼를 낳았다. 과거 이들은 좁은 유리장 안에 갇혀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한자리에 앉아 있거나, 관람객들이 먹이를 넣어주는 구멍만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넓은 사육장에서 나무를 타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새끼 역시 아직은 어미 품에 안겨 있지만, 머지않아 부모를 따라 나무를 오르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변화는 다른 구조 동물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구조된 55종 234마리가 네이처파크에서 살아가고 있다. 화장실 바닥에서 미끄러지며 지내던 미니돼지는 흙바닥 위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90cm 남짓한 수조에 갇혀 있던 사막여우는 넓은 공간에서 다른 개체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굴을 팔 수조차 없던 시멘트 바닥 위의 미어캣은 흙을 밟고 직접 굴을 파며 본래의 습성을 되찾았고, 좁은 사육장에 흩어져 지내던 알락꼬리여우원숭이들은 숲 형태의 공간에서 무리를 이루며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 이후의 삶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다. 사육사들은 "갈 곳 없고 상태가 좋지 않은 동물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점은 의미 있지만, 적응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구조된 동물들은 대부분 과거 환경에서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상태다. 먹이부터 하나씩 다시 맞춰야 한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개체는 서서히 먹이량을 늘려야 하고, 종에 맞는 먹이를 세심하게 조절한다.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치료 역시 필수다. 관절이나 피부 질환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백사자 부부 중 수컷 역시 관절이 약해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다. 이처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만큼 치료비 부담도 적지 않다. 기존 개체와의 '합사'도 또 다른 과제다. 구조 당시 나무 상자에 갇혀 있던 하이에나 두 마리는 1년 넘게 쌓인 배설물 때문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도 들기 힘들 정도였다. 현재는 기존 개체들과의 합사를 시도 중이지만, 과정은 쉽지 않다. "하이에나는 원래 무리가 아니면 잘 섞이지 않는 종이다. 두 무리로 나눠 기존 개체들과 단계적으로 합사를 시도하고 있다."합사가 원활하지 않을 경우 싸움이나 치명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어, 현재는 교차 방사를 통해 서로의 냄새에 적응시키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같은 어려움은 공간 문제로도 이어진다. 구조된 동물들을 위한 사육 공간을 마련하는 일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다. 부천의 한 실내동물원에서 온 반달가슴곰의 경우, 사육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여우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 동물원, '보는 곳'에서 '살리는 곳'으로 치료비 부담부터 합사의 어려움, 공간 확보 문제까지. 구조된 동물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구조를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설 기업이라 이윤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손님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동물들이 최대한 동물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이다. 사람 손에서 자라고 동물원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 더 자유롭게, 동물답게 지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이 같은 고민은 최근 동물원 전반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단순히 동물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보호와 치료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청주동물원이 국내 1호 '국가거점동물원'으로 지정된 사례도 이를 보여준다. 이곳에는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인기 동물 대신, 부리가 부러진 독수리나 노쇠한 사자, 웅담 채취 농장에서 구조된 곰들이 있다. 내실로 향하는 문이 항상 열려 있어 동물은 원할 때만 방사장에 나온다. 관람객이 동물을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물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환경이 제공된다. 보호소이자 재활치료소로서 동물원의 정체성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복지 전담 인력의 역할도 점차 주목받고 있다. '사육사'라는 명칭을 넘어 '동물복지사'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동물의 복지와 환경 개선, 행동 문제 해결까지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동물을 단순한 '볼거리'로 소비하는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동물의 삶을 돌보고 함께하는 이들 역시 분명히 늘고 있다. 동물원이 '보는 곳'을 넘어 '살리는 곳'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 역시 달라져야 할 때다.

    2026-03-27 13:00:00

  • [YES KIDS ZONE] 도서관·책모임·책상담… 진화하는 '책육아'

    [YES KIDS ZONE] 도서관·책모임·책상담… 진화하는 '책육아'

