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의 모든 물가가 상상도 못 할 만큼 올랐다. 식량 배급도 없앤다. 가난한 월급쟁이, 식구가 많은 가정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근심이다."
영천성당의 프랑스 출신 가톨릭 선교사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 1895~1972년) 신부가 쓴 1945년 10월 28일의 일기다. 그의 글에는 당시 처참한 시대 상황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이를 통해 왜 1946년 10월 대구경북에서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는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대구의 식량난과 고물가 문제가 심각했다. 루이 신부는 그의 일기를 통해 1945년 9월 15일 "대구에 있는 동료 사제들이 비참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했다. 같은 해 11월 3일 "너무 많은 돈이 유통되는 것이, 터무니없이 높은 물가의 원인"이라고 기록했다.
귀국 동포의 유입과 함께 빈민도 늘어갔다. 신부는 1946년 1월 4일 "만주에서 돌아온 가난하고 불행한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있다. 얼마나 비참한지"라고 안타까워했다. 한 달 뒤 2월 18일에는 "가난은 더 확산되고 있다. 만주와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로 인해 생활이 더욱 더 어려워진다. 더 이상 구매할 쌀도 실어 올 쌀도 없다"고 하소연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1946년 4월 "천연두와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특히 아이들 중 많은 희생자가 나온다"고 했다. 같은 해 6월 30일에는 "콜레라가 금호, 신녕, 여러 인근 마을에 걸쳐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썼다.
이런 가운데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그다음 날 루이 신부는 "공출 때 가혹하게 굴었던 경찰이 피살되고, 수많은 집이 약탈을 당했다. 이 시위의 원인은 미 군정의 과도하게 강요된 미곡 공출, 식량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음, 철도운행의 열악한 노동조건, 그리고 독립에 대한 전적인 열망에 있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의 일기처럼 '10월 항쟁'은 당시 열악했던 사회경제적 환경이 빚어낸 '역사의 폭풍'이라는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오랜 시간 '좌익 세력'의 '폭동'으로만 치부돼왔던 10월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중앙연감'을 바탕으로 한 정해구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대구경북에서 시위에 참여한 연인원 77만3천 명 중 파업투쟁은 5만3천 명이고, 나머지 72만 명은 군중투쟁으로 분류된다. 노조와 좌익세력의 '정치적 폭동'보다 '자연발생적 민중 봉기'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지역사를 연구해온 박창원 계명대 교수도 같은 맥락에서 10월 항쟁을 바라봤다. 박 교수는 "해방 직후의 식량난은 이듬해 더욱 심각해졌다. 매점매석이 더해져 쌀값이 폭등하고, 그마저도 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콜레라로 교통이 차단되자 굶주림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상까지 나타났다"고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식량 요구와 노조의 파업이 결합했다. 식량은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미 군정은 쌀값 폭등에 따른 소동으로 여겨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쌓이고 쌓인 분노가 '10월의 폭풍'을 낳게 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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