    요즘 육아의 핵심 키워드인 '책육아'. 하지만 이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유명하다는 전집 수백 권을 책장에 들여놓고, 부모들은 할부로 카드 값을 갚아가던 시절도 있었다. 비싸게 들여온 만큼 읽히고는 싶지만, 아이는 좀처럼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책의 중요성은 변함없다. 전문가들 역시 스마트폰과 영상 콘텐츠, 입시 중심 환경 속에서 "책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책육아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 주말마다 도서관 찾아 삼만리 24개월 아들을 키우고 있는 도혜민(35) 씨는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찾는다. 과거 도서관이 '조용히 책을 읽는 공간'에 머물렀다면, 최근에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면서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아이가 뛰놀고,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다. 도 씨의 아들은 특히 대구 뉴평리도서관 어린이자료실을 좋아한다. 집 모양으로 꾸며진 작은 공간에 들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야기방'이 있어, 아이가 편안하게 머물며 책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색다른 특징이다. 이 밖에도 도서관의 변화는 다양하다. 일부 도서관에서는 공동육아나눔터를 함께 운영하며 장난감이나 보드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도 씨는 "지난 주에는 대구도서관에 다녀왔고, 수성구 그림책도서관도 자주 간다"며 "빈백에 누워 책을 읽는 아이들도 많아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자연과 결합한 공간도 눈에 띈다. 앞산 숲속책쉼터는 소규모 비용으로 방갈로 형태의 공간을 빌려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달성어린이숲도서관은 '요정들의 오두막'을 중심으로 다양한 열람실과 체험 공간이 조성돼 있다. 도 씨는 "도서관 안에 미끄럼틀이나 놀이터도 있고, 숲이나 캠핑장을 연상시키는 공간에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책을 접한다"며 "아직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도서관은 단순한 독서 공간을 넘어 체험과 놀이, 휴식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콘텐츠와 체험형 프로그램, 다양한 테마 공간까지 더해지면서 '딱딱한 도서관'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평가다. 또 일부 지자체는 육아 지원 정책의 일환으로 도서관과 협력해 책 지원이나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책육아 환경 조성에도 나서고 있다. ◆ 책 모임도 활성화 "책 육아 공유" 도서관을 찾지 않더라도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는 '책 모임'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엄마들끼리 모여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부터, 아이와 함께 참여하는 형태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출판사나 기관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비슷한 관심을 가진 부모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임을 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년생 자매를 키우고 있는 이윤수(44) 씨는 "첫째 때부터 책 모임에 참여했으니 벌써 7년 정도 됐다"며 "책육아를 하고 싶어도 막막할 때 다른 부모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모임 형태도 다양하다. 책을 서로 공유하는 가벼운 모임부터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를 인증하는 활동, 연령이 높은 아이들의 경우 독후활동을 함께 진행하는 방식까지. 이 같은 변화는 과거 '좋다는 전집을 사서 읽히는' 방식에서 벗어나, 부모가 직접 공부하고 아이의 연령과 성향에 맞는 책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에 지자체도 책육아 지원에 나서는 분위기다. 두류도서관과 수성도서관 등에서는 부모 대상 책육아 교육과 강연이 운영되고 있으며, 대구시교육청 역시 가정 연계 독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실질적인 책육아 지원에 힘을 보태고 있다. ◆ 아이에게 맞는 책육아 필요 책육아 방식이 다양해지고 세분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히느냐'에 매달리는 경향도 있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많이'가 아니라 '아이에게 맞게'라고 말한다. 대구에서 해피책방어린이서점을 운영하는 장주미(44) 씨는 그 변화를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 전직 교사이자 두 아이를 키운 엄마이기도 한 그는 "예전에는 유명하다는 전집을 통째로 들이는 식의 책육아가 많았다면, 요즘은 우리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보는 부모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실제 책방을 찾는 부모들의 질문도 훨씬 구체적이다. '몇 개월인데 무슨 책을 보여줘야 하느냐'는 질문에서 나아가, 한글은 알지만 읽기 독립이 안 되는 아이, 책은 좋아하지만 교과 이해력이 부족한 아이, 독서 습관은 잡혔지만 사고력을 키워주고 싶은 아이 등 고민이 세분화됐다는 것이다. 장 씨는 "지금은 '좋다는 책'보다 '우리 아이에게 맞는 책'을 찾는 분위기"라며 "같은 개월 수여도 아이마다 성향과 독서 습관, 책을 좋아하는 포인트가 전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책 추천에 앞서 부모에게 여러 질문부터 던진다고 했다. 아이 개월 수는 물론,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 하루 중 아이가 책을 꺼내오는 빈도는 어떤지, 주로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책을 읽을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이나 유독 반응하는 부분이 있는지 등을 먼저 묻는다. 이를 통해 아이가 책이라는 매체 자체를 좋아하는지, 이야기의 흐름을 즐기는지, 아니면 부모와 집중하는 시간을 좋아하는지를 가늠한다는 설명이다. 장 씨는 "책 상담을 4천700가정 넘게 해오면서 느낀 건, 부모가 인터넷 정보만 믿고 '이 시기엔 이 책' 식으로 접근할수록 오히려 더 흔들린다는 점"이라며 "아이의 성향과 현재 독서 상태를 보고 골라야 실패가 적다"고 말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이런 관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두 남매를 키울 때만 해도 연령별 발달표에 맞춰 '이 시기엔 이런 책을 읽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아이들을 키우면서, 또 수천 건의 상담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장 씨는 독서가 사교육 불안과 입시 불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탕이 된다고 믿는다. 다만 그 출발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즐겁게 책과 친해지게 하느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육아가 너무 숙제처럼 되면 부모도 힘들고 아이도 책을 싫어하게 된다. 책은 결국 읽어주는 사람과 아이가 함께 즐겨야 한다"

    2026-03-27 12:30:00

  • [커버스토리] 2년 뒤 2만 마리 보호 대상… 인프라 넘어 구조 문제

    [커버스토리] 2년 뒤 2만 마리 보호 대상… 인프라 넘어 구조 문제

    시계를 2024년으로 되돌려보자. 실내동물원에 방치됐던 백사자 부부. 만약 이들을 받아줄 곳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동물단체들이 나서 구조를 시도했을 것이고, 보호시설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받아줄 곳이 없었다면, 그때는 어땠을까. 결국 아기 백사자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이들은 2.5평 남짓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가정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동물원 허가제를 통과하지 못한 시설이 2028년 유예기간 이후 폐업할 경우, 최대 2만 마리에 달하는 동물들이 한꺼번에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이들을 받아줄 인프라를 확충하는 것이 우선일까,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먼저일까. 동물단체들은 이를 단기적·장기적 과제로 나눠 함께 개선해야 할 문제로 보고 있다. ◆구조 이후, 감당 못하는 현실 동물원 허가제는 일정 기준을 갖춘 시설만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고, 기존 시설에는 개선을 위한 유예기간을 두는 제도다. 정부는 2023년 관련 법을 개정해 허가제를 도입하고, 기존 동물원에 대해서는 2028년까지 계도기간을 부여한 상태다. 이 같은 제도 도입은 국내 동물복지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구조 이후를 감당할 공공 인프라와 책임 체계는 여전히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동물원 동물 대부분은 '전시 동물'로 분류돼 구조 이후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상이 아닌 만큼, 보호와 수용은 결국 민간 동물원이나 시민단체에 맡겨지는 구조다. 동물 구조에 참여하고 있는 한 민간 동물원 관계자는 "국립생태원이나 야생동물구조센터처럼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 인프라가 더 확충될 필요가 있다"며 "민간 동물원도 구조된 동물을 더 많이 수용하고 싶지만, 공간과 비용 등 여러 여건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려움을 감수하고 데려오더라도 이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데 부담이 큰 경우도 적지 않다"며 "구조 동물을 데려올 때 사육 공간 조성이나 관리에 대한 지원이 이뤄진다면 동물복지 개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보호시설 확충과 수용 능력 확대가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정부 주도의 보호시설 확대와 함께 거점 동물원, 민간 동물원, 수의 인력 등에 대한 지원을 통해 단기적인 수용 인프라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동물자유연대 강재원 사회변화팀장은 "정부가 보호시설 조성과 거점 동물원 제도를 도입하는 등 방향성은 긍정적"이라며 "남은 개체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산 확대와 다양한 수용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근본적 해결 없다면 개선 어려워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상황은 복잡하다. 반려동물은 물론 대형 야생동물까지 모든 개체를 보호시설에서 장기간 수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정부 역시 거점 동물원 등을 중심으로 긴급 보호 방안을 마련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모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결국 인력과 예산, 공간이라는 물리적 제약 속에서 모든 개체를 무한정 보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유입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과거 수익을 목적으로 누구나 비교적 쉽게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환경이 현재의 문제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2022년 동물원수족관법이 개정되면서 동물원 허가제가 도입됐지만 이 역시 보다 강화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동물을 들여온 이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역량과 자본을 갖춘 곳만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는 반려동물 문제와도 닮아 있다. 동물자유연대 강재원 사회변화팀장은 "매년 10만 마리 이상의 유기·유실 동물이 발생하는 것 역시 동물을 쉽게 사고팔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롯된다"며 "근본적인 유입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구조 이후의 문제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실적으로 모든 개체를 장기간 보호시설에서 수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향후에는 안락사 문제까지 사회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며 "안락사는 생명의 책임성 측면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 외에 현실적인 대안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단기적으로는 보호 인프라를 확충해 구조된 동물을 감당하고, 장기적으로는 동물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구조 자체를 개선하는 이중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구조 이후를 감당하는 일과, 구조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더 이상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2026-03-27 12:00:00

  • [아름다운 동행] 성수기 수익 대신… 어르신 여름을 바꾸는 손길

    [아름다운 동행] 성수기 수익 대신… 어르신 여름을 바꾸는 손길

    여름을 앞둔 요즘, 전화가 불통되는 사람들이 있다. 에어컨 청소 업체들이다. 더위가 오기 전 미리 청소와 점검을 해두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고객의 집을 오가는 일정이 쉴 틈 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병수(33) 씨의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강 씨는 퇴근 후 저녁 시간이나 주말 등 틈나는 시간을 쪼개 무상으로 에어컨을 살피는 '재능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조금 덜 바쁠 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비수기 때 하면 제 몸은 편하겠지만, 어르신들께는 지금이 더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더워지면 바로 쓰실 수 있죠" ◆어르신 댁 에어컨 무상 청소 지난 18일 찾은 한 어르신의 집. 에어컨 청소가 시작되자 어르신은 옆에서 지켜보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이번 여름도 그냥 참고 지나가야 하나 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에어컨을 분해하자 내부에는 곰팡이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장기간 청소가 이뤄지지 않으면 냉방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떤 어르신 댁에서는 실내 흡연으로 에어컨 내부까지 담배 냄새가 깊게 밴 경우도 있었다. 분해하는 순간 벌레가 쏟아진 적도 있다" 강 씨는 이러한 상황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건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과 직결된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순 청소를 넘어, 어르신들의 생활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드리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에어컨 청소 비용은 기종에 따라 7만~15만 원 수준이다. 누군가에겐 부담이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여름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비용이 되기도 한다. 이에 강 씨는 장비와 세척제, 이동 비용, 인건비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부담하며 재능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 청소보다 오래 남는건, 대화 청소가 한창인 시간, 어르신이 한쪽에 서서 연신 말을 건넨다. 걸레를 들고 따라다니며 도와주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그거 무거워요. 제가 할게요. 대신 재밌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강 씨가 웃으며 말하자, 어르신도 따라 웃는다. "아이고, 늙은 할매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다 있네." 강 씨는 청소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대화'라고 말한다. 청소로 묵은 때를 닦아내듯,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쌓인 외로움도 함께 덜어내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자식 이야기, 살아온 시간, 혼자 지내며 느끼는 외로움까지. 짧은 시간 속에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어르신들께는 누군가 잠시라도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어르신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에어컨도 깨끗해졌지만, 사람을 만나서 더 좋았다." 그 말을 들으며 강 씨는 생각했다. "내가 청소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온 거구나." 그 순간, 이 활동을 계속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은 일을 시작한 지 1년쯤 됐을 때 생겨났다고. "2017년부터 에어컨 청소와 보수 일을 해왔는데, 그때 대구 남구의 한 고아원에서 세탁기 청소를 해본 적이 있다. 이후 같은 해 에어컨 청소 재능기부를 시작으로, 수성구 고아원 등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며 "봉사라고 해서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일을 매일매일 꾸준히 하듯 가능한 범위에서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선한 영향력, 다양한 분야로 확장 강 씨의 재능기부는 주변으로도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다. 팀원들에게 이 같은 활동을 이야기했을 때, "취지가 좋다", "필요하면 언제든 함께하겠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실제로 한 번은 강 씨가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로 방문이 어려워지자, 팀원이 대신 어르신 댁을 찾아 2가구의 청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역시 별도의 보수 없이 자발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강 씨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재능기부를 더 넓은 형태로 확장해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사업자들과 협업해, 보다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들어가고 싶다." 현재 그는 도배, 주거 청소, 커튼·블라인드 설치, LED 조명 교체, 요리 등 여러 업종 종사자들과의 협업을 구상 중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특성을 고려해 외부 활동보다는 주거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집을 정비하고, 따뜻한 식사를 함께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작은 재능에서 시작된 이 활동은 이제 '통합형 재능기부'로의 확장을 앞두고 있다.

    2026-03-27 12:00:00

  • [태서맘 생존기] <6> 천재설

    [태서맘 생존기] <6> 천재설

    객관성을 유지하며 살아온 나에게, 그 객관성을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한태서. "아이고~ 태서 천재~" 태서가 태어나고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다. 태서의 별명은 '천재'. 가족들이 모인 날이면 '한태서 천재설'은 가설을 넘어 거의 정설처럼 통용된다. 나도 신이 나서 태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총동원한다. 짧은 혀로 할 수 있는 말들을 줄줄이 시키고, 지시를 따르게 하고, 재롱도 부리고, 춤도 시킨다. 그럴때면 가족들 반응은 항상 같다. "태서 진짜 똑똑하네" "머리 큰 게 이유가 있었네" "돌잡이 때도 판사봉 잡았잖아!" "서울대가 뭐야 하버드도 가겠다" 때로는 과도한 '천재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약 설명서를 들고 중얼거리면 "영어도 읽나보네, 발음이 좋은데?"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누르면 "기계도 다루네, 공대 보내야겠네"피아노를 두드리면 "두손으로 치는건 어떻게 알았지? 조성진 같다" 물론 가족 말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한태서 천재설'을 전파하지는 않는다.대신 조용히 확인해보는 곳이 있다. AI다. "태서가 요즘 이런 행동을 하는데, 이거 좀 천재 아닌가요?" 돌아오는 답변은 늘 같다. "정상 발달입니다." 단호하다. 그리고 정확하다. 괜히 물어본 내가 더 머쓱해진다. 그래, 대부분 아이들이 다 이렇게 크는 거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한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애는… 진짜 좀 다른 것 같기도…"그렇게 오늘도 '한태서 천재설'은 조용히 유지된다.

    2026-03-26 12:00:00

  • [데이터로 보는 세상]

    [데이터로 보는 세상] "남성은 실직, 여성은 폭력"… 홈리스도 '성별 차이'

    3월이지만 아직도 바람은 매섭다. 봄이 오는 듯하다가도 다시 찬 공기가 밀려온다. 계절이 짧아지며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날씨는 점점 '춥거나 덥거나'로 양극화되는 모습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유난히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들이다. 그런데 홈리스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이유로 거리로 내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2025년 〈대구경북연구〉에 발표된 '대구지역 남녀 홈리스 분석'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 홈리스가 거리로 내몰리는 이유와 자립 과정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은 실직이나 부채 등 경제적 요인이 큰 반면, 여성은 가정폭력과 돌봄 부담, 정신질환 등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차이를 고려한 성별 맞춤형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남성은 '실직', 여성은 '폭력' 남성과 여성 홈리스는 거리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남성 홈리스의 경우 실직이나 부채 등 경제적 문제가 주요 원인으로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주거를 잃고 노숙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여성 홈리스는 가정폭력, 돌봄 부담, 정신질환 등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성 홈리스의 노숙 원인이 남성보다 훨씬 복합적인 구조를 보이며, 남성이 약 12개의 요인으로 설명되는 반면 여성은 최대 34개의 요인이 얽혀 있는 경우도 확인됐다. 정신건강 문제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났다. 여성 홈리스의 정신질환 진단 비율은 55.4%로 남성(27.3%)의 두 배 이상이었다. 장애 진단 역시 여성(47.6%)이 남성(22.9%)보다 높게 나타났다. 홈리스들이 생각하는 '집'의 의미에서도 성별 차이가 나타났다. 남성은 집을 '개인적인 독립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정적인 주거를 확보하고 스스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자립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반면 여성은 집을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정서적 공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차이는 자립 방식에서도 나타났다. 남성의 자립 유형은 스스로 자립을 추진하는 주도형과 시설 종사자의 권유에 따르는 순응형 두 가지로 구분됐다. 반면 여성은 보다 다양한 형태를 보였다.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자치형,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하는 가족형, 시설에서 만난 사람들과 협력하는 협력형, 종교적 믿음을 기반으로 삶을 재건하는 신앙형 등 네 가지 유형이다. ◆ 자립 성공 사례 살펴보니 연구진은 노숙인 지원 정책 역시 성별에 따른 차이를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남성과 여성 홈리스가 거리로 내몰리는 원인과 자립 과정이 서로 다른 만큼, 획일적인 지원 방식으로는 실질적인 자립을 돕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자립에 성공한 사례들은 주거 지원뿐 아니라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와 지원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 남성 홈리스는 쉼터 생활과 자활 근로를 통해 저축한 돈으로 원룸을 계약하며 자립에 성공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고시원과 쉼터를 거친 뒤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면서 안정적인 주거를 확보했다. 여성 홈리스의 경우 시설에서 만난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며 자립을 준비하거나,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주거를 마련하는 사례가 많았다. ◆ 성별 차이 고려한 지원책 필요 연구에서는 특히 정신질환 대응을 위한 정신보건 전문요원 확대 배치와 함께, 개인 상황에 맞춘 다양한 형태의 주거 지원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단독 주거 형태뿐 아니라 공동 이용주택이나 체험형 주거 등 다양한 방식의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주거 제공 이후에도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례 관리와 통합 돌봄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 관계 회복을 지원하는 가족형 쉼터나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체험홈 등 기능별 시설 확충도 중요한 과제로 제시됐다. 대구시는 2019년 「대구광역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조례」를 시행하며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2026년 시행 예정인 지역 통합돌봄 체계 구축을 앞두고 관련 정책 준비도 진행 중이다. 연구진은 "노숙인 지원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개인의 삶의 맥락과 성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지역사회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성별 노숙 진입 원인 분포〉 ■ 남성 홈리스 집(Home)을 잃어버림 : 50% (부모 사망, 가족 해체 등)선택하지 않은 병 및 회피로 얻은 병 : 30% (조현병 발병, 알코올 중독 등)신용을 잃어버림 : 10% (보증 문제, 채무 등 경제적 파산) ■ 여성 홈리스 선택하지 않은 장애 및 정신질환 : 70%여성이기에 감당함 : 40% (가정폭력, 독박 가사·돌봄 노동 등)집을 잃어버림 : 30%신용을 잃어버림 : 10%

    2026-03-19 11:30:00

  • [태서맘 생존기] <5> 사회초년생

    [태서맘 생존기] <5> 사회초년생

    3월. 새 학기. 아기들에게도 첫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입소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어린이집은 역시 3월이 가장 붐빈다. 주변을 봐도 "이번에 어린이집 보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어른들만 동기 있는 게 아니다.아기들에게도 어느새 '24년생 동기', '23년생 선배'가 생긴다. 하지만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듯, 시작은 쉽지 않다.보통 어린이집은 2주 정도의 '적응 기간'을 둔다. 긴 곳은 4주까지도 간다. 첫 단계는 엄마와 함께 등원하기. 다음 단계는 엄마가 잠깐 사라지기. 그리고 1시간 혼자 버텨 보기. 현관에서 엄마와 헤어져 보기. 점심 먹기. 낮잠 자기. 낮잠까지 성공하면, 사실상 수습기간 통과다. 물론 아이마다 적응 속도는 제각각이다. 어떤 아이는 며칠 만에 적응하고, 어떤 아이는 몇 주 동안 눈물로 출퇴근(?)을 한다. 태서는 나의 복직 때문에 12개월에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작년 9월이었다. 첫 등원 날은 지금도 또렷하다. 다행히 태서는 적응이 빠른 편이었고, 미션들을 빠르게 클리어했다. 처음 현관에서 헤어지던 날에는 선생님 손을 잡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뒤에서 바라보던 엄마만 조금 서운했다."이렇게 쿨하게 간다고?" 첫 점심을 먹은 날엔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태서가 부족했는지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손짓하더라고요."역시 먹는 일에는 진심이었다.어쩌면 어린이집 적응이 빠른 이유도 간단했을지 모른다. 맛있는 밥이 나오니까. 처음 낮잠을 잔 날 받아본 사진은 아직도 가끔 들여다본다.낯선 공간에서도 쿨쿨 잘 자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런 태서가 이제 만 1세반이다. 만 0세반 동생들이 생긴, 어엿한 형님인 셈이다.그리고 어린이집에서 들려오는 태서의 사회생활 이야기는 종종 엄마를 웃게 만든다. 새로 적응하느라 울고 있는 친구를 꽉 안아 준다거나. (힘 조절이 안 돼 선생님이 떼어놓긴 하지만)최애 간식 딸기를 선생님 입에 쏙 넣어 준다던가 (엄마에게는 죽어도 안 주면서)장난감을 친구에게 건네주며 인심을 쓴다거나 (잠시 후 다시 회수하지만)이쯤 되면 태서는 어린이집 사회생활 만렙이다.엄마보다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은 태서.이쯤 되면 엄마도 배워야 할 것 같다."태서야! 엄마에게도 비법 좀 전수해 주라."

    2026-03-12 11:45:00

  • [아름다운 동행] 전세사기 절망 속…피해자가 피해자의 손을 잡다

    [아름다운 동행] 전세사기 절망 속…피해자가 피해자의 손을 잡다

    2022년 10월, 정태운 씨(35)는 전세사기를 당했다. 일반적인 전세사기와는 다른 '신탁 사기'였다.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살고 있던 집에서는 퇴거해야 했다. 1억 원의 보증금은 한순간에 0원이 됐고, 손에 쥔 채권은 종이 쪼가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LH가 해당 주택을 매입하면서 정 씨는 보증금 6천500만 원을 회복했다. 정 씨의 인생으로만 보면 불행은 일단락된 셈이다. 이 사건은 전국 첫 'LH 매입'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한숨 돌릴 법도 했다. 그러나 정 씨는 멈추지 않았다. "내 사건이 해결된 것뿐이지, 전세사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후 정 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는 민간단체인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의 공동위원장이 됐다. 전세사기를 겪은 사람이 다시 전세사기 피해자 곁에 선 것이다. ◆ 피해자가 돕는 피해자 6일 오전 만난 정태운 씨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그중 한 메시지를 보여주며 정 씨는 미소를 지었다. 카카오톡 대화창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구에서 '1일 상담소'를 운영할 때 만난 분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 신청을 네 번이나 했다가 모두 불인정됐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길에도 다섯 번째 신청을 하고 온 상태였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인정'은 사실상 마지막 동아줄과 같다. 피해자로 인정되면 국가가 해당 주택을 매입하거나, 매입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 무상 거주가 가능하다. 또 채권 매입을 통해 전세대출 상환 부담을 줄이고, 최대 20년간 무이자로 원금만 분할 상환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하지만 인정 절차는 쉽지 않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임대인의 기망 의도가 입증되거나 형사 고소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는 등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단순히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정만으로는 사기로 인정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수차례 신청 끝에 불인정을 통보받는다.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할을 한다. 피해자의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중개대상물 확인서 등 관련 서류를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며 법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낸다. 계약 당시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있었는지, 고의로 사실을 숨긴 정황은 없는지 등을 함께 따져보는 것이다. 정 씨는 이를 두고 "피해자들이 놓친 단서를 함께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피해자 역시 '꼼꼼'의 상담 과정에서 등기부와 계약 서류 속 허점을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형사 고소가 진행됐다. 결국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피해자에서 활동가로 그렇다면 왜 민간단체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전세사기를 당한 뒤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경찰이다. 그러나 계약서상 명확한 사기 정황이나 임대인의 기망 의도가 입증되지 않으면 사건은 대부분 불송치나 불기소로 끝난다. 변호사를 찾아가면 형사소송은 어렵고 민사로 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오지만, 수임료 부담도 만만치 않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피해지원센터 역시 행정 절차 안내에 집중돼 있어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도움은 제한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러 번 문을 두드리다 결국 좌절하는 피해자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정 씨는 그 좌절의 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직접 목격했다. "2024년 5월 대구에서도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에서 여덟 번째였다. 대책위에서 함께 활동하던 분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생각이 확고해졌다. '전문성이 필요하겠다. 아무것도 모르면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날 이후 정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세사기 대응 활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피해를 입은 건물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시민단체들과 함께 대구 전세사기 대책위를 구성했고, 피해자 250여 명이 참여하는 카카오톡 상담방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전국 대책위 활동에도 합류하면서 제도 개선 논의에도 참여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 과정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하지만 정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 상담을 이어가다 보니 법과 부동산 구조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16시간씩 책을 붙잡았고 그렇게 5개월 만에 시험에 합격했다. 정 씨는 "전세사기를 파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법과 제도를 공부하게 됐다"며 "피해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니 '이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25년 12월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이 발족했다. ◆ 상담 끝나면 사흘은 몸살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는 구미에서 정기 상담소를 연다. 피해자들이 예약을 통해 찾아오면 상담사들이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등을 함께 살펴보며 대응 방법을 안내한다. 특정 지역에서 집단 피해가 확인될 경우에는 '일일 상담소'를 운영한다. 피해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설명을 듣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찾아가는 방식이다. 첫 상담소는 오피스텔 전세사기 피해가 컸던 대구 중구에서 열렸고, 두 번째 상담소는 다가구 주택 100여 채에서 피해가 발생한 구미 진평동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 씨는 상담 방식도 피해자 상황에 맞춰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상당수가 생계 때문에 평일 낮 시간을 내기 어렵다 보니 두 번째 상담소부터는 주말 운영도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인력이다. 전문 상담원은 정 씨를 포함해 두 명뿐이고, 보조 상담사 두 명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상담은 대부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진다. 한 사람당 한 시간씩 시간을 나눠 최대 40명까지 상담을 진행한다. 피해자의 계약 내용과 보증금 규모, 근저당 상황이 모두 달라 상담 과정에서는 빠르게 계산하고 판단해야 할 내용도 많다. 정 씨는 "상담이 끝나면 진이 빠진다. 점심시간만 지나도 머리가 아플 정도"라며 "하루 상담을 마치면 이틀, 사흘은 몸져눕는다"고 말했다. ◆ 모두 함께 걸으니 가능한 일 그럼에도 그들이 상담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도 피해자들이 '도움이 됐다'고 말해주면 버틸 힘이 생긴다." 정 씨는 이 활동이 여러 사람의 힘이 모였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꼼꼼'의 중심은 전세사기 피해 당사자들이지만, 여기에 법률·노동·의료 등 각 분야 전문가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변호사들은 형사 고소와 민사 소송 등 복잡한 법적 절차를 돕고, 노무사들은 피해로 생계가 위태로워진 이들의 경제적 회복 방안을 함께 고민한다. 정신적 충격이 큰 피해자들을 위해 의료진이 심리 상담과 트라우마 치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정 씨는 "전세사기 사건의 경우 변호사 수임료만 해도 수백만 원이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함께하는 변호사들은 최소 비용으로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며 "이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여 피해자들에게 닿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상담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토대로 같은 임대인이나 중개사에게 피해를 입은 사례가 확인되면, 개별 대응보다 공동 고소를 권하기도 한다. 여러 피해자가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사건의 실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 씨는 "그럴 때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정 씨는 "처음에는 도움을 받으러 왔다가 나중에는 다른 피해자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며 "그분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고 전문 상담 인력으로 키워가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 〈소박스 - 전세사기 예방 체크리스트〉 집을 보러 가면 보통 햇빛이 잘 드는지, 물이 잘 나오는지, 벌레는 없는지부터 확인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다음은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 공동위원장이 강조한 전세사기 예방 체크리스트다. ▶ 등기부등본 먼저 확인하기 집을 보러 가기 전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근저당 설정 여부와 채권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세보증보험 가입 가능 여부 확인하기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주택인지 확인하면 위험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 공인중개사 등록 여부 확인하기 계약 전 공인중개사 자격과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중개사무소 정보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 임대인의 재산 상황 살펴보기 임대인이 보유한 주택 수와 채무 상황에 따라 보증금 반환 위험이 커질 수 있다. ▶ 피해가 의심되면 혼자 고민하지 않기 전세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정 씨는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은 매우 치밀하게 접근한다"며 "피해를 인지했다면 혼자 버티기보다 가능한 한 빨리 상담을 통해 대응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26-03-12 11:45:00

  • [YES KIDS ZONE]

    [YES KIDS ZONE] "우리 애는 왜 이럴까"… 영유아 기질검사 찾는 부모들

    "우리 애는 왜 이럴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질문. 아직 의사소통이 어른만큼 완전하지 않은 영유아 시기에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기 어렵다. 어른이라면 MBTI라도 물어보면 될 텐데, 아이에게는 그럴 수도 없다. 그런 답답함이 쌓일 즈음 부모들은 '기질검사(TCI)'라는 문을 두드린다. TCI는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 특성을 함께 살펴보는 성격 검사다. ◆ 아이 기질검사 수요 폭증, 왜? 성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영유아 시기에는 후천적인 성격보다 타고난 기질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기질검사는 아이의 행동과 반응을 이해하는 하나의 참고 도구로 활용된다. 이경은 씨(42)도 그랬다. 최근 아들 재은 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아이가 흥분하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훈육도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자 혹시 ADHD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결국 상담센터를 찾았고, 전문가로부터 '기질검사(TCI)'를 권유받았다. 검사는 놀이 관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상담사가 아이와 함께 놀며 행동을 살피고 부모와 상호작용하는 모습도 관찰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보호자인 이 씨는 아이의 기질과 관련된 질문지에 응답했다. 검사 결과 재은 군은 자극추구 성향이 높고 위험회피는 낮은, 충동성과 흥분도가 높은 기질로 나타났다. 활동적이고 자극에 민감한 유형이다. 하지만 이 씨의 양육 방식은 아이의 기질을 더 자극하는 방향에 가까웠다. 이 씨는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새로운 걸 찾아다녔다"며 "공룡을 좋아한다고 하면 공룡박물관을 찾고, 곤충에 빠지면 곤충박물관으로. 주말이면 키즈카페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의 기질을 자극하는 활동은 많이 했지만, 흥분했을 때 스스로 진정하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 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띈 항목은 '예기불안'이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높은 기질이다. 이 씨는 "아이가 불안해할 때마다 '괜찮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며 "그런데 이런 기질의 아이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은 말이라는 설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이러한 기질의 아이의 경우 불안해할 때 막연한 위로보다 선택지를 제시해 상황의 확실성을 높여주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 부모 양육 방향 알려줘 이렇듯 아이의 기질검사는 아이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는 동시에 부모가 어떤 방향으로 양육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씨 역시 기질검사와 함께 부모 양육태도 검사를 진행했다. 부모가 평소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이 씨는 아이의 행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기질 자체가 흥분도가 높은 아이다 보니 쉽게 흥분하고, 진정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고 하더라"며 "부모 모두 이성적인 성향이 강해 감정을 충분히 읽어주지 못한 점도 아이의 불안을 키웠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 방식대로 아이를 양육해 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6개월 전 기질검사를 받았다는 유혜지 씨(34) 역시 만족감을 나타냈다. 예전에는 아이가 실수 후 위축되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회피 점수가 높다는 결과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유 씨는 "다른 아이들은 괜찮은데 우리 아이만 왜 이럴까 하며 아이를 탓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며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양육 방식을 바꾸니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 하나의 도구로 잘 활용해야 25년간 놀이치료 현장에서 활동해 온 윤경민 체인지아동발달연구소장은 최근 영유아 기질검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윤 소장은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예전보다 기질검사를 문의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했다. 이어 "양육의 어려움이나 어린이집·유치원에서의 사회성, 주의집중 문제 등을 계기로 상담을 찾는 부모들이 많다"며 "아이의 행동이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문제인지 궁금해 검사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심리검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검사 결과를 맹신하기보다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어떻게 조절하며 살아갈지를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TCI 검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질은 타고난 성향을 의미하지만 성격은 그 기질을 얼마나 잘 조절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설명이다. 윤 소장은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운전자가 그것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드러날 수 있다"며 "기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다루는 힘을 기르는 것이 검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또한 영유아 기질검사의 경우 대부분 부모 보고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해석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부모가 생각하는 아이의 기질과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부모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함께 갈 때 더 정확해진다"고 말했다. 윤 소장은 "양육은 아이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의 기질이 만나 상호작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아이의 행동이 힘들게 느껴질 때 그것은 부모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두 사람의 기질이 충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의 말도 덧붙였다.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라면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2026-03-12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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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ES KIDS ZONE] "우리 애는 왜 이럴까"… 영유아 기질검사 찾는 부모들

    "우리 애는 왜 이럴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질문. 아직 의사소통이 어른만큼 완전하지 않은 영유아 시기에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기 어렵다. 어른이라면 MBTI라도 물어보면 될 텐데, 아이에게는 그럴 수도 없다. 그런 답답함이 쌓일 즈음 부모들은 '기질검사(TCI)'라는 문을 두드린다. TCI는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성격 특성을 함께 살펴보는 성격 검사다. ◆ 아이 기질검사 수요 폭증, 왜? 성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인 영유아 시기에는 후천적인 성격보다 타고난 기질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 때문에 기질검사는 아이의 행동과 반응을 이해하는 하나의 참고 도구로 활용된다. 이경은 씨(42)도 그랬다. 최근 아들 재은 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아이가 흥분하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훈육도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자 혹시 ADHD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결국 상담센터를 찾았고, 전문가로부터 '기질검사(TCI)'를 권유받았다. 검사는 놀이 관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상담사가 아이와 함께 놀며 행동을 살피고 부모와 상호작용하는 모습도 관찰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보호자인 이 씨는 아이의 기질과 관련된 질문지에 응답했다. 검사 결과 재은 군은 자극추구 성향이 높고 위험회피는 낮은, 충동성과 흥분도가 높은 기질로 나타났다. 활동적이고 자극에 민감한 유형이다. 하지만 이 씨의 양육 방식은 아이의 기질을 더 자극하는 방향에 가까웠다. 이 씨는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새로운 걸 찾아다녔다"며 "공룡을 좋아한다고 하면 공룡박물관을 찾고, 곤충에 빠지면 곤충박물관으로. 주말이면 키즈카페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의 기질을 자극하는 활동은 많이 했지만, 흥분했을 때 스스로 진정하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 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띈 항목은 '예기불안'이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높은 기질이다. 이 씨는 "아이가 불안해할 때마다 '괜찮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며 "그런데 이런 기질의 아이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은 말이라는 설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이러한 기질의 아이의 경우 불안해할 때 막연한 위로보다 선택지를 제시해 상황의 확실성을 높여주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 부모 양육 방향 알려줘 이렇듯 아이의 기질검사는 아이를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의 성향을 이해하는 동시에 부모가 어떤 방향으로 양육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씨 역시 기질검사와 함께 부모 양육태도 검사를 진행했다. 부모가 평소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이 씨는 아이의 행동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기질 자체가 흥분도가 높은 아이다 보니 쉽게 흥분하고, 진정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고 하더라"며 "부모 모두 이성적인 성향이 강해 감정을 충분히 읽어주지 못한 점도 아이의 불안을 키웠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그 방식대로 아이를 양육해 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6개월 전 기질검사를 받았다는 유혜지 씨(34) 역시 만족감을 나타냈다. 예전에는 아이가 실수 후 위축되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회피 점수가 높다는 결과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유 씨는 "다른 아이들은 괜찮은데 우리 아이만 왜 이럴까 하며 아이를 탓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며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양육 방식을 바꾸니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 하나의 도구로 잘 활용해야 25년간 놀이치료 현장에서 활동해 온 윤경민 체인지아동발달연구소장은 최근 영유아 기질검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윤 소장은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예전보다 기질검사를 문의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했다. 이어 "양육의 어려움이나 어린이집·유치원에서의 사회성, 주의집중 문제 등을 계기로 상담을 찾는 부모들이 많다"며 "아이의 행동이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문제인지 궁금해 검사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심리검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검사 결과를 맹신하기보다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어떻게 조절하며 살아갈지를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TCI 검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질은 타고난 성향을 의미하지만 성격은 그 기질을 얼마나 잘 조절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설명이다. 윤 소장은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운전자가 그것을 잘 다루지 못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드러날 수 있다"며 "기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다루는 힘을 기르는 것이 검사의 목표"라고 말했다. 또한 영유아 기질검사의 경우 대부분 부모 보고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해석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소장은 "부모가 생각하는 아이의 기질과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부모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함께 갈 때 더 정확해진다"고 말했다. 윤 소장은 "양육은 아이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의 기질이 만나 상호작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아이의 행동이 힘들게 느껴질 때 그것은 부모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두 사람의 기질이 충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의 말도 덧붙였다.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라면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